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59)
160. 검의 제전(3)
#160
로난은 떠나왔던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눈치챈 건데 참가자 중에는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스치듯이 힐긋거리는 이도 있었고, 아예 대놓고 꼬나보는 놈도 있었다. 시선에는 저마다의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선망, 경외, 질투···.
역시 그 멍청이가 말했던 것처럼 겨울의 마녀를 퇴치했기 때문일까. 아주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영 부담스러웠다. 로난은 자신을 부모님의 원수라도 된 것처럼 노려보는 사내를 향해 중지를 치켜들었다.
“뭘 봐. 털보 새끼야.”
“히이익···!”
사내가 눈을 내리깔며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다르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물건을 배달하기로 한 자이파도. 물론 원체 사람이 많아서 무리는 아니었다.
로난은 머지않아 광장에 도착했다. 나비로제와 슐리펜은 조금 전의 자리에 그대로 서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참 다리가 무거운 사람들이었다.
“나 왔어요.”
“딱 맞춰서 왔군. 네가 간 방향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던데 무슨 일이 있던 거냐.”
“갑자기 웬 미친놈 하나가 길거리에서 옷을 벗었어요. 속옷까지 홀딱.”
“말세군.”
나비로제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슐리펜도 천천히 주억거렸다. 문득 파샤도네인지 뭔지 하던 놈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로난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 말야, 분발 좀 해야겠다. 내가 너무 많이 뺏어간 거 같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런 게 있어 인마. 필레온에 돌아가는대로 나랑···”
“다들 주목해 주시겠소?”
로난이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잔뜩 쉰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래, 다들 고맙소. 이쪽이오.”
웬 주름 자글자글한 늙은이가 광장 앞의 단상에 올라서 있었다. 기다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비로제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호오···무슨 일이 있기는 한가 보군. 저 늙은이가 직접 나오다니.”
“저게 누군데 그래요?”
“알로긴. 성지와 파르잔을 관리하는 일곱 장로 중 한 명이다. 한때 검성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검사지.”
“이런 시발, 검성이요?”
로난의 눈이 커졌다.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 넘는 이력이었다. 지금은 화살에 맞고 죽어도 자연사로 간주될 것 같은데 말이지. 알로긴이라는 노인이 말을 이었다.
“개최를 무리해서 앞당겼음에도 이리 찾아와 주셔서 고맙소. 산 건너편의 아란 파르잔에도 비슷한 인원이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소. 단언컨대 근 100년간 가장 많은 참가자일 거요. 우리가 그대들을 이렇게 불러 모은 이유는···.”
걸걸하지만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 거칠게 살아온 칼잡이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는 것만 봐도 그의 내공을 알 수 있었다. 침묵하던 알로긴이 입을 뗐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부정하지 않겠소. 나를 비롯한 원로들은 모두 같은 꿈을 꾸었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성검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꿈이었지. 어떠한 부연설명도 없었지만 우리 모두는 그것이 성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알로긴은 기묘한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긴 꼬리를 끌며 성지로 떨어진 유성. 땅에 반쯤 파묻힌 채 빛을 뿌리던 검 한 자루.
청년이 알려 준 정보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군중이 소란스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탁! 알로긴은 검 끝으로 단상을 한 번 찍는 것으로 그들의 이목을 다시 집중시켰다.
“멋진 꿈이었지. 다만 잠에서 깬 우리는 어떤 사실을 깨닫고는 비통함에 빠졌소. 우리 중 누구도 성검에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이었지. 대다수는 광채를 흘리던 성검을 지켜보기만 했고, 만지기 위해 다가간 자는 잠에서 깨어났소.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 우리 늙은이들 중에는 성검을 휘두를 재목이 없었소.”
그리 말하는 알로긴의 목소리에서는 씁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로난은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 온 작자라면 아무리 몸이 노쇠했을지언정 마음만은 불처럼 이글거리기 마련이다.
탁! 알로긴이 다시 검 끝으로 단상을 찍었다. 복장을 맞춰 입은 안내인들이 단상 앞으로 도열했다. 몇 명의 손에는 큼직한 팻말이 하나씩 들려 있었는데, 모두 1부터 4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알로긴이 말했다.
“그럼 첫 번째 시험을 시작하겠소. 모두 자신의 번호에 맞는 안내인을 따라 이동해 주시오.”
팻말을 들지 않은 안내인들이 군중 사이를 오가며 쪽지 한 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두 번 접힌 양피지에도 1부터 4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로난 일행이 동시에 쪽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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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몸담고 있는 집단이 있소?”
“로난. 필레온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어요.”
질문을 들은 로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안내인은 자신이 들고 있는 구슬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사실 알고 있었소. 제도를 겨울에서 구한 영웅을 내가 모를 리가 없지. 관례일 뿐이니 너무 괘념치 말아 주시오.”
“괜찮아요. 고생해요.”
로난은 안내인을 뒤로 하고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제 1투기장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먼젓번에 들어온 사람들이 삼삼오오씩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약해 보이는 놈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칼밥을 먹으며 살아온 놈들이라 그런지 풍기는 기세가 녹록치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로난의 시선이 구석에 혼자 팔짱을 끼고 있는 청년에게 닿았다.
“어이.”
“이제 온 건가.”
슐리펜이 고개를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간 로난이 그의 옆에 기댔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로난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교관님한테도 물어보겠지? 이름이랑 소속이 뭐냐고.”
“아마도 그럴 거다. 예외는 없다고 들었으니.”
“가관이군. 칼밥 먹는 놈들 중에 그 누나를 모르는 자식이 있을까.”
우스운 일이었다. 슐리펜도 동의하듯 주억거렸다. 로난과 그는 4번을, 나비로제는 1번이 적힌 쪽지를 뽑았다. 팻말을 든 안내인들은 그들을 각각 다른 장소로 데려갔다.
워낙에 참가자가 많은 탓에 인원을 쪼개서 시험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시험장에 들어서기 전에 참가자들의 신원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모든 문답은 대상자의 말이 거짓인지를 파악하는 마도구 앞에서 이루어졌고, 조금이라도 마도구가 반응하면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안내인들이 들고 있던 구슬이 그것이었다. 로난이 혀를 내두르며 투덜거렸다.
“거 더럽게 꼼꼼하게 보더만. 왜 번거롭게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마 출입이 금지당한 이들을 막기 위함이겠지.”
“엉? 그런 꼴통들도 있냐?”
“그래. 당장 나비로제 교관님의 바로 전대 검성만 봐도 그렇잖나.”
슐리펜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알로긴도 그렇고, 딱히 이전 세대의 검성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 슐리펜이 눈썹을 으쓱였다.
“폭류검 크로덴. 들어본 적 없나?”
“그런 것 같다.”
“하긴 제국에서 그의 존재 자체를 달갑지 않아 하니 그럴 수도 있지. 강함도 강함이지만 잔혹성으로 악명을 떨치던 자다. 검의 제전에서는 성검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제외한 참가자를 모두 죽였지.”
“순 미친 새끼 아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그 자식의 사례만 들어도 왜 이토록 검사를 꼼꼼하게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슐리펜이 말을 이었다.
“나비로제 님이 본격적으로 명성을 떨친 것도 그 자를 꺾은 뒤부터다. 무려 40년 가까이 검성의 자리에 올라 있었으니까. 검성의 자리에서 추락시킴으로서 죗값을 오롯이 치뤄야 하는 범죄자로 전락시켜 버렸지.”
“멋진 일이군. 그럼 지금은 죽은 거냐? 그 크로덴인지 뭔지 하는 놈.”
“아마 그럴 거다. 제국 기사단의 추격을 받던 끝에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높이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걸 본 것이 마지막 목격담이니까. 만약 지금까지 살아 있더라도 다 죽어가는 노인이 되어 있겠지.”
슐리펜은 그를 제외하고도 검의 제전에 출입이 금지당한 이들을 몇 명 말해 주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았다.
참가자는 계속해서 들어왔다. 네 그룹으로 쪼갰음에도 족히 백 명은 넘어 보였다. 듣자하니 아란 파르잔이라는, 여기와 똑같이 집결지 역할을 하는 마을이 하나 더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에는 몇 명이나 모여들지가 궁금했다. 그가 칼을 꺼내 닦아 주려던 차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앗, 잘생긴 엉덩이.”
“음?”
로난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에 봤던 백발의 소녀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사자 같은 머리카락 위로 낡은 칼자루가 삐죽 솟아 있었다.
“너는···!”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로난과 슐리펜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소녀가 만족스레 끄덕거렸다.
“역시 잘생긴 애는 친구도 잘생겼네. 마음에 들어.”
“너···진짜 참가자였냐?”
“그렇다고 말했잖아. 나는 거짓말 안 해.”
뭐 그런 걸 물어 보냐는 듯한 말투였다.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 보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누구지.”
“나도 몰라. 아까 만났던 이상한 변태야.”
“말이 심하네. 기껏 첫 번째 시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려 했더니.”
소녀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첫 번째 시험이라는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눈썹을 치켜떴다. 로난이 말했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여기가 처음이 아니니까. 그런데 사실 첫 번째 시험은 별 게 없어. 칼 휘두를 자격도 없는 바보들을 걸러 내기 위한 시험이라 엄청 단순하거든. 기껏해야 단단한 돌을 쪼개는 정도일걸.”
소녀는 투기장 곳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돌이 놓아진다는 위치였다. 마치 해가 뜨는 방향을 알려주듯 확신에 찬 말투였다.
“···진짜냐?”
“나는 거짓말 안 한다니까. 저번에도 저저번에도 첫 번째 시험은 돌 쪼개기였어. 마침 저기 오네.”
두 사람은 소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안내인들보다 조금 더 잘 차려입은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박수를 치는 것으로 참가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짝! 모두의 시선이 사내에게 집중되었다.
“다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첫 번째 시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다리다 지쳤다는 것을 아는지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었다. 그가 참가자들을 쭉 둘러보며 입을 뗐다.
“여기 모인 분들은 정확히 백 명입니다. 다들 무기를 하나씩은 소지하고 계시니 적어도 백 개 이상의 무구가 존재하겠지요. 이 무기들의 개수를 열 개로 줄여 주시면 됩니다.”
“뭐라?”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검의 제전의 유구한 전통에 따라 유혈사태는 제지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수를 써서든, 마지막에 남은 무기가 열 개 이하면 됩니다.”
소녀의 말과는 전혀 달랐다. 쉽기는 커녕 피가 흥건하게 튀길 것이 분명한 시험이었다. 로난과 슐리펜이 동시에 소녀를 내려보았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가끔은 예외도 있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