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57)
158. 검의 제전(1)
#158
“검성 자이파 님이에요.”
“엉? 자이파?”
로난의 눈이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라 당황을 금할 수 없었다. 동시에 왜 소년이 검의 제전까지 기어왔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자이파면 그럴 수 있지.’
자이파는 여전히 황제의 명을 받아 온 대륙을 떠돈다고 들었다. 그가 일정한 기간 동안 어딘가에 확실하게 체류하는 것은 검의 제전 뿐일 터였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님이 경외의 뜻을 담아 자이파 님에게 선물하시는 거예요. 기왕이면 이번 검의 제전때 꼭 써주셨으면 한다고 하셔서···.”
아무래도 스승이라는 사람이 자이파와 인연이 깊은 모양이었다. 하긴 역대 최강의 검성이라 불리는 작자였으니 흠모하는 자가 없는 것이 더 이상할 터였다. 문득 자이파가 평소에 들고 다니던 언월도를 떠올린 로난이 검지로 턱을 매만졌다.
“그렇구만···그런데 자이파가 쓰기에는 너무 작지 않아?”
제법 큰 롱소드였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인간 기준이었다. 못 보던 2년간 덩치가 더 커진 것 같던데, 자이파가 들었을 때 자칫하면 장난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후후···그렇게 보일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이 검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요.”
“능력? 만져주면 노래라도 부르냐?”
“죄송하지만 자세한 건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스승님께서 반드시 자이파 님을 만나뵌 뒤에만 직접 보여주라 하셔서.”
소년이 단호하게 말했다. 꺼벙한 놈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똑 부러지는 면도 있었다. 로난은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
‘이 자식···.’
다만 퉁퉁 부어오른 얼굴이 심기를 거슬렀다. 찢어진 옷 틈새로 드러난 맨살과 거기서 흐르는 피도. 한숨을 내쉰 로난이 안주머니에서 포션 한 병을 꺼내 들었다.
“알겠으니까 상처나 이리 내.”
“그, 그건 포션?! 괜찮아요! 저는 정말로···.”
“나는 같은 말을 세 번 하게 만든 사람을 때리는 병이 있어. 오줌을 지릴 때까지”
“합···!”
소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로난은 무심한 얼굴로 포션을 손가락에 찍어 바르기 시작했다. 바렌의 특제 포션은 순식간에 상처를 아물게 했다. 막 어깨의 상처를 살피던 와중이었다.
‘음?’
로난은 소년의 전체적으로 부상이 얕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디 하나 부러진 곳도 없었고, 속을 다친 것 같지도 않았다. 신참 사냥꾼들의 체구를 생각하면 굉장히 가벼운 부상이었다.
“그 덩치들한테 얻어맞은 것치고는 부상이 적네. 많이 맞아봤나 봐?”
“아하하···네. 조금 요령 있게 맞기는 했죠. 저희 스승님도 원체 거친 분이라서요.”
“그렇다고 너 같은 애새끼까지 패다니, 어지간히 할 짓 없는 작자군. 다 됐다.”
로난은 소년의 뺨에 포션을 문지르는 것으로 치료를 마쳤다. 멍이 빠지고 붓기가 가라앉자 제법 반반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집애처럼 유약해 보이는 것이 확실히 칼잡이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회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라니. 신기한 조합이군.’
회백색의 머리칼은 꼭 잿가루가내려앉은 눈 같았다. 상처와 통증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기적이라도 목도한 사람처럼 자신의 얼굴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세, 세상에···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끝내주지. 그거 만든 사자가 보통 사람은 아니거든.”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됐다. 배달이나 마저 해.”
로난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애초에 뭘 바래서 한 행동도 아니었다.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 가며 인사를 한 소년은 빠르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지금 출발하려고?”
“아아, 네!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으면 내일 저녁에는 도착할 것 같아서요. 얼른 용무를 마치고 돌아가 봐야죠.”
“우리랑 같이 가도 되는데. 안전 정도는 보장해 줄 수 있어.”
“정말 감사합니다만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더는 폐를 끼칠 수도 없고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소년이 재차 머리를 조아렸다. 영 불안했지만 본인이 그러겠다는데 멋대로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로난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이름이 뭐냐?”
“다르만입니다. 그쪽은···?”
“로난. 자이파를 만나면 안부나 전해 줘.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오해를 풀자고.”
“오, 오해요···? 자이파 님이랑?”
다르만의 얼굴이 굳었다. 남에게 자랑스레 떠벌릴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볍게 주억거린 로난이 얼른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런 게 있어.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되고.”
“···아뇨, 꼭 전해드릴게요.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로난 님.”
“가라.”
그리 말한 다르만이 몸을 돌렸다. 그는 세 걸음마다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로난에게 인사를 했다. 로난은 다르만이 나무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뒤를 돌았다.
그는 문득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던 잡동사니가 모두 사라진 것을 눈치챘다. 찢어진 침낭 조각이나 뭉개진 샌드위치 따위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꺼져 가는 모닥불을 제외하고는 다르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신기한 놈이군.’
흥건한 핏자국과 여섯 개의 팔만이 조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배달을 위해 파르잔까지 가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기이한 인상을 주는 놈이었다.
로난은 모닥불을 흙으로 덮어 껐다. 그가 별하늘을 올려보던 와중이었다. 파사삭.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로난은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짐승이라도 온 건가? 라만차의 검신이 칼집 밖으로 뽑혀나오라는 순간이었다. 겹쳐진 나무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와 눈이 마주친 슐리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또한 당장에라도 발검할 기세로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로난. 이런 곳에 있었나.”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인마. 너가 왜 여기 있어?”
“비명을 듣고 왔다. 상황은 한참 전에 종료된 모양이군.”
슐리펜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정황을 파악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난이 갸웃거렸다.
“한참 전?”
한참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슐리펜이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그래. 비명을 지른 자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진작에 떠난 것 아닌가.”
“그건 맞는데···진짜로 얼마 안 됐는데?”
정신을 집중한 로난이 감각을 확장했다. 백 미터 정도 앞에 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처리한 신참 사냥꾼들이었다.
출혈이 심했던 걸까, 이윽고 그들 중 하나가 촛불이 꺼지듯이 사그라졌다. 끝내 다르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랍쇼?”
“이 팔의 주인 중 하나가 죽은 것 같군. 저들 말고 다른 이의 기운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다만···.”
슐리펜은 여전히 다르만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난보다 훨씬 더 감각이 예민한 그가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다르만이 벌써 아득하게 멀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싸움은 전혀 못 하는 것 같던데 발은 좆나게 빠른 건가? 어이 없는 상황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빌어먹을, 유령에게 홀린 것 같군.”
“무슨 일이 있던 거냐.”
“가면서 얘기해 줄게. 나비로제 교관님은?”
“조금 전에 돌아오셨다. 너를 두고 생각보다 훨씬 더 배짱이 있는 놈이라고 칭찬하시더군. 무슨 일이 있던 거냐.”
“···하, 그거야말로 진짜 죽여주는 이야기지.”
로난이 픽 웃었다. 두 번의 삶을 통틀어 돌이켜 봐도 손에 꼽을 만큼 기묘한 밤이었다. 두 개의 보름달과 스승의 나신. 자이파를 찾아가는 정체불명의 배달부.
로난과 슐리펜은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은 길었지만 할 이야기가 많아서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뻗은 잔가지 사이로 별빛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
로난 일행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오자 짧은 풀로 뒤덮인 들판이 나타났다. 주변을 쓱 흝어본 나비로제가 두 사람을 격려했다.
“다들 수고 많았다. 시간에 정확하게 맞춰서 왔군.”
공기가 깨끗했다. 아침으로 무르익어가는 새벽은 아직 어둑한 검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들판 너머 반짝거리는 불빛을 본 로난이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파르잔에 존재하는 네 마을 중 하나인 드란 파르잔이었다. 검의 제전에 참가하고자 하는 검사라면 누구나 들러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로난의 시선이 마을의 뒤쪽으로 옮겨졌다.
“저 꼭대기에 성지가 있는 거예요?”
“그래. 의식을 통과한 이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지.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롭군.”
“거 더럽게 높네요.”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드란 파르잔의 뒤편에는 거대한 산이 솟아나 있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솟아 있는 산은 하늘을 지탱하는 버팀돌 같았다. 파르잔이라 함은 대게 저 산과 그 위의 성지를 통틀어서 칭하는 말이었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파르잔의 모습은 꼭 베일에 뒤덮인 것처럼 푸르스름했다. 산의 머리는 만년설로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것들은···.’
문득 로난은 수많은 사람이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눈에 보이는 것만 오십 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란 파르잔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횃불을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저물어가는 별을 등불 삼아 걷고 있었다. 저마다의 행색은 달랐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전부 칼을 차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어서 가죠.”
꼭 순례자의 행렬처럼 경건한 모습이었다. 짧은 격려를 주고받은 세 사람은 그들이 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판은 생각보다 넓었다. 걷는 동안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주변에는 풀 밟는 소리만 사부작거리며 울려 퍼졌다.
“오시느라 고생 많았소. 검의 제전에 참여할 거라면 곧바로 광장으로 이동해 주시면 감사하겠소.”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가 환해진 뒤였다. 안내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참가자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불현듯 나비로제와 마주친 안내인이 헛숨을 들이켰다.
“오시느라 고생 많···허어억! 나비로제 님?!”
“간만이군. 분명 4년 전에도 있던 것 같은데.”
“기,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때도 제가 안내를 해드렸지요. 관리 위원 본부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이번에는 나도 참가자로 온 거니까.”
“···예?”
안내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로난과 슐리펜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비로제는 뭔가 몹시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의 안내인을 등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벙쪄 있던 로난이 재빨리 그녀를 따라잡았다.
“뭐야, 교관님 같은 사람도 나갈 수 있는 거였어요?”
“규정에 위배되는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문제될 것은 없다. 나라고 성검을 찾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그건 맞는데 의외라서요. 걸러내는 과정 중에 참가자 간의 대련도 있죠?”
“아마도 그렇겠지. 실력 본위의 의식이니까.”
“교관님이랑 붙을 사람이 불쌍해지네요. 그것도 엄청.”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시험을 시킬 지는 몰라도 이건 학살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안내인의 지시에 따라 광장으로 이동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필레온의 대광장만한 공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가 모여 있었다.
“이게 거르고 걸러서 온 거예요?”
“···이례적으로 많기는 하군. 개최 날짜도 앞당기더니 정말 무슨 일이 있던 건가.”
나비로제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어 사람들은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었다. 로난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작하려면 조금 남은 것 같은데, 둘러보고 올게요. 가만히 있으려니까 영 좀이 쑤셔서.”
“그렇게 해라.”
나비로제가 주억거렸다. 기지개를 쭉쭉 켠 로난이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에 두 사람의 기운이 세서 미아가 될 염려는 없었다.
싸돌아다닌지 오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야, 제도에 봄을 되찾아 주신 영웅 아니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