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53)
154. 성지를 향해(1)
#154
“크으···나쁘지 않았어.”
로난이 필레온으로 돌아온 것은 늦은 새벽이었다. 반쪽짜리 달이 맑은 밤하늘에 걸려 있었다. 알싸하니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이 기분이 썩 괜찮았다.
연회는 즐거웠다. 징벌병 동기들의 예상과는 달리 요정 튀김이나 용의 눈물로 빚은 술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거기에 못지않게 좋은 음식들이 식탁에 올라가 있기는 했지만.
‘여명이라.’
불현듯 시선을 내린 로난이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새 주인을 맞이한 발론의 검이 절그럭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전생에는 화살받이로 굴러먹었던 못 배운 칼잡이가 제국의 비밀 요원이 되어 버리다니. 소설도 이쯤 되면 개연성이 없다고 욕을 먹을 터였다.
‘다 뒤졌다.’
하지만 로난은 이것이 현실인 것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하게 된 이상 대충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얻은 권리와 특권을 기둥뿌리까지 뽑아먹을 예정이었다. 미천한 신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군대에서 7년을 굴렀으니 나름대로 잘 활용할 자신이 있었다. 군대라는 조직은 어디에서나 비슷하게 돌아가니까.
‘···영 마음에 걸리는군.’
다만 계속 신경쓰이는 것이 있다면 현 검성인 자이파였다. 술을 위장에 들이붓다시피했음에도 별로 취하지 않는 것은 그 호랑이에 대한 염려 탓이 컸다.
자이파는 끝내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황제에게 면박을 당한 것은 둘째치고 자신에게 지독한 오해를 품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관계 없는 남에게 해코지를 할 작자는 아니지만···.’
아직도 그 희번득한 눈동자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네메아 소령은 아직도 기절한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그녀가 정신을 차려야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지. 로난이 막 나바르도제 관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늦었군. 로난.”
“에이 씨발, 깜짝이야.”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슐리펜이 기숙사 현관 앞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생각이 많아서 미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간 벌어진 일은 대강 전해 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더군.”
“너는 어디 갔다가 지금 기어들어 오는 거야?”
“오늘 정오 무렵이다. 그랑시아 영지에 다녀왔지. 도착하자마자 이릴 양의 집에 들렀더니 간만이라면서 부탁하지도 않은 요리를 대접해 주더군. 네놈은 언제나 복에 겨운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살도록 해라.”
저딴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지껄여 대는 것을 보니 슐리펜이 맞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상판대기였다. 여전히 재수 없이 잘생긴 얼굴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슐리펜은 그 이후로도 전속 재단사에게 의뢰한 봄옷을 누나에게 선물했다든지, 그 모습이 실로 천사를 연상케 했다는지 같은 말을 한참이나 주절거렸다. 영혼 없이 끄덕이던 로난의 시선이 우연히 슐리펜의 가슴팍에 닿았다.
‘이 자식도 뭐 빠지게 굴렀네.’
로난이 픽 웃었다. 의외로 덩치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그가 한달간 자신과 버금가는 노력을 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코어의 기운이 거의 2할 가량 늘어나 있었다.
헌데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로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미친놈아.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흐음···신체가 거기서 더 단련되었군. 마나도 훨씬 정순해졌고. 역시 너는 내 유일한 적수다.”
슐리펜은 말을 돌렸지만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여튼 제정신이 아닌 새끼였다. 벽에서 등을 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럼 대련을 해야 하니 이동하지. 몇 시간 후에는 파르잔으로 출발해야 하니까.”
“아.”
슐리펜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당장 오늘이 출발일인데 결판을 내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이 새끼도 검의 제전의 진실에 관해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한숨을 내쉰 로난이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어···이걸 니가 어떻게 들을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안 싸워도 돼.”
“무슨 뜻이지?”
“그 누님이 우리를 속였다는 뜻이지.”
로난은 황제에게 들은 정보를 고스란히 전달해 주었다. 애초에 참가 신청 자체는 누구나 할 수 있고, 그 내부에서 싹수 있는 놈들을 골라내는 것이다. 나비로제가 우릴 속였다.
“······”
제법 충격을 받을 만한 정보였음에도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슐리펜의 얼굴에는 한치의 동요도 없었다. 설명을 마친 로난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서 그런지 피로감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흐아아암···아마 아침에는 진실을 말해 줄 거야. 나 잔다.”
“기다려라.”
그가 막 기숙사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탕! 다짜고짜 발도한 슐리펜이 검으로 문을 가로막았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 새낀가.”
“아직 대련도 하지 않았는데 어디를 가려 하는 거지. 따라와라.”
“아니, 내 말은 똥구멍으로 들었냐? 안 싸워도 된다니까.”
“참가 조건 따위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비로제 교관님은 한 명을 데려간다 했고, 그건 대련에서 이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 나는 분명 그렇게 들었다.”
술이 확 깼다. 고지식함도 이런 고지식함이 없었다. 로난이 기가 찬다는 말투로 토로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건 무조건 속임수라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 누님이 너랑 나 중에 누구 하나를 빼놓고 갈 사람이냐?”
“그건 내일 아침이 되면 알 수 있겠지.”
“···형 피곤하다. 뭣하면 아침에 상대해 줄 테니까 가서 발 닦고 자라.”
“너와 대련하는 것 또한 내 주요 목적 중 하나였다. 혹시 나에게 질까 두렵나?”
“뭐라?”
로난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봐.”
“내게 패배할까 봐 두렵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구차하게 발을 뺄 이유는 없을 터. 몸은 커졌지만 심장은 줄어든 모양이군.”
“하.”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지금 보니 칼이 아니라 혓바닥도 잘 놀리는 놈이었군. 심기를 거스르는 실력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런 쥐좆만한 새끼가.”
피식피식 웃던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두 번의 삶을 통틀어서 이런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간 적은 없었다.
스르릉! 라만차의 검신이 어두운 빛을 뿌리며 칼집을 빠져나왔다. 그는 검 끝을 슐리펜의 목에 겨누며 으르렁거렸다.
“당장 덤벼.”
“이제야 돌아왔군. 먼저 장소를 옮기지.”
“각오하는게 좋을걸. 니 새끼가 지면 바지에서 엉덩이 부분만 예쁘게 오려서 우리 누나한테 가져다 줄 거니까.”
두 사람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좋게좋게 넘어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것 같았다. 숙취나 피로 따위는 이미 날아가버린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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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밝았다. 서서히 옅어지는 하늘 아래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교내를 돌아다니는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도통 어디를 간 건지.”
교정을 거닐던 나비로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단정한 제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등에는 비검 우루사가 메어져 있었다. 성지 파르잔으로 가는 마차가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막상 같이 갈 두 놈이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이 어제 둘 다 왔다고 들었거늘.’
기숙사에도 없었고, 제1투기장에도 없었다. 교정을 크게 한 바퀴 돌았음에도 행방이 묘연했다. 슬슬 출발해야 적당히 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는데 곤란한 일이었다.
‘아.’
그때 어느 공간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해주를 마치고 돌아온 로난의 환영회를 했을 때 한번 갔던 기억이 있었다.
나비로제는 교정의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특급 모험 동아리와 이어진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환각으로 만들어진 장작을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가자 활주로를 연상케 할 만큼 거대한 훈련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비로제가 얼어붙었다.
“이건···.”
훈련장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크고 작은 검흔들이 바닥과 벽면, 심지어는 높다란 천장까지 어지럽게 뒤덮고 있었다. 칼날의 형태를 한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듯한 풍경이었다.
허수아비나 마공학 기사 등 훈련에 도움이 되는 장비나 병장기도 모조리 토막이 나 있었다. 의도하고 베었다기 보다는 휩쓸려서 파괴된 느낌이 강했다.
목재로 만들어진 동아리 건물은 아예 세로로 크게 잘려서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양쪽으로 넘어질 것 같은 것이 영 위태로웠다. 나비로제가 헛웃음을 쳤다.
“목숨을 걸고 싸우기라도 한 건가.”
변명할 여지도 없이 로난과 슐리펜의 검흔이었다. 나비로제는 천천히 훈련장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훈련장 한복판에 널브러져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멋대로 바닥을 뒹굴고 것이 꼭 술 취한 개 같았다. 넝마쪼가리를 걸치고 있는 주제에 검은 꽉 쥐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두 사람의 주위로 핏자국이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었다.
다행히도 탈진해서 쓰러진 것이지 죽은 건 아니었다. 이마를 짚은 채 신음하던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허억···! 교관님?!”
“크음!”
두 사람이 튀어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옷감 너머로 드러난 살갗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약도 제대로 안 발라 가면서 대련을 한 듯했다. 나비로제가 말했다.
“간밤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어···아무 일도 없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로난의 답변에 나비로제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두 개 중대가 백병전을 벌여도 이것보다는 곱게 싸웠을 터였다. 그녀가 손가락을 뻗어 출구를 가리켰다.
“10분 내로 준비하고 와라. 둘 다 같이 간다.”
“알겠습니다.”
“뭐가 ‘알겠습니다’야. 내 말이 맞잖아 병신아.”
딱! 로난이 슐리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고분고분하게 맞아 주었다. 로난이 나비로제에게 질문했다.
“그, 교관님. 원래부터 둘 다 데려가려 했던 거죠?”
“아니. 정말로 진 사람은 두고 가려 했다. 그래야 동기부여가 확실하니까.”
나비로제가 단호하게 말했다.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뒤통수를 매만지던 슐리펜이 그를 돌아보았다. 로난은 최대한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어···그러면 왜 전부 데려가는 거죠?”
“승패가 안 났을 게 뻔하니까. 둘 다 정말 열심히 해 주었군.”
두 사람 모두 일취월장할 것이라 예상은 했는데 설마 이 정도로 발전할 줄은 몰랐다. 나비로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 검의 제전은 기대해도 되겠어.’
여러모로 전대미문의 제자들이었다. 정확한 것은 가 봐야 알겠지만 어마어마한 파란을 일으킬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녀가 경쾌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출발하지.”
정확히 십 분 뒤, 채찍질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을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목적지는 성지 파르잔. 검의 제전이 열리는 고결한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