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48)
149. 알현(1)
#149
하얀 산안개가 능선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아침 공기가 습했다. 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봄비가 우의를 두들기고 있었다.
하늘은 필레온을 떠나기 전보다 한결 밝아져 있었다. 젖은 흙 위로 피어오르는 안개에는 혈향이 진득하게 스며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미세하게나마 잔류해 있던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잠시 몇 시간 전의 기억이 물 위로 떠올랐다. 로난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슐리펜과의 결전을 위해 숙면을 취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기숙사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로난. 일어나라.
– ···교관님?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나비로제가 문간에 서 있었다. 비몽사몽한 시야로 바라본 그녀는 전투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잠을 깨운 행위나 무단 침입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거기서 로난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고개를 휘저어서 빠르게 잠을 떨쳐낸 그가 입을 열었다.
– 무슨 일이에요?
– 여명 부대가 궤멸당했다는 첩보가 있었다. 네가 관심을 가질 것 같아서 알려 주려고 왔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여명 부대라면 네뷸라 클라지에를 전담하는 제국군의 특수 조직 중 하나였다. 자이파가 이끄는 수인 부대 또한 그 일부였다.
– 잠깐만요.
일 분만에 채비를 마친 로난이 방을 나섰다. 다행히도 현장은 제도와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했다. 으스스한 부슬비가 아직 어두운 교정을 적시고 있었다. 우의를 걸친 두 사람이 말에 올라탔다···.
.
“끔찍하군.”
“아.”
옆에서 현장을 살피던 나비로제가 혀를 찼다. 로난의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가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요.”
로난은 가급적 입으로만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코로 숨을 들이쉬는 순간 피 냄새 때문에 현기증이 닥쳐올 것 같았다.
사방이 시체였다. 아직 색이 덜 빠진 고깃덩이들이 검붉은 피를 울걱울걱 토해내고 있었다. 족히 아흔 구는 넘어 보이는 주검이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백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두꺼운 장갑을 낀 제국군들이 시체를 들것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희생자들은 모두 여명 부대 소속이었다. 인간이 7할 정도를, 덩치가 배는 되는 수인들이 나머지 3할을 이루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시체들의 상태가 나름대로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토막 나거나 뜯어먹힌 것은 없다시피 했다. 덕분에 신원 파악에는 문제가 없을 듯했다.
‘빌어먹을.’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이따위 사실에 안도해야 하는 현실이 더없이 좆같았다. 그가 한숨을 내쉬듯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네가 힘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뺘우우웅···.”
로난의 머리 위에 웅크리고 있던 시타가 고개를 떨구었다. 혹시나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데려왔는데 괜한 짓이었다. 현장에 없던 자들만이 생존자였다.
우선 경위를 파악해야 했다. 나비로제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사내에게 손짓했다.
“거기, 잠깐 나 좀 보지.”
“음?”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교용 레인 코트를 걸치고 있는 걸 보니 제법 계급이 높아 보였다. 나비로제를 알아본 그가 헛숨을 들이켰다.
“···헉!”
레인 코트를 걸친 사내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견장에 새겨진 문양을 보니 중령이었다. 나비로제와 마주 보고 선 그가 경례를 보냈다.
“오, 오셨습니까 나비로제 님. 연락을 해 주셨으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됐다. 그보다 상황 설명을 듣고 싶은데.”
“네, 넵···!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헌데 저희도 이미 다 끝나 있는 것을 발견한 거라 그렇게 많은 정보는···.”
소령은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긴장한 모양이었다. 새삼 나비로제의 입지가 느껴졌다.
“정확히 두 시간 전에 정찰을 하던 병사들이 발견했습니다. 야간 작전이나 회의 때문에 집결해 있던 도중 기습을 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럴싸하군. 자이파 터르겅의 부대원이 일부 섞여 있는 것 같은데, 그 고양이는 어디 갔지? 설마 당한 건가?”
“고, 고양이라니···검성께서는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별도로 활동 중이셨습니다. 조금 전에 범인을 찾겠다는 연락을 남기고 현장을 이탈했습니다.”
검성이라는 말을 들은 나비로제가 눈가를 찌푸렸다. 당황한 중령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다지 군생활을 잘하는 유형은 아닌 듯했다.
로난이 머리를 덮던 우의를 벗었다. 차가운 빗물로 세수를 하자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가 나비로제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나름대로 찾아보고 있을게요.”
“그래라.”
“시타, 너도 생존자가 없는지 공중에서 한번 찾아봐 줘.”
“뺘앗!”
시타가 네 장의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일단 단서를 찾아야 했다. 로난이 천천히 발을 뗐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푼 흙이 짓눌리며 핏물이 흘러나왔다.
‘이제 막 나가기로 한 건가? 갑자기 이딴 일이 왜 벌어진 거지?’
반짝이는 마나가 현장 곳곳에 남아 있는 걸로 봐서 네뷸라 클라지에의 소행임은 분명해 보였다. 다만 갑자기 왜 이런 파격적인 행보를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스무 걸음 정도를 걸었을까. 익숙한 얼굴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저 곰은···.’
성인 남성을 상하좌우로 2배씩 늘린 것 같은 덩치가 인상적이었다. 자이파와 조우했던 당시 아셀을 데려왔던 웨어베어였다. 상냥하게 아셀을 달래던 모습이 아직도 귀에 선했다.
‘자이파의 부대도 휘말렸다는게 사실이었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수인 동포를 끔찍하게 여기는 그 호랑이가 얼마나 격분해 있을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문득 그의 시선이 웨어베어의 목에 닿았다.
기다란 자상이 목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목뼈까지 단번에 베인 걸 보면 아마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절명했을 터였다. 이상한 기시감을 느낀 로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정한 검흔이었다. 생업으로 소를 죽이는 백정도 이것보다는 감정적으로 소의 목을 내리칠 것 같았다. 어디에 사는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몰라도 태어나서 한 번도 웃거나 울어본 적이 없는 놈이 분명했다.
‘젠장, 뭐 하는 놈이야?’
로난은 서둘러 다른 시체들도 살피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시체에는 하나의 상처만이 남아 있었다.
마흔 세 번째 시체를 살피던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검흔은 극도로 비슷한 느낌을 풍겼다. 전부 같은 사람이 휘둘렀다 해도 믿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한 명이 다 죽였다고? 아냐···미묘하게 달라.’
그래도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아주아주 미세한 차이가 났다. 그래봤자 두세명이라 한명과 별 다를 바 없이 충격적이었지만.
허나 더욱 충격적인 점은 따로 있었다. 검흔들의 기본적인 형태가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털이 각막을 찌를 때까지 얼굴을 가져다댄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기시감의 정체를 파악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
틀림없었다. 구원자의 검술을 기반으로 한 검로였다. 하지만 구원자나 로브쟁이의 검흔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더 간결하고 감정이 없다고 해야 할까. 차라리 나비로제의 검술과 비슷한 인상이 느껴졌다.
‘무언가···벌어지고 있는 건 분명하군.’
로난은 추가적인 단서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허나 반짝이는 마나를 제외하고 흔적이라 부를 만한 것은 일절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수색을 마친 그는 병사들과 함께 시체를 날랐다.
“얼굴이 익숙한데···호, 혹시 겨울을 끝낸 로난 님 아닙니까?”
“맞아요. 저기 머리 좀 주워 줄래요?”
“마,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머리 좀 주워 달라니까요.”
쏴아아···산아래에서 불어온 바람이 젖은 숲을 휩쓸었다. 시체 수습은 정오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봄비는 어느덧 그쳐 있었다. 로난이 담뱃대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결국 아무것도 못 찾았네요.”
“담배 꺼라.”
“한 번만 봐 줘요. 이딴 꼴을 보고 어떻게 참아요?”
로난은 처음으로 나비로제에게 반항했다. 그녀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지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핏자국을 바라보던 나비로제가 로난의 담뱃대를 채가서 입에 물었다.
“엇, 교관님?”
“하아아아···빌어먹을.”
한모금을 쭉 빨아들인 나비로제가 연기를 내뱉었다. 자세가 범상치 않은 것이 소싯적에는 입에 달고 살았던 것이 분명했다. 하얀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세 모금 정도를 빨고 뱉어낸 그녀가 담뱃대를 돌려주었다.
“북부의 하르타웨이군. 아직 어리면서 뭐 이렇게 좋은 걸 피나.”
“제 유일한 사치죠. 돈을 딱히 쓸 데가 없어서요.”
“고생했다. 다른 것보다 성과가 없는게 가장 속이 뒤틀리는군.”
나비로제가 혀를 찼다. 구름이 물러나며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있었다. 경사면을 타고 남아 있는 혈흔에서는 여전히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로난이 시타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타.”
“뺘잇!”
시타가 네 장의 날개를 펼쳤다. 지면에 스며들어 있던 피가 모조리 방울의 형태로 떠올라 시타의 몸에 흡수되었다. 흡수력이 2년 전에 비해 거의 몇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놀라운 광경에 병사들이 연신 감탄을 흘렸다. 대부분의 피가 흡수되었을 무렵이었다.
“···뺘?”
“왜 그래?”
갑자기 시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던 시타의 주둥이 앞에 붉은 마법진 하나가 그려졌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마법진 앞쪽으로 붉은 길이 스멀거리며 생성되고 있었다. 과거 그란 카파도키아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분명 혈흔을 추적하여 생존자를 뒤쫒는 마법이었다.
시타와 로난의 시선이 맞닿았다. 시타가 날개를 펼치며 이륙했다.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킨 로난이 길을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다녀올게요!”
“로난?”
로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잔가지와 이파리가 뺨을 스쳤다. 튀어오른 진흙이 바짓단을 더럽혔다.
길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 있지 않았다. 시타는 어느 거대한 고목 앞에 멈춰섰다. 정말 큰 나무였다. 백 년도 더 전에 몸을 뉘인 것 같은 고목 아래쪽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붉은 길은 고목 앞에서 끊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 아래 생존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로난이 나무를 밀었다.
“흐으으읍!”
더럽게 무거웠다. 결국 동력원을 전환한 로난이 바렌의 오러를 사용했다. 금빛 기운이 팔 위로 올라오며 근육이 팽창했다.
다 좋았는데 문제는 근력이 너무 향상되었다는 것이었다. 콰아아앙! 고목이 튕겨나듯 날아감과 동시에 로난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어억?!”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목 아래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로난은 그대로 경사면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푹! 그는 푹신하고 축축한 무언가에 부딪히며 멈춰섰다. 짐승의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서 풍겨왔다. 고개를 쳐든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아···아아아아···아아···.”
웨어라이온 한 마리가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갈기가 없는 것을 보니 암사자였다. 신음소리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뺘.”
시타가 로난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웨어라이온을 알아본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분명 자이파의 부관을 맡던 네메아 소령인가 하는 사람이었다.
“···괜찮아요?”
“아으···아아아···.”
그녀는 로난이 여기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웨어라이온이 이렇게 겁에 질린 것은 처음 봤다. 윤기가 흐르던 털은 피와 빗물로 쫄딱 젖어 걸레처럼 변해 있었다.
“젠장, 이럴 때가 아니지. 이리 와요.”
황급히 주머니를 뒤적이던 로난이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상비용으로 들고 다니는 바렌의 특제 포션이었다. 시타의 치유와 병행한다면 어지간한 중상도 치료할 수 있을 터였다.
로난이 조심스레 접근하던 와중이었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소령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불현듯 소령이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물러섰다.
“누, 눈! 그 눈···!”
“예?”
“커허어엉! 가까이 오지 마!”
소령이 포효를 터트렸다. 로난이 진정시키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막다른 곳까지 물러난 그녀가 손톱을 세워 벽면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