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58)
159. 검의 제전(2)
#159
“이게 누구야, 제도에 봄을 되찾아 주신 영웅 아니십니까?”
“음?”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청년 하나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험난한 길을 닷새간 헤쳐 오느라 거지꼴이 된 로난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귀족가의 자제 같기는 한데 아무리 뜯어 살펴봐도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옷깃을 바로 세운 청년이 악수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름이 분명···오난 님이셨죠?”
“넌 뭐냐?”
로난은 악수에 응하는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첫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
비단 상한 파스타 같은 얼굴이나 초면부터 이름을 틀리는 무례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검의 제전의 참가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좆밥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일단 너무 약했다. 코어에서 느껴지는 마나량은 기껏해야 소드 익스퍼트 초입 수준이었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화려한 레이피어 또한 전투보다는 의전에 어울리는 물건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은 이 얼뜨기가 여기까지 맨질맨질한 얼굴로 올 수 있던 이유를 눈치챘다. 경무장한 기사 두 명이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아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이 청년의 제복에 자수된 것과 동일했다. 아무래도 가문 소속의 기사 같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오고 싶을까? 로난의 반응을 본 청년이 무안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건 조금 당황스럽군요. 파샤도네 가문의 장남, 알마스 라니작 데 파샤도네입니다. 평민 출신이라는 소문은 사실인 모양이군요.”
“뭐라?”
“아아,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단지 저희 가문의 문장을 못 알아보시는 것이 신기해서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바스인지 뭔지 하는 놈이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 로난이 픽 웃었다. 이건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부류였다. 상대가 공을 세웠건 신분에서 차이가 나면 일단 아래로 깔아 보는.
당장 머리채를 붙잡고 따귀를 세 번 정도 때려주고 싶었지만 일단 뭐라 지껄이는지 듣고 행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로난이 되묻듯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저에게 협조하시지요. 반드시 성지를 밟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엉?”
“저희는 이걸로 세 번째 참가입니다. 매번 간발의 차로 떨어져서 성지에 도달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바로 직전까지는 올라가 본 적은 있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별안간 청년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두터운 쌍커풀이 때려주고 싶을 만큼 부담스러웠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듣자하니 이번 제전은 뭔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파르잔의 원로들이 기묘한 꿈을 꿨다는 게 사실인 것 같더군요. 역대급으로 많은 참가자가 몰린 만큼, 걸러 내는 시험도 굉장히 까다로울 것이 분명합니다.”
“기묘한 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후후, 정보력이 뒤떨어지시는군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지요.”
빈정거리는 것이 코를 뽑아서 입에 넣어 주고 싶었지만, 캐낼 수 있는 정보는 캐내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만 까닥이며 청년이 멋대로 떠들게 내버려 두었다.
“원로들의 시종이 흘린 정보인데, 새하얀 유성 하나가 성지에 추락하는 꿈을 꿨다고 합니다.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검 한 자루가 찬란한 빛을 뿌리며 꽂혀 있었고요. 흥미롭지 않습니까?”
“젠장, 그럼 그까짓 노친네 망상 때문에 이 많은 사람이 모인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일곱 명의 원로가 모두 같은 꿈을 꾸었다면 어떻습니까?”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일곱 명이 같은 꿈을 꾸는 것은 확실히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어떻습니까? 오난 님에게도 결코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보아하니 첫 참가 같은데, 힘을 합치는 게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지요.”
“나를 어떻게 믿고?”
“왜 이러십니까. 겨울의 마녀를 잡을 당시 대마법사 로르혼 님과 버금가는 공적을 세우신 것을 알 사람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 흐르는 불 이타르간드나 로돌란의 심문관들은 그저 거들었을 뿐이고요.”
청년이 음습한 웃음을 흘렸다. 로난의 입매가 뒤틀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생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생각 없으니까 다른 놈이나 알아봐. 슐리펜도 참가한 것 같은데 가서 말해 보던가.”
“꺼져 가는 별을 어찌 오난 님과 비교하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고민 좀 더 해 보시지요.”
청년이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대며 말했다. 로난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 자식이 꺼져 가는 별이라고?”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천재라 칭송받던 것도 어릴 적이지 근래 들어서는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슐리펜 시니반은 그랑시아의 위광에 편승할 뿐인 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은 갑자기 슐리펜을 씹어 대기 시작했다.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실제로 보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칠 것이 뻔한데.
‘내가 할 일을 다 뺏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군.’
아무래도 조용히 수련만 하니 이따위 평가가 나오는 듯했다. 슐리펜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것은 생각해 보면 로난이 회귀한 탓이 컸다. 겨울의 마녀를 비롯한 업적 대다수를 그가 채갔으니까.
‘왜 이렇게 열받지?’
갑자기 짜증이 확 치솟았다. 아무리 그래도 슐리펜이 이런 병신한테 욕을 먹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자식은 재수가 좀 없기는 해도 정말로 괜찮은 놈이었으니까. 심호흡한 로난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렇군···그렇단 말이지.”
“네. 그럼 슬슬 가실까요? 시간이 머지않았습니다.”
청년이 재촉하듯 말했다. 이미 로난을 자신의 기사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로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그런데 너, 실력은 있냐?”
“하하. 오난 님만큼은 아니겠지만요. 그래도 쾌검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
로난은 자연스럽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호위 기사들은 여전히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칼자루에 검지를 올린 로난이 마나를 끌어모았다.
‘안 그래도 얼마나 빨라졌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잘 됐군.’
검집 안에 잠들어 있는 라만차가 붉게 물든 것이 느껴졌다. 기사들뿐만이 아니라 구경꾼 십여 명의 눈도 속여야 했다. 나름대로 유명인사가 된 로난을 알아보고 모인 이들이었다.
“오난 님?”
청년이 로난을 다시 부르는 순간이었다. 그의 손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인지가 불가능한 속도로 그어진 참격이 청년의 몸 주변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수십 가닥의 직선이 그의 상하의 위로 어지러이 새겨졌다.
-파사삭!
“아?”
무언가 이변을 느낀 청년이 눈썹을 으쓱였다. 동시에 그의 옷이 폭발하듯 흩어졌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조각난 옷감을 저 멀리 날려버렸다. 옷이 나비로 변해서 날아오르는 듯한,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허어억?!”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 된 청년이 비명을 터트렸다. 얼마 전에 보았던 나비로제의 알몸과는 달리 추잡하기 짝이 없었다. 가까이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여검사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꺄아악! 벼, 변태다!”
“시, 신성한 검의 제전에 저런 금수 같은 놈이 들어오다니! 경비대!”
이어서 격한 반응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로난이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리운 감각이었다.
“아···아아···!”
다리에 힘이 풀린 청년이 주저앉았다. 호위 기사들의 눈이 튀어나올듯이 커졌다.
“이, 이게 무슨!”
“도련님!”
그들은 로난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반응을 보니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참격도 피부에는 전혀 닿지 않고 정확히 속옷까지만 도륙을 내 놓았다.
‘역시 쾌검을 연마하는 데는 이만한 게 없지. 아직 쓸만하군.’
뿌듯한 결과였다. 마지막에라도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면 선처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제 좀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소란을 등진 로난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차였다. 덜그럭. 그의 발치에 무언가 채였다.
“엉?”
로난이 시선을 내렸다. 화려한 단검 한 자루가 반짝이고 있었다. 칼집에는 청년이 속한 파샤도네 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보조 무기였나 보군.’
바지와 코트가 날아가면서 떨어진 것이 여기까지 굴러온 듯했다. 로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군중의 시선은 모두 비명을 지르는 청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보석으로 장식된 것이 꽤나 비싸 보였다. 낭비된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면 제법 짭짤한 전리품이었다. 능청스레 허리를 숙인 로난이 단검을 주워 안주머니에 넣었다. 역시나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
“도둑.”
“시발.”
···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이 눈을 감은 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녹슨 펌프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엉?”
정확히는 로난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벙찐 채 갸웃거리던 중이었다. 같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이쪽이야.”
“아.”
그제야 로난은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났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시선을 내리자 하얀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웬 쪼끄마한 소녀 한 명이 그의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너는?”
“다 봤어.”
바닥까지 늘어진 새하얀 머리카락은 풍성하다 못해 흘러넘친다는 인상을 주었다. 소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완전히 세워도 정수리가 로난의 명치 부근에 닿는 것이 고작인 단신이었다. 고개를 들어 로난과 눈을 맞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한 짓이지. 저 애 옷을 벗긴 것도.”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시치미 떼지 마. 정확히 23번이었어.”
“뭐가?”
“네가 검을 휘두른 횟수.”
소녀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로난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설마 이토록 정확하게 읽혔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로난이 할 말을 찾아 헤매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린 소녀가 로난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괜찮아. 잘생겼으니까 봐줄게.”
“응?”
“얼굴이 내 취향이거든.”
로난은 벙찐 채 소녀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이나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듯했다. 똘망한 눈동자는 선연한 물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뭐야 얘.’
소녀는 이제 대놓고 로난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손놀림이 끈적한 것이 한두 번 주물러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을 붙잡아 제지한 로난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만 만져 인마.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한다는 뜻이야?”
“응.”
“거 고맙···그만 만지라니까.”
고사리 같은 손은 다시 허벅지 뒤편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로난이 재차 그녀를 제지했다. 소녀가 한쪽 볼을 부풀리며 중얼거렸다.
“닳는 것도 아닌데 쪼잔하기는.”
“이거 싹수가 아주 노란 꼬맹이일세. 쥐톨만한 게 어디 내 동기들이나 할법한 짓을 하고 있어.”
생긴 건 귀여웠는데 하는 짓거리는 만취한 징벌병 동기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소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꼬맹이 아니야. 레이디야.”
“하.”
로난이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남자답다 선언하는 아셀을 보는 기분이었다.
“레이디는 무슨. 많이 쳐 줘봐야 열셋에서 열네 살 안팎이구만.”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아. 그리고 나도 참가자야.”
“뭐라?”
“봐봐. 검.”
그리 말한 소녀가 머리채를 뒤로 묶어 잡았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와 키가 비슷해 보이는 롱소드 한 자루가 비껴 메어져 있었다.
칼자루의 상태를 보니 아주 낡은 검이었다. 다만 검신이 칼집에 감춰져 있어서 정확히 어느 수준의 무기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녀가 손에서 힘을 풀자 롱소드는 다시 머리카락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물었다.
“너 같은 꼬맹이도 검의 제전에 참가할 수 있냐?”
“꼬맹이가 아니라 레이디라니까. 나 이제 갈게.”
“삐졌냐?”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치렁거리는 머리가 한발 늦게 회전했다.
“레이디는 이런 걸로 토라지지 않아. 슬슬 시작할 테니까 너도 얼른 돌아가.”
“어···그래.”
“또 보자.”
그녀가 벙쪄 있는 로난에게 손을 흔들었다. 로난이 다시 소녀를 불러 봤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뭐야 시발.”
소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로난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째 요 며칠간 이상한 꼬맹이들을 많이 만나는 것 같았다.
소녀가 칼을 휘두른 횟수를 맞추는 순간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23번. 남들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 것을 그토록 정확히 헤아리다니. 뒤늦은 전율이 팔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조금 기대되네.’
처음 만난 참가자가 병신이라 검의 제전이라는 행사 자체에 대해 조금 실망할 뻔했는데, 그 허전함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로난은 떠나왔던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