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52)
153. 알현(5)
#153
“맹세하겠습니다.”
이상하게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맹세하겠다는 그 한 마디가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로난의 어깨에서 칼을 치웠다.
“···고개를 들어라.”
로난은 그렇게 했다. 황제가 근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 또한 덩달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는 이제 제국의 검이자 새로운 여명이다. 권력을 손에 쥔 만큼 악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림자는 빛의 곁에서만 나타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검을 받아라.”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납도한 황제가 발론의 검을 내밀었다. 그는 최대한 기품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며 두 손으로 검을 받아들었다.
‘가볍군. 실전에서는 못 써먹겠어.’
제국의 여명이 된 첫 소감이었다. 기쁜 것과 별개로 현실감은 없다시피 했다. 차차 시간이 지나며 해결될 문제기는 했지만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그걸로 수여식은 끝났다. 대기 중에 팽배해 있던 비장함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로난을 올려보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영 딱딱하군. 이제 수여식도 끝났으니 하던 대로 하지.”
“열심히 할게요.”
“그리 말해주니 기쁘군. 비밀 요원이 그 검을 들고 다닐 수는 없을테니 이걸 패용하고 다니게.”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황제가 둥그런 금속판 하나를 꺼내들었다. 색은 저무는 태양처럼 붉었고 크기는 여인의 손바닥만 했다.
두께는 금화 세 닢을 겹친 것과 비슷했다. 양면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매 한 마리가 음각되어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죠?”
생소한 물건이었다. 감찰관이나 헌병들이 쓰는 패와는 모양이 달랐다. 황제가 로난에게 패를 건넸다.
“여명패. 아주 오래된 물건일세.”
황제는 상대해야 할 적이 달랐을 뿐 여명이라는 비밀 요원 자체는 머나먼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당장 그가 쥐고 있는 여명패도 유혈제 시절에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니. 패를 받아든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엄청 가볍네요.”
들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라만차를 같은 크기로 잘라내면 그나마 비슷할 것 같았다. 황제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블러드 미스릴로 만들어진 거니까.”
“아하.”
로난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블러드 미스릴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사실 미스릴과는 전혀 다른 금속이었지만, 그만큼 단단하고 희귀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렇게 실물을 보게 될 줄이야.’
단단하고 가벼워서 꿈의 금속 취급을 받았지만 정말 보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오직 발론의 황가만이 블러드 미스릴을 구하고 다룰 수 있는 것이 그 이유라는데 진위는 알 수 없었다. 황제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랐다.
“돈이 없을 때 밑천 삼기에도 그만이지. 아무리 못 받아도 삼대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될 정도는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진짜 팔아도 돼요?”
“물론. 제국에서 중죄를 저지르고 타국으로 망명했을 경우에만 말이지. 잡히면 평생 지하 감옥에서 썩게 될 걸세.”
로난은 자기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이제 보니 유머 감각도 제법 있는 아저씨였다. 묵례한 로난이 여명패를 품속에 챙겼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어지간하면 결정적인 순간에만 꺼내들게. 무방비 상태의 장교들이 봤다가는 기절할 수도 있는 물건이니까.”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목소리로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무식한 징벌병이라 몰랐던 거지 정규군은 다 알고 있는 물건인 듯했다. 황제의 얼굴이 다시 진지해졌다.
“그럼, 첫 번째 임무를 하달해도 괜찮겠나?”
“그 개자···아니, 네뷸라 클라지에와 관련된 거라면 뭐든지요.”
로난이 무겁게 주억거렸다. 지금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카데미 일정이 있기는 하지만 까짓꺼 동아리 활동으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뭣하면 바렌이나 황실이 해결해 주겠지. 황제의 표정이 엄숙하게 굳어졌다.
“짐은 자네가 내일 열리는 검의 제전에 참석해 줬으면 하네.”
“그렇군요. 검의 제전이라···엥?”
로난이 눈을 치켜떴다.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주문이었다. 황제가 물었다.
“음? 왜 그러나?”
“어···아녜요. 계속 말하세요.”
“그러지. 자네도 알다시피 네뷸라 클라지에의 악행은 대체적으로 다수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곳에서 행해진다네. 온 대륙의 검사가 집결하는 검의 제전은 유력한 후보지. 짐은 그대가 이곳을 한번 시찰했으면 한다네.”
“그럼 황실 소속으로 참가하게 되는 건가요?”
“으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소속이라니?”
황제가 눈썹을 치켜떴다. 로난이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조직마다 참가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었나요?”
“···의식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는 거지, 파르잔까지는 누구나 갈 수 있는 걸로 아네만. 혹시 짐이 모르는 사이 규율이 바뀐 건가?”
“아?”
로난이 굳었다. 아직 젊고 창창한 황제가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한순간 나비로제가 피식거리며 웃는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그 여자가 날 속였구나···!’
깨달음은 순식간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기는 했다. 성지 어딘가에 존재하는 성검을 찾는 것이 의식의 최종적인 목적이라면, 추천을 받아 참가자를 제한하는 것보다는 일단 끌어 모은 다음에 걸러 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나비로제는 애초에 두 사람을 전부 데려갈 생각이었을 터였다. 슐리펜 그 자식도 모르고 있던 건가? 젠장, 이래서 가슴 큰 여자는 조심해야 하는데. 로난의 표정이 다채롭게 일그러졌다. 황제가 당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정도의 검사면 의식 정도는 무리 없이 통과할 것 같네만, 혹시 별로 내키지 않는다면···.”
“···아뇨. 엄청나게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검의 제전에 가서 수상쩍어 보이는 놈들을 모조리 잡아 족치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네.”
“맡겨 주세요. 안 그래도 내일 가려 했으니까.”
그래도 딱히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로난은 두꺼워진 자신의 손목을 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비로제의 의도야 어찌됐던 한 달에 불과한 기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임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중요한 일이었다. 로난이 황제를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폐하,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음? 뭐지?”
“제가 수상하지는 않으세요?”
찰나 황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로난은 무표정으로 그의 정색에 응수했다.
알고 있다.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을 터였다. 사실 여명이 되기 전에 말했으면 좋았겠지만, 뒤늦게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아무리 짧아도 몇 년을 하게 될 직무에 찝찝한 기분으로 임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경계할 만도 한데 말이지.’
적어도 자신이 황제라면 그랬을 터였다. 로난은 태풍의 눈이라 해도 무방한 인물이었다. 가는 곳마다 네뷸라 클라지에와 얽히고설키며 각종 사건을 저질러 댔다. 그것도 새파란 애새끼 시절부터.
물론 전부 결과는 좋았기에 더없이 우수한 인재로 보일 수는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만큼 의심스러운 놈도 없었다. 잠시 벙쪄 있던 황제가 입을 뗐다.
“생각이 깊군. 칼로서는 별로지만 여명에게는 좋은 자질이야.”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별안간 고개를 돌린 황제가 옥좌를 바라보았다.
“···저 의자에 앉으면 말이지,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네.”
“네?”
“대표적으로 사람의 내면이 있지. 황제로서 온갖 인간군상을 대하다 보면 남과 짧게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파악하게 되고,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정도는 자연스레 알게 된다네. 놀라운 일이지.”
로난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등받이가 기이할 만큼 기다란 의자는 엉덩이가 닿는 부분이 맨질맨질하게 변해 있었다. 오직 제국을 다스리는 이에게만 허락되는 자리였다.
황제는 로난이 태어나기 전부터 저기 앉아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맞이했을 것이다. 저마다의 선의와 악의, 목적을 품고 찾아온 사람들을. 생각해 보니 그럴싸한 주장이었다. 황제가 입을 뗐다.
“자네는 네뷸라 클라지에를 증오해. 그 누구보다도. 짐의 말이 틀렸나?”
로난의 눈이 커졌다. 반박할 여지가 없는 추리였다. 그가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아뇨.”
“자네의 불은 네뷸라 클라지에를 제외한 다른 것을 태울 겨를이 없어. 오직 그들을 불사를 날만 기다리고 있지. 그 맹목을 이용하고자 했다는 것을 속이지는 않겠네.”
황제는 로난을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내면이 어쩌고 하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시선이 꼭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자네를 등용했냐 묻는다면 그건 아닐세. 아까도 말했지만 그대는 본인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어.”
“그건···.”
“의도야 어찌됐건 자네는 선을 행하네. 악을 물리치고 죄 없는 이들을 구했지. 이는 공공연한 사실이고, 그걸로 충분하다네. 그대의 뒷배경이나 네뷸라 클라지에를 그토록 증오하는 이유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야.”
황제가 뱉는 음절 하나하나마다 힘이 실려 있었다. 거의 머리 하나만큼의 키 차이에도 불구하고 압도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군주의 위용이라는 건가. 턱까지 시선을 내렸던 황제가 다시 로난의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짐은 발론의 황제다. 아직 빛과 그림자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눈이 상하지는 않았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끝났다. 로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질문을 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명쾌한 답변이었다. 다시 미소를 머금은 황제가 로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이야기도 끝났으니 슬슬 이동하지.”
“어디를요?”
“간단하게나마 봄을 불러온 영웅들을 축하해야하지 않겠나. 설마 주인공인 그대가 빠질 생각은 아니었겠지?”
황제는 이번 연회가 올해의 마지막 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불현듯 징벌병 시절 황궁에서는 술이랑 안주로 뭐가 나올지에 대해 떠들어 대던 기억이 났다.
아마 그 치들은 똥 대신 금을 쌀 거라며 낄낄거리곤 했는데, 확인해 볼 좋은 기회였다. 로난이 히죽 웃었다.
“좋죠.”
그들은 알현실을 벗어나 연회장으로 향했다. 기나긴 복도의 저편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렴풋이 잔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오는 걸 보니 나름대로 잘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