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36)
136. 봄이여 오라(1)
#136
“로돌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섬뜩한 웃음을 지어 보인 카라카가 요새로 들어섰다.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일행이 그를 따라 진입했다.
쿵. 문을 닫는 순간 바닷바람에 섞여 있던 온기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김이 바스라졌다. 살을 에는 한기에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이걸 입으시면 한결 나으실 겁니다.”
문 옆의 캐비닛에는 간수와 심문관들이 입는 외투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캐비닛을 뒤지던 카라카가 아셀을 돌아보며 말했다.
“흐음, 아가씨 체격에 맞는 옷이 있으려나 모르겠군요.”
“아, 아, 아가씨 아니에요오···!”
아셀이 이빨을 딱딱 부딫히며 항변했다. 다행히도 맞는 옷을 찾을 수 있었다. 털모자에 장갑까지 착용한 네 사람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안쪽에는 사람이 없네요.”
“출입도 통제되거니와 버틸 수가 없으니까요. 평균적으로 마녀를 마주한 시간의 세 배 정도를 몸을 녹이는데 소모하더군요. 따로 방비책을 준비해 오셨다면 조금 나은데, 그런 건 없어 딱히 없어 뵈는군요.”
“그렇군요···젠장, 그런데 이건 너무 두꺼운 거 아녜요?”
계단을 내려가던 로난이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어찌나 옷이 두꺼운지 발밑을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장담컨데 조금 있으면 그마저도 너무 얇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세요.”
카라카가 확신에 찬 투로 말했다. 겨울의 마녀가 대단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는 마녀가 로돌란에 송치된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했다.
“죄수들이 얼어죽지 않도록 신경쓰는 것은 좀 귀찮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습니다. 새로운 고문···아니, 심문법이 많이 생겼거든요.”
“어떤 건데요?”
“간단합니다. 그냥 옷을 싹 벗겨서 마녀 근처의 감옥에 던져 넣는 거죠. 몇 번만 반복하면 아무리 굳건한 죄수라도 몸과 마음이 무너져 버립니다.”
카라카는 얼어붙은 손발가락을 가위로 자를 때의 감촉을 상세하게 묘사해 주었다. 혀가 바닥에 붙어 잘라야 했던 죄수의 이야기도.
“우리는 그걸 ‘동파됐다.’라고 부르죠. 하하, 재밌지 않습니까?”
카라카가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거렸다. 따라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로난만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할 뿐이었다.
“위쪽은 따뜻하게 해 주고 바지만 벗겨서 던지는 건 어때요. 다리가 부서져도 대답은 들을 수 있으니.”
“호오···심문관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군요. 혹시 예전에도 제가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에르제베트와 아셀은 두 사람을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그들은 죄수들의 비명을 들으며 로돌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층계를 내려갈수록 기온이 급격하게 낮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사람들이 그들과 교차하며 지나갔다.
“제, 젠장···! 빨리 가!”
“저걸 부수는 건 불가능해···저주, 저주받은 마녀야···!”
카라카의 말마따나 몸을 녹이기 위해 빠져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발소리가 쉴새없이 울려 퍼졌다. 그들은 삼십 분 정도를 걸은 끝에 어느 거대한 대문 앞에 멈춰섰다.
“이제 다 왔습니다. 이 앞이 로돌란에서 가장 깊은 곳, 심연 주데카입니다.”
암초의 뿌리까지 내려온 것 같았다. 바깥이 해저라서 그런지 귀가 먹먹했다. 온통 시커먼 문은 형체 없는 유령들의 출입조차 막을 것 같았다.
“이 문을 만들기 위해서 로돌란의 삼 년치 예산이 사용되었지요. 저기 구석을 보시면 제국의 치안을 위해 땀을 흘려준 장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엽적인 정보를 늘어놓은 카라카가 문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쿠르르릉···! 천둥이 구토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어졌다. 생전 경험해본 적 없는 한기가 네 사람을 덮쳤다.
“흐야악!”
“이, 이 정도는···.”
아셀이 비명을 질렀다. 나름대로 평정을 유지하던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털모자를 더 세게 눌러 쓴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빌어먹을···!”
“흐, 흐흐. 엄청나지 않습니까? 덕분에 주데카에 수감하던 흉악범들은 모두 위쪽으로 옮겨야 했죠.”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카라카의 말마따나 외투는 의미가 없어졌다. 칼로 변한 냉기가 피부를 찢고 내장을 헤집는 것 같았다.
전생에 마녀를 잡을 때 느꼈던 것과 흡사한 수준의 추위였다. 일행은 기나긴 복도를 따라 앞으로 전진했다. 저 앞쪽에서 푸른 빛무리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그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일행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여기가···.”
생각보다 넓지는 않았다. 열댓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씩 모여 두런거리고 있었다.
대다수는 여기에 오는 것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살인적인 한기를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 저마다의 방비책을 준비해온 것이 인상적이었다.
“제기랄,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나도 뭐 좀 챙겨 오는 건데···.”
열을 내는 마도구를 쥐고 있는 여자도 있었고, 처음 보는 짐승의 가죽을 몸에 두른 노인도 있었다. 그들은 옷을 두껍게 껴입기만 했을 뿐인 로난 일행을 신기한 동물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검지를 뻗은 카라카가 사람들의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문제의 아가씨입니다.”
거대한 얼음 기둥이 주테카 한복판에 세워져 있었다. 푸르스름한 광채는 얼음의 표면에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색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투명하여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도끼눈을 뜬 에르제베트가 목의 흉터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벨린···.”
겨울의 마녀, 이벨린 드로자는 그 안에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조금 마른 편의 평범한 소녀였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공중에 흐느적거리던 상태 그대로 굳어버린 머리카락은 백색을 띠었다. 이릴의 아름다운 백발과는 거리가 먼, 죽은 산호처럼 섬뜩한 흰색이었다.
“빌어먹을···더럽게 춥군, 서둘러 끝내지!”
그때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와 그의 종자로 보이는 사내가 걸어 나왔다. 곰처럼 거대한 기사의 손에는 가로등이라 해도 믿을 만큼 우악스러운 전투망치가 쥐어져 있었다. 그가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나는 흐마투 왕국의 기사 분타 남작이다! 사악한 마녀의 껍질을 깸으로서 도탄에 빠진 제국을 구하겠다!”
엄포하듯 거창한 함성이었다. 옆에 있던 종자가 주먹을 움켜주며 외쳤다.
“할 수 있습니다, 분타 님! 제국을 구한 영웅이 되는 겁니다!”
“당연하지, 흐아아압!”
분타라 불린 기사가 양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거대한 호를 그리며 떨어진 망치가 얼음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굉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망치 머리가 폭발했다. 얼굴이 용암처럼 달아오른 분타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졌다.
“끄아아악! 손, 내 손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갑이 산산이 부서졌다. 막대만 남은 망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녀를 감싼 얼음에는 작은 흠집조차 나 있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던 분타가 비명을 터트렸다.
“흐어억! 소, 손이 바닥에 붙었다···!”
“조, 조금만 참으십쇼! 제가 떼어드리겠습니다!”
종자가 황급히 달려왔으나 손은 끝내 떼어지지 않았다. 분타는 결국 손바닥 가죽 일부를 로돌란에 헌납하고 나서야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피가 얼어붙어 장갑을 낀 것처럼 변한 손을 감추며 도망치듯 주테카를 빠져나갔다.
“흐마투인지 뭔지 하는 나라도 안됐군. 저런 놈이 남작이라니.”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실소했다. 바닥에 저런 손자국이 심심찮게 남아 있는 걸 보니 분타 같은 멍청이가 처음은 아닌 듯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라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은 저런 얼간이들이 대부분이지요.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저도 그냥 가서 쳐 보면 되나요?”
“순서를 기다리는 게 먼저지요.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껍질을 깨기 위해 오신 거니까요.”
카라카는 사람들을 죽 둘러보며 말했다. 과연 분타의 흐느낌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또 한 명이 나와 얼음 앞에 섰다.
중년의 여인은 만월 마탑의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월 마탑 소속 메이지 우슬로입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름과 소속을 밝히는 것이 관례인 듯했다. 여인의 입에서 나지막한 영창이 흘러 나왔다. 우우웅···! 거대한 마법진 아홉 개가 마녀를 둘러싸듯 생성되더니 거대한 바위 기둥 아홉 개가 솟구치듯 쏘아졌다.
콰아아앙! 분타의 망치보다 아홉 배 정도 큰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드러난 얼음 기둥은 여전히 건재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그녀가 등을 돌렸다.
“실례했습니다.”
“차라리 저 편이 낫네요.”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분타와 우슬로 이후로도 시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얼음을 깨기 위해 노력했고, 모두 실패했다.
도전자들 중에는 마법사가 특히 많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 중에는 문외한인 로난이 보기에도 괜찮은 것이 더럿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셀과 에르제베트는 눈을 빛내며 마법을 감상했다.
“마나 회로를 저런 식으로 그린다니···! 역시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오는군요.”
“으, 응. 다른 곳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슨 소리인지는 못 알아 듣겠지만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역시 데려오길 잘했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차였다. 로난은 새로운 사람이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 내 차례군.”
“로, 로난···! 힘내!”
“할 수 있어요.”
아셀이 양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에르제베트 또한 담백한 격려를 보냈다. 성큼성큼 걸어간 로난이 얼음 기둥 앞에 섰다. 마녀는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역시.’
얼음을 목도한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막연했던 추리는 어느 정도 일치했다. 마녀를 감싼 껍질은 자신의 몸을 뒤덮고 있던 수정과 흡사한 느낌을 풍겼다.
‘···조금 달라.’
헌데 완전히 같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었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사뭇 느낌이 달랐다.
방패와 감옥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로난의 수정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면, 이건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살짝 손가락을 대어 봤지만 얼음이 녹거나 금이 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선택지가 없군.’
이제는 부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스르릉! 붉게 물든 라만차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필레온에서 온 로난입니다.”
그는 마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자세를 잡은 로난이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앙! 뒤늦은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깜짝이야!”
“뭐, 뭐야. 언제 휘두른 거야?”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현장에 있던 누구도 그의 검격을 보지 못했다. 뼈가 울부짖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단단하군.”
얼음은 건재했다. 칼날의 3할 정도가 안쪽으로 파고들어 있기는 했지만 그가 목표하던 ‘완전한 파괴’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황하던 사람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잠깐만, 저거 지금 얼음 안쪽으로 칼날이 들어가 있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잘못 본 거겠지.”
그들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는지 하나같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난에게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조금씩이라도 깎여나간다면 언젠가는 부숴지겠지.’
거대한 바위도 결국 빗방울에 깎여 나간다. 그가 재시도를 위해 칼을 거두는 찰나였다. 무언가 이상한 것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음?’
로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얼음을 살폈다. 푸른빛이 도는 표면에 예리한 상흔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정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는 희미한 흔적이었다.
‘이 모양···어디선가 봤는데.’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구잡이로 그어진 것 같으면서도 균형미가 있었다. 우연히 생겼다기에는 부자연스러웠다.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코어를 전환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는 순전히 직감으로 행해진 행동이었다. 로난은 손을 들어 기둥을 짚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마나를 얼음의 표면 위로 흘려보냈다. 스아아···점멸하는 마나는 도랑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상흔을 채우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이봐, 볼장 다 봤으면 얼른 비켜. 그 드래곤이 오기 전에 부숴야 한다고.”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마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흔을 따라 퍼져 나가던 마나가 확장을 멈췄다.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이건···!”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얼음을 얕게 파고든 흠집은 낯익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웃기는 소리. 나의 종복과 너희 벌레들의 목숨이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 적어도 내게는 그렇소.
해주할 당시 보았던 장면들이 빠른 속도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로난은 아직 그의 시야로 바라보던 세상을 기억하고 있었다. 홀린 듯이 손을 뻗은 로난이 빛나는 상흔을 매만졌다.
‘도대체···의도가 뭐야?’
몇 번 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하늘을 박차고 용을 베던 네뷸라 클라지에의 시조, 구원자가 사용하던 검술의 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