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32)
132. 때 아닌 겨울(2)
#132
“2년 만이네.”
손을 뗀 아데산이 로난을 마주 보고 섰다. 떨려오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뚝뚝 묻어나 있었다. 가만히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로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선배?”
“···잠깐만 이러고 있어 줘.”
2년 전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과감한 행동이었다. 애초에 그때는 아데샨이 키가 더 컸으니 할 수 없는 자세기도 했다.
턱 아래로 드리운 머리에서는 겨울꽃 냄새가 났다. 그녀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데샨이 말했다.
“진짜 돌아왔네.”
“아까부터 말했잖아요.”
“오래 기다렸어.”
코트를 걸친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포옹하듯 아데샨을 감싸 안은 로난이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두 사람은 제법 오랫동안 그 자세를 유지했다. 마침내 고개를 든 아데샨이 배시시 웃었다.
“키가 많이 자랐네.”
“그건 저도 놀랐어요.”
“머리카락도 엄청 길었고. 이상하게 수염은 별로 안 자랐어.”
“머리카락? 아.”
로난은 그제야 수북한 무언가가 뒷목을 덮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손을 가져다 대니 덤불 같은 머리칼이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최소한 어깨까지는 자란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느끼는 거추장스러운 감촉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으.”
“아하하, 불편하면 나중에 내가 잘라 줄게.”
“젠장, 고마워요. 그나저나 방금 한 말 진짜에요?”
“응?”
“2년이 지났다는 거 말이에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아데샨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이리저리 비틀던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걸 싸게 먹혔다고 해야 하나.’
미리 각오를 해뒀기에 충격은 덜했다. 오래 걸릴 것을 염두하여 이것저것 대비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간신히 생각을 정리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요? 누나랑 나머지 사람들은?”
“나는 잘 지냈어. 다들 건강하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네요. 진짜로.”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온 이후 가장 듣고 싶던 말이었다. 별안간 아데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 그런데 나비로제 교관님이 조금···.”
“뭐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꼬리를 끄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으음···아냐. 이건 본인에게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미안해.”
“됐어요.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니죠?”
“응. 그렇기는 한데···.”
아데샨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영 수상했지만 본인이 저렇게 나오는 이상 채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을 예감한 로난이 대화 주제를 바꿨다.
“맞아, 아까 그 몬스터들은 뭐예요?”
“아, 스노우 비스트라는 몬스터야. 사나흘에 한 번꼴로 나타나는데, 운이 없었네.”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저놈들이 왜 학교에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데샨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삑! 삑! 어디선가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뭐야?”
로난은 소리가 아데샨의 손목에서 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정확히는 손목에 채워진 가느다란 팔찌에서. 아데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다, 깜빡하고 있었네···!”
“무슨 일이예요?”
“학생회 알림이야. 스노우 비스트 제압이 끝나면 회의를 해야 하거든.”
“학생회?”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제법 중요한 자리 같았다. 그가 아데샨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다녀와요.”
“그, 그래도 될까? 너는···학교 지리는 다 기억하고 있어?”
“제가 치매에 걸린 것도 아니고. 누나 집에 있을게요.”
“응, 고마워. 끝나는대로 갈게···!”
몸을 돌린 아데샨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보법이라도 익힌 건지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로난이 바닥에 내려놨던 궤짝을 집어들었다. 아데샨의 얼굴을 떠올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되게 예뻐졌네.”
누나 외의 사람에게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전생과 다른 것은 피폐한 눈그늘밖에 없었는데, 이만한 차이가 날 줄이야.
아직도 가슴께에서 겨울꽃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로난은 교정을 떠나 이릴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눈은 쉬지 않고 쏟아졌다. 역시 평범한 겨울은 아닌 듯했다. 의외로 멀끔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화염 정령과 마공학 기사들이 상시로 제설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돈이 좋긴 좋군. 징벌병 시절에는 내가 다 치웠는데.’
똑똑.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한 로난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식사 시간인지 맛있는 냄새가 문틈새로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안쪽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네~ 나가요!”
끼이익- 머지않아 열린 문 너머로 익숙한 아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푸른 백은발이 한결 풍성해져 있었다. 이릴의 눈이 커졌다.
“로, 로난?”
“누나.”
“너, 너어어···너···!”
간만에 본 누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릴은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뜻 모를 소리를 반복했다. 머지않아 눈물을 왈칵 터트린 그녀가 로난에게 달려들었다.
“와아아앙! 돌아왔구나!”
몸이 커져서 그런지 품에 쏙 들어왔다. 울음소리가 요란한 걸로 봐서 아데샨의 말마따나 건강해 보였다. 누이를 토닥여 주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으응. 나는 정말 잘···흐아아앙!”
뭐라 말하려던 이릴이 재차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십 분 정도 추가로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야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후···누나가 되서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였네. 이제 괜찮아!”
“다행이야. 시타는?”
“앗, 잠깐 로난 친구들이 데려갔어. 아마 금방 올 거야.”
이릴은 시타가 근래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 설명했다. 특급 모험 동아리도 자신이 없는 동안 뭔가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까치발을 들어 동생의 얼굴을 붙잡은 이릴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서 밥은 먹었어? 왜 이렇게 마른 것 같지?”
“밥···?”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2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셈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뱃속에서 굉장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먹었어.”
“히히, 금방 차려 줄게. 잠깐 뒤뜰에 다녀올 테니까 부엌에서 기다려!”
눈웃음친 이릴이 뒷문을 열고 나섰다. 주방으로 진입한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놈팡이가 식탁에 앉아 스튜를 퍼먹고 있었다. 암청색 머리카락과 목에 두른 냅킨의 조화가 병신 같았다.
“···너, 있었냐?”
“오랜만이군 로난. 2년 만인가.”
슐리펜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제 헤어졌다 만났다고 해도 믿어질 태도였다. 로난은 할 말도 잊은 채 그를 응시했다. 탁. 숟가락을 내린 제국의 샛별이 입을 열었다.
“다 먹는 대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시겠지.”
“의심하는 눈빛이군. 이릴 양의 반응으로 봐서 네가 돌아온 것을 눈치챘다. 너희 남매의 재회를 방해하지 않은 것이 죄인가?”
“누가 뭐래냐.”
로난이 식탁에 앉았다. 맛있는 냄새는 슐리펜의 그릇에서 풍겨 오고 있었다. 고기와 야채가 듬뿍 섞인 스튜를 본 로난이 입맛을 다셨다.
“캬···맛있겠다. 누나도 발전했네. 다른 재료도 저렇게 많이 넣고.”
“이릴 양의 요리는 언제나 훌륭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슐리펜이 자신의 그릇을 몸쪽으로 당겼다. 마치 먹이를 뺏길까 경계하는 동물 같았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안 뺏어먹어. 등신아.”
“터무니없는 억측이군. 신체가 다부져졌기에 관찰했을 뿐이다.”
슐리펜이 스튜를 마저 퍼먹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서 안도하는 기색을 읽어낸 로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외모는 달라졌을지언정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새끼는 언제쯤 얼굴값을 하려나.’
성장한 슐리펜은 아니꼬울 정도의 미청년이 되어 있었다. 어째 전생에 봤을 때보다 잘생겨진 것 같았다. 마침내 그릇을 비운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2년을 투자한 가치가 있는 것 같군. 풍기는 기운 자체가 달라졌어.”
“너도 만만치는 않아.”
로난이 입꼬리를 올렸다.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천재는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각성 초입 단계는 진작에 넘었겠군. 괴물 자식.’
맥동하는 코어가 육안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정식 대련으로 이 자식을 꺾을 수 있는 검사가 몇 명이나 될지 의문이었다. 당장에라도 검을 맞대 보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쭉 여기서 지낸 거냐? 누나를 지키려고?”
“어찌 그러겠나. 때마침 옆집이 비어 있길래 사들였다. 아데샨 양과 동아리 부원들이 돌아가면서 경계를 섰지.”
“기가 막히는군.”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경호를 위해 집을 사다니. 대귀족의 자제라 그런지 규모 자체가 달랐다. 잠시 책상을 두드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 약속을 지켜 줘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슐리펜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덤덤한 어조에서는 일말의 유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벌컥! 그때 뒷문이 열리며 이릴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바구니에는 계란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짜잔, 나 왔어! 금방 해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슐리펜 씨도 드실 거죠?”
“···해 준다면 감사히 먹겠소.”
“히히, 알았어요~”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방금 비운 그릇도 결코 작지는 않았는데, 참 한결같은 놈이었다. 이릴이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로난.”
“음?”
끼익- 갑자기 몸을 일으킨 슐리펜이 로난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알아들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는 로난이 한 뼘 정도가 더 컸다. 그는 슐리펜을 따라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슐리펜은 2층의 발코니 앞에 도달해서야 멈춰섰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냐?”
“이릴 양이 듣기에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라서 말이지.”
슐리펜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리멍텅한 하늘 아래로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잘 지어진 집이라 냉기는 스며들지 않았지만 보는 것만으로 바깥이 얼마나 추운지 알 수 있었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입술을 뗐다.
“지금 제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나?”
“무슨 일···?”
“당황하지 말고 들어라. 지금은 금매화 여우의 달이다 로난.”
“···뭐?”
로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슐리펜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우스운 일이지. 벚꽃이 만연해야 할 시기에 가죽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야 한다니.”
로난은 대답하지 못했다. 금매화 여우의 달이라면 그가 막 필레온에 입학했던 시기였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꽃에 취해 흑철검을 휘두르던.
“···필레온 한복판에서 몬스터들이 나오던 것과도 관계가 있는 거냐?”
“마주쳤나 보군. 비단 필레온 뿐만이 아니라 제도 전역이 골머리를 앓고 있지. 눈이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는 놈들이니까.”
“씨발.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질문을 하면서도 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틀림없이 이것과 비슷한 일을 전생에 겪은 적이 있었다.
“이 겨울은 일 년째 지속되고 있다. 오직 제도에만 찾아온 겨울이지.”
“일 년?”
“그래···모든 일은 한 명의 학생으로부터 시작됐다.”
덜컹덜컹. 불어오는 삭풍에 창문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겨울의 마녀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