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55)
156. 성지를 향해(3)
#156
나비로제가 물가로 걸어 나왔다. 여전히 몸을 가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녀가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저기서 내 옷을 좀 가져다주겠나.”
“···그러죠.”
나비로제의 옷은 호숫가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외투부터 속옷까지 자유분방하게 널브러져 있는 것이 그녀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양심적으로 이건 보면 안 되겠지. 옷을 건넨 로난이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습구나. 이미 즐길 만큼 즐긴 주제에.”
“그러니까 고의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거기서 목욕하고 계실 줄은 몰랐죠.”
“이 모습을 본 남자는 지금까지 너 한 명이니 기뻐해도 좋다. 생각해 보니 여자까지 포함해도 아데샨이 전부군. 그 아이도 상당히···”
나비로제는 언젠가 아데샨과 목욕탕에 갔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주제였지만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로난이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일단 좀 걷지.”
어느새 옷을 다 입은 나비로제가 앞으로 나섰다. 대태도는 등에 메어진 채였다.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숫가를 따라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풀숲을 헤집을 때마다 풀벌레의 노랫소리가 커졌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다. 이건 올해 초에 자이파와 싸울 당시 입은 상처야.”
“역시 다친 곳이 없다는 건···.”
“그래. 체면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
나비로제가 픽 웃었다. 그녀는 셔츠를 배꼽 위까지 올리며 상처를 보여주었다. 다시 봐도 상당히 심각한 상처였다.
“이 상처를 입으면서 승부가 결정났다. 놈의 언월도가 도중에 부서져서 틀림없이 이긴 줄 알았는데, 그 망할 고양이가 실력을 감추고 있었더군. 열 개의 검처럼 날아드는 발톱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발, 그건 반칙 아니에요?”
“어이는 없었지만 실력은 진짜였어. 그리고 내게는 도론 장인께서 만든 명검을 들고 발톱에게 진 주제에 반칙이 아니냐고 따질 용기가 없었다.”
나비로제는 당시 자이파와의 승부에 대해 묘사했다. 칼싸움 자체는 그녀의 승리로 볼 수도 있었으나 자이파가 발톱을 꺼낸 이후로는 일방적으로 밀렸다고 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사실 언월도도 놈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서 부서진 거니 검으로 이겼다고 말할 수도 없었지. 이 상처는 내 몸뚱어리뿐만이 아니라 마음마저도 찢어 놓았다.”
“그날 다 나은 거 아니었어요?”
로난은 해주에서 돌아온 직후 그녀와 했던 대련을 떠올렸다. 대련을 마친 나비로제는 분명히 티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분명히 그때 상처를 떨쳐낸 줄 알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실제로 나는 네게 패배한 이후 놀라울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
“굳이 따지자면 패배는 아니죠. 교관님이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패배는 패배다. 기분 좋은 패배였지. 어쨌든 결론을 말하자면, 다 나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거다. 그때 느꼈던 좌절은 내 심장 속에서 살아가던 뱀을 죽였다.”
“뱀이 죽었다는 건 설마···.”
“그래. 오러를 발현할 수 없게 되었다.”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오러를 발현할 수 없다는 한마디가 무거운 납처럼 가슴 위에 내려앉았다. 불현듯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젠장, 이해가 안 되네. 코어라도 다친 거예요?”
“코어는 물리적인 피해로는 잘 손상되지 않는다. 상처가 심장을 빗겨나가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로난이 말꼬리를 끌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쓴웃음을 머금은 채 침묵하던 나비로제가 입을 뗐다.
“로난. 오러의 종류가 어떻게 구분되는지 알고 있나.”
“갑자기 그게 무슨···화제 좀 그만 돌리시면 안 돼요?”
“그런 게 아니니까 대답해 봐라. 누군가는 산들바람을 일으키는데 그치는 반면 누군가는 왕국도 휩쓸 폭풍을 일으키지. 이 불합리한 기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
뜬금없는 소리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유한 마나인 오러가 어떤 기준으로 발현되는지는 아직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문제로 알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던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추측이긴 하다만, 나는 자아가 그 기준이라 생각한다. 개인을 이루는 의식이나 관념 말이다.”
“자아?”
“그래. 나는 남부의 대밀림에서 태어났다. 맹수가 우글거리는 길목에 버려진 걸 어느 모험가가 발견했지. 부모의 얼굴은 본 적조차 없다.”
갑작스러운 과거사에 로난의 눈이 커졌다.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개인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비로제가 말을 이었다.
“한창 전란에 휩싸여 있던 남부는 어린 계집아이가 썩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뒤를 봐 줄 사람도 없는 천애고아라면 더더욱.”
“교관님.”
“나는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뿐이었지만 다행히도 무예에 재능이 있어 창부로 전락하지는 않았지. 나는 내 또래의 고아들이 군인들에게 안기며 화대를 받을 동안, 나는 그들을 죽인 목숨 값으로 삶을 연명했다.”
나비로제의 삶은 거칠었다. 시체로 쌓아올린 길을 걷는 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전생의 로난이 감자 스튜가 질린다며 이릴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을 때, 나비로제는 이미 전쟁터에서 잘라낸 적군의 코와 귀를 막사에서 정산받고 있었다.
“그때보다 강함을 추구했던 시기는 없었다. 당시의 내 머릿속은 상대를 압도하고 얕보이지 않는 것밖에 없었지. 오러를 발현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당시의 나는 악명 높은 수배범을 추격하고 있었다. 미리 검으로 발목을 찢어 놔서 핏자국만 따라가면 됐었지.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밀림을 가로지르는데, 웬 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오더구나.”
“뱀? 내가 아는 그 뱀이죠?”
“그래. 거대한 독사였다. 푸른 비늘이 보석처럼 아름다운 놈이었는데, 가족으로 보이는 원숭이 세 마리가 그 앞에서 꼼짝도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셋이 동시에 도망치거나 맞서면 한 마리는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더군. 공포에 압도당한 나머지 삶의 의지마저 잃어버린 것 같았다.”
“뱀은 결국 원숭이를 한 마리씩 삼키기 시작했다. 그냥 떨어진 걸 줍는 수준이었지. 나는 수배범을 쫓는 것도 잊은 채 가만히 서서 뱀의 아가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원숭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왜요?”
“그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겨루기 전부터 상대를 압도하여 힘을 전혀 들일 필요가 없는, 군림하는 강자. 그것이 나의 염원이라는 것을 그 뱀 덕에 깨달았다. 그리고 깨달음의 순간, 시야 바깥에서 날아온 화살이 내 팔에 박혔다.”
슈욱팍! 갑자기 나비로제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화살이 팔에 박히는 시늉을 해 보였다. 깜짝 놀란 로난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씨, 놀랐잖아요.”
“표정이 하도 심각하길래 말이지. 이렇게 보니 제법 귀여운 면도 있구나.”
“그만 하세요. 그래서 그 화살은 뭐였어요?”
“뒤쫓기던 놈이 동료들을 데리고 온 거였다. 그 무렵의 나는 이미 악명 높은 현상금 사냥꾼이기도 했거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포위당한 걸 깨달았다. 화살촉에는 독이 발려 있었고.”
로난은 초당 두번씩 주억거리는 것으로 경청하고 있다는 몸짓을 해 보였다. 손에 땀이 흐르는 걸 보니 이야기를 푸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빗발치는 화살과 좁혀드는 포위망. 몽롱해지는 의식. 당시의 급박함을 묘사하며 로난을 괴롭히던 나비로제가 별안간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내 오러가 발현되었다.”
“허.”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사방이 어두워지며 조금 전에 보았던 독사가 나타났지. 그 뒤는 네가 예상하는 대로 흘러갔을 거다.”
나비로제는 마비당한 수배범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챙겼다. 농작물을 수확하듯 목을 베는 감각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만사를 불러오던 원동력은 결국 타인을 압도하고 싶다는,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에서 기인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교관님이 더는 오러를 못 다루게 된 이유는···.”
“그래. 자이파에게 연달아 패배하면서 그 의지가 꺾였기 때문이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비로제가 다시 쓴웃음을 머금었다. 흉터를 매만지던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화살은 빠졌지만, 구멍은 남은 거다.”
로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싶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굉장히 복잡한 유형의 상처였다. 대놓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로. 이런 경우는 본인이 어떻게든 극복하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신기하군. 너를 만나면 별 소리를 다 하게 되는구나.”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네요. 이거 필요해요?”
로난이 주머니에 있던 담뱃대를 슬쩍 보여주었다. 나비로제가 헛웃음을 쳤다.
“자꾸 학생이라는 본분을 잊어버리는 것 같군. 뭐 좋은 거라고 계속하는 거냐.”
“그래서 필요 없어요?”
“하여튼···.”
나비로제는 말없이 담뱃대를 채서 입에 물었다. 로난은 물이 흐르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담뱃가루를 털어넣고 성냥으로 불을 붙여 주었다.
“하아아아···.”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그녀가 호수를 바라보며 숨을 내뱉었다. 구름처럼 새하얀 연기가 두 개의 달 위로 흩어졌다. 다시 봐도 자세가 완벽했다.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로난이 실소했다.
“어릴 때부터 피기 시작했죠? 아마도 전쟁터를 전전하면서부터.”
“그래. 어떻게 알았지?”
“나도 그랬거든요.”
나비로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이어 전쟁터에 가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 날아왔지만 로난은 웃음으로 그 답을 대신했다. 그가 머리 뒤로 손깍지를 낀 채 호수를 감상하던 와중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다.”
“뭔데요?”
“네가 나와 대련할 때 사용하던 검술. 그걸 누구한테 배운 거지?”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맥락상 구원자의 검법을 말하는 듯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질문했다.
“어···그건 왜요?”
“내게 첫 패배를 안겨준 사람의 검술과 지나칠 정도로 닮았더군.”
“패배? 자이파가 처음 아니었어요?”
“그 전에 한명 더 있었다. 내 검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사람이지. 아마 자이파도 그 사내의 칼솜씨 앞에서는 한낱 고양이로 전락할 거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자이파를 고양이로 만들 만한 검사라니. 그런 실력을 갖춘 사람은 자기가 알기로는 두 명밖에 없었다. 구원자와 배신자.
“혹시 그 사람, 머리가 하얀색이었나요?”
“그래. 이건 또 어떻게 알았나.”
“얼굴은요? 얼굴도 기억 나요? 눈동자 색이라던가.”
“오래 전의 일이라 그렇게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 아, 내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나비로제가 말꼬리를 끌었다. 몸을 돌린 그녀가 로난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어째 너와 느낌이 비슷했다. 네가 아데샨을 위해서 카르단을 대머리로 만들었을 때부터 그 생각을 했지. 그게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군.”
“느낌이 비슷하다는게 정확히 무슨 말이죠?”
“풍기는 기운이라 해야 하나···왜, 그런 거 있지 않느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나비로제가 눈을 감은 채 침음을 흘렸다. 자기가 말을 꺼내 놓고 어디가 닮았는지 말하지 못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손바닥은 자신의 뺨에 닿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몸을 문질러 씻던 손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흐아아아악! 사람 살려!”
“뭐야 시발.”
로난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에서 깬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나비로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아마 신참 사냥꾼일 거다.”
“신참 사냥꾼?”
“그래. 여기까지 왔으면 슬슬 나타날 때가 됐지. 어떻게든 성검의 주인이 되어 보려는 어중떠중이를 골라 노략질을 하는 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