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33)
133. 때 아닌 겨울(3)
#133
“겨울의 마녀에 대해 알고 있나?”
“···뭐?”
로난의 눈이 커졌다. 겨울의 마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릿속을 떠다니던 기억의 편린들이 단번에 합쳐졌다. 때 아닌 눈보라와 스노우 비스트. 얼어붙은 세계.
나올락말락 하던 재채기가 펑 터져 나온 느낌이었다. 슐리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알 리가 없겠군. 당장 지난해에 벌어진 일이니.”
충격을 받은 로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래도 2년 동안 퍼질러 자다 일어나서 맛이 갔던 것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 사건을 잊어버리다니. 로난은 이미 마녀가 일으킨 겨울을 한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혹시 겨울의 마녀라는게 이벨린인지 이블린인지 하는 여자냐?”
“이벨린 드로자다. 뭐야, 알고 있었나?”
로난이 입술을 뒤틀었다. 동일인물이긴 했으나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어 있었다. 지금은 겨울의 마녀가 나타나야 할 시기가 아니었다.
‘너무 빨라.’
전생에서 겨울의 마녀는 로난이 징벌병으로 한창 구르던 시절에 나타났다. 최소한 몇 년은 더 지난 뒤에 등장해야 정상이었다.
이 시기만은 틀렸을 리가 없었다. 회귀한 이후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중요한 문제였으니.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이벨린이 필레온에 입학한 지 세 달 만에 일이 터졌지.”
“빌어먹을, 작년에 입학했다고?”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작년에 입학했다면 아무리 나이를 많이 잡아도 어린 소녀에 불과할 터였다. 역시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났다.
“그래. 마법과 신입생 수석이었다. 입학식 대련에서 아칼루시아 영애를 꺾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어 보였는데···.”
슐리펜이 혀를 찼다. 그 에르제베트가 패배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로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상대는 겨울의 마녀였으니까. 그녀는 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최악의 범죄자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이벨린은 어느 날 갑자기 폭주했다. 마법과의 건물 세 개를 얼음 속에 가둬 버리고 도주했지. 저주받을 눈은 그날 밤부터 내리기 시작해서 그치지 않았다.”
슐리펜은 그녀가 제도에 겨울을 불러온 이후 은거했다고 설명했다. 필레온에 재학 중일 때 저질렀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행적은 나름대로 전생과 비슷했다.
“개 같은 년.”
불현듯 전생의 겨울 마녀를 떠올린 로난이 치를 떨었다. 엿먹은 기간은 짧을지언정 사태의 심각성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의 시민들에게는 제도를 떠날 자유라도 주어져 있으니.
‘말 그대로 재앙이었지.’
당시의 시민들은 제도에 꼼짝없이 갇혀서 아사나 동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악랄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마녀의 범죄 행각 탓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힘을 가장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
범죄의 동기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갑자기 미쳐버린 마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로마이라를 비롯한 제국의 주요 교역로를 모조리 얼음 속에 파묻어 버리는 것이었다.
제국은 즉각 조치를 취했다. 제국군을 동원하고, 여명 마탑에서 내로라하는 화염 마법사들을 초빙했다.
허나 마녀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얼음을 녹이거나 부술 수 없거니와 파괴한다 하더라도 다시 생성되었다. 그녀는 로마이라 산맥을 자신의 요새로 바꾸어 농성에 들어갔다.
발이 묶인 사람들은 눈 속에서 얼어 죽었다. 난폭한 스노우 비스트와 서리 정령들이 눈보라 속에서 날뛰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늘 풍족하던 제도에 굶주림이 찾아왔다. 겨울 마녀의 농성은 석 달이 넘도록 이어졌다.
‘확실히 그때보다는 사정이 낫긴 한데···.’
당시의 마녀는 슐리펜의 손에 죽었다. 수많은 시도 끝에 젊은 검성은 그녀의 가슴에 바람의 칼날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산맥의 결전은 거인들이 내려오는 그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심장이 관통당한 마녀는 얼음이 되어 산산이 폭발했다. 로난은 거대한 만년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턱을 매만지던 그가 침음을 흘렸다.
‘역사가 바뀌었다. 어째서지?’
이유는 몰라도 이변이 벌어진 건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큰 이변이. 간신히 기억을 떨쳐낸 로난이 입을 열었다.
“지금 마녀는 어디 있어?”
“너도 익히 아는 곳이다. 비명의 요새 로돌란.”
“뭐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장소였다. 해상 감옥 로돌란에 마녀가 있다는 건 이미 그녀를 체포했다는 소리였다.
“마녀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 자체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제로 슐리펜은 눈이 내리기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은거했던 마녀를 붙잡았다 설명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이 지랄이 나 있어?”
“잡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지. 무슨 수를 써도 그 껍질을 뚫을 수 없었다.”
“껍질이라.”
“그래···그것 때문에 온 대륙의 마법사와 학자들이 제도에 모여 있다.”
슐리펜의 설명이 이어졌다. 깊은 동굴 속에서 겨울의 마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의 몸은 두터운 얼음 덩어리 속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많은 강자들이 동원되었다. 여명 마탑주 아운 필라나 황실 기사단의 단장 개러드 경, 심지어는 검성 자이파까지 찾아왔지만 끝내 얼음을 파괴하지 못했지.”
“두꺼운 얼음 덩어리···?”
문득 어떠한 표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해주를 마치고 깨어났을 당시 자신을 감싸고 있던 수정과 비슷한 인상이 느껴졌다. 절대로 부서질 것 같지 않던 수정은 손을 가져다 대기 무섭게 무너져 내렸다.
‘내 건 얼음은 아니었지만, 혹시···.’
정말 근거 없는 추리였지만 뭔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돌란이라. 그리 읊조린 로난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털옷으로 몸을 꽁꽁 싸맨 학생들이 교정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랄이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확실히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봄은 따사로운 햇살과 꽃향기에 취해 꾸벅꾸벅 졸아야 하는 계절이었다. 멍청한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추위에 떠는 시기는 겨울로 충분했다.
“알려줘서 고맙다. 별 좆같은 일이 다 있네.”
“그래도 조만간 해결될 것 같다. 나바르도제가 황제와의 거래에 응했다고 했으니. 아마 그녀의 일족 중 한 명이 얼음을 녹이러 오겠지.”
나바르도제의 일족이라면 레드 드래곤이었다. 하긴 지상에서 가장 뜨거운 불마저도 얼음을 녹이지 못한다면 정말 답이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시간이 나면 로돌란에 방문해 봐라. 너는 남들이 못 자르는 걸 자르는 재주가 있으니 혹시 그 얼음도 부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슐리펜은 그것으로 말을 마쳤다. 덜컹덜컹. 하얀 삭풍이 아직도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로난이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던 차였다. 쿵쿵! 별안간 아래층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슐리펜과 눈이 마주친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선배 왔나 보다. 내가 불렀거든.”
아래층으로 달려나간 로난이 문을 열었다. 헌데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데샨이 아니었다. 익숙한 면면들을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희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불처럼 새빨간 아셀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다음으로는 한결 팽창한 마르야의 가슴과 브라움의 지저분한 턱수염이, 마지막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변화가 없는 오필리아의 얼굴이 순서대로 눈에 들어왔다.
“로, 로난···! 정말로 돌아왔어···!”
“아셀.”
아셀이 울먹이며 말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키가 거의 자라지 않았다. 너무 자라서 뒤로 묶은 머리를 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속눈썹이 거의 아데샨만큼 짙은 것이 어째 더 계집애처럼 변한 것 같았다. 그의 뒤편에 서있던 마르야가 천천히 다가왔다.
“하, 진짜네. 뭐 이렇게 커졌어?”
마르야가 헛웃음쳤다. 사자를 연상케 하던 풍성한 금발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로 변해 있었다. 두꺼운 털옷 위로도 다부져진 몸을 알아볼 수 있었다.
로난의 주위를 돌며 키를 재보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늘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메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이야···.”
로난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 마디만으로 얼마나 자신을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손을 뻗은 로난이 아셀과 마르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브라움과 오필리아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으하하하! 전사가 다 되었군 로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갇혀 있던 사람이 맞나?”
“어른스러워 졌네···.”
브라움의 눈시울 또한 붉어져 있었다. 오필리아의 새하얀 얼굴에는 그 보기 힘들다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후웅! 그때 문 틈새로 무언가 시커먼 것이 날아들었다. 로난이 픽 웃었다.
“시타.”
“뺘앗!”
네 장의 날개를 펼친 시타가 로난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푹신한 깃털이 코를 간질였다. 문득 이변을 느낀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너 인마, 왜 이렇게 커졌어? 누나가 너무 잘 먹였나?”
“뺘아~”
“젠장, 사람도 잡아먹겠네.”
시타의 덩치는 거의 대형견만하게 커져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날개의 폭이 거진 3m는 될 것 같았다. 무게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로난은 시타가 만족할 때까지 얼굴을 부비도록 내버려 두었다. 주방 쪽에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이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은 부원들을 한 명씩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 수백 마디가 목구멍을 맴돌고 있었다. 마침내 하나를 추려낸 로난이 입을 열었다.
“잘들 지냈냐.”
****
로난은 스튜 오 인분을 해치운 뒤 집을 나섰다. 2년을 굶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이의 요리는 혓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내렸다.
그는 부원들과 함께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밀려오는 저녁놀이 눈을 물들이고 있었다. 한결 잦아든 눈보라 덕에 대화하기가 수월했다.
“젠장, 아데샨 선배가 학생회장이라고?”
“응. 작년에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어. 원래는 우리 동아리에도 자주 왔는데, 그 뒤로는 얼굴 보기가 힘들어.”
로난이 헛웃음 쳤다. 아까도 학생회가 어쩌고 하기는 했었는데 설마 본인이 회장일 줄은 몰랐다. 마르야가 말을 이었다.
“내가 회계 업무를 겸직하고 있어서 아는데, 정말 일을 잘 해. 그렇게 꼼꼼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게 신기할 뿐이야.”
아데샨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학생회장으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나비로제의 수업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마르야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안타깝지. 겨울의 마녀만 아니었어도 능력을 훨씬 더 펼칠 수 있었을 텐데···.”
그녀의 말대로였다. 제도에 겨울이 불어닥친 이후 필레온 아카데미는 전례없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신입생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걷던 로난은 대광장에서 그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아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럼 이따 봐 로난. 위치 기억하고 있지···?”
“당연하지 인마. 누구를 원숭이로 아나.”
그는 당장 급한 용무를 마친 뒤 새로운 동아리 건물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르야가 키득거렸다.
“보면 깜짝 놀랄 걸. 갈아입을 속옷 정도는 준비하고 오는 게 좋아.”
“2년간 허풍이 느셨군. 나중에 봤는데 별거 아니기만 해봐.”
크라티르가 얼마나 대단한 걸 지어 줬길래 저렇게 요란을 떠는지가 의문이었다. 부원들과 갈라진 그는 무예과의 본관인 갈레리온 관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보는 잿빛 성채는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잘 됐네···인사도 할겸.”
로난이 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는 나비로제를 찾아가고 있었다.
로돌란에 방문할 자문을 구하는 겸사겸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방학에 안부를 안 물은 걸로도 서운해하던 사람인데, 이번에도 대충 넘어가면 정말 귀를 잡아 뽑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갈레리온 관은 텅텅 비어 있었다. 걸음을 옮긴지 머지않아 익숙한 문짝이 나타났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쌍여닫이문에는 제1투기장이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쿠구구··· 바위가 구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의외로 불은 켜져 있었다.
투기장의 중앙에 앉아 명상하고 있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구릿빛 피부에 암녹색 제복. 로난의 은사인 나비로제였다.
“나비로제 교관님.”
대태도 우루사가 그녀의 옆에 누워 있었다. 로난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허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난이 코앞까지 다가가도 나비로제는 명상에 집중해 있을 뿐이었다.
‘뭐지?’
헌데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입술을 연신 짓씹어 대는 것이 명상의 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마침내 눈을 뜬 그녀가 헛숨을 들이켰다.
“허어억···!”
악몽이라도 꾸고 깨어난 사람 같았다. 으득.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던 나비로제가 이를 악물었다. 마치 무언가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는 것처럼. 옆에서 대기하던 로난이 수통을 내밀었다.
“젠장, 괜찮아요?”
“······로난?”
그제야 나비로제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마주친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2년 전과는 인상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억센 기운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특유의 여유로움이 사라져 있었다.
문득 나비로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아데샨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수통을 받아든 나비로제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언제 돌아온 건가.”
“오늘요. 교관님, 안색이 안 좋아요.”
“기분 탓이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군.”
나비로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로난을 위아래로 훑던 그녀가 눈썹을 치켜떴다.
“···강해졌군.”
로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비로제는 순식간에 수통을 비운 뒤 던져 버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가 대태도를 집어 들었다.
“···로난. 검을 뽑아라.”
“네?”
느닷없는 요구사항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소리가 진지한 것이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소매로 입가를 닦은 나비로제가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나와 한번 겨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