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60)
161. 검의 제전(4)
#161
“······가끔은 예외도 있는 법이지.”
“야. 눈 돌리지 마.”
“콜록콜록, 파르잔의 늙은이들이 급하기는 한가 보네. 이런 과격한 시험을 초장부터 치다니.”
갑자기 소녀가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혈색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더 이상의 추궁을 피하려는 비열한 술수였다.
그건 그렇고 제법 참신한 규칙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무기의 개수로 탈락자를 가려내다니. 신원을 조회할 때 소지한 무기를 모두 꺼내게 해서 확인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안내인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무기의 개수를 줄이는 법은 간단합니다. 직접 파괴해서 못 쓰게 만들거나, 저희가 마련한 용광로에 넣어 주십시오. 마지막까지 남는 무기들의 소유권은 최종 소지자의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뭐라?”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충격적인 규칙이었다. 검의 제전까지 올 정도의 인재들이라면 무기도 제법 좋은 걸 들 텐데, 그걸 합법적으로 노획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들불 같은 혼란이 참가자들 사이로 번져 나갔다.
“제, 젠장. 저리 비켜!”
“그런 눈빛으로 내 검을 쳐다보지 마라, 이 사냥개 같은 놈들!”
무자비했지만 천재적인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제대로 된 놈들만 골라낼 생각인 듯했다. 이제 참가자들은 자신의 무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해 싸워야 했다.
참가자 대부분은 기겁하며 거리를 벌렸으나 오히려 두세 명씩 뭉치는 이들도 있었다. 아마도 미리 말을 맞춰뒀겠지. 저런 걸 내버려 두는 걸 보면 은근히 규정이 관대한 면이 있었다.
“거기 형씨, 질문이 있수다.”
그때 양쪽 팔이 문신으로 뒤덮인 사내가 손을 들었다. 인상만큼이나 우악스러운 손도끼가 양쪽 허리춤에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안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하시죠.”
“유혈사태를 제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가 이 행사는 처음이라 어디까지 허용되는지가 궁금하거든. 혹시 말이지···.”
말꼬리를 끌던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번들거리는 눈빛은 무언가를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몇몇 참가자가 쑥덕거리는 소리가 로난의 귀를 간질였다.
“맙소사. 해골 수집가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저 미친놈이랑 같은 조야···!”
재미있는 별명이 붙어 있는 걸 보니 꽤 유명한 놈인 듯했다. 도끼로 머리를 따서 술잔을 만든다거나 잔악무도한 도적 출신이라는 지엽적인 정보가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천천히 미끄러지던 사내의 시선은 아직도 꾀병을 부리고 있는 자칭 레이디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드리웠다.
“죽여도 되는 건가?”
“불가피한 상황이라면요. 다만 기권한 상대방을 공격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흐흐, 그거 참 마음에 드는군.”
사실상 규칙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클클거렸다. 어느새 그의 주위는 텅 비어 있었다. 뒤늦게 사내와 눈이 마주친 소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뭘 봐. 못생긴 게.”
“흐흐흐···.”
웃음을 흘리던 사내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정말 못생겼다며 반복해서 궁시렁거리던 소녀는 로난과 슐리펜을 번갈아서 쳐다보고 나서야 표정을 풀었다. 답변을 마친 안내인이 다시 참가자들을 바라보았다.
“혹시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실까요?”
죽음이 언급되서 그런지 조금 전과는 말의 무게가 다르게 들렸다. 유약해 보이는 청년 하나가 손을 들며 질문했다. 입고 있는 갑옷에 비해 지나치게 좋아 보이는 검 한 자루가 그의 허리춤에서 덜그럭거리고 있었다.
“기, 기권하고 싶습니다. 지금 가능합니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시험이 시작되고 무기를 직접 파괴한 참가자만이 기권할 수 있습니다. 피와 철을 바치는 검의 제전에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임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럴 수가···!”
피를 흘려 가면서 싸우거나 무기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마지막까지 싸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청년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가느다란 다리가 갓 태어난 사슴처럼 후들거리고 있었다.
“후후, 칼 좋은데 꼬마.”
“용광로까지 갈 수 있을 거 같지?”
로난은 몇몇 참가자들이 음흉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것을 확인했다. 아마 기권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듯했다. 슐리펜이 언짢은 듯 눈썹을 찌푸렸다.
“추잡하군.”
청년의 질문을 마지막으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시금 손뼉을 쳐서 주의를 끈 안내인이 큰 소리로 공지했다.
“더 이상의 질문은 없는 것 같군요. 남은 무기가 열 개가 되는 순간 시험을 종료하겠습니다. 신원을 조회할 당시 제출하신 무기에 식별 마법을 걸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참가자는 탈락 처리 됩니다.”
마지막 공지를 마친 안내인이 손짓했다. 동일한 제복을 차려입은 진행 위원들이 투기장의 관객석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위원들의 손에는 석궁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규칙을 위반하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한 도구였다.
“다들 비키시오!”
“빠지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뼈도 못 추릴 테니까.”
이어서 투기장 한쪽에 난 대문이 열리며 바퀴 달린 가마솥이 등장했다. 두터운 장갑을 낀 위원들이 솥을 밀고 있었다. 코끼리도 집어 넣을 만큼 거대한 솥 안쪽에서는 쇳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위원들은 가마솥을 투기장 정중앙에 배치한 뒤 물러났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대문이 닫혔다. 열댓 명의 위원들이 일제히 뿔나팔을 불었다. 부우우우! 요란한 소리가 투기장 전역에 울려 퍼졌다. 가장 먼저 적막을 깬 것은 기권 여부를 물어봤던 청년이었다.
“흐아아악! 오, 오지 마! 기권할 거야!”
그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가마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청년을 주시하고 있던 참가자들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거기 서라, 겁쟁아!”
“칼은 이리 주고 가!”
제각기 다른 날붙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추격자들의 목소리가 광기에 젖어 있는 걸 보니 칼을 빼앗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사실 살인이 허용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예상한 일이었다. 피 맛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아하하, 꼬마야, 그 정도 각오도 안 되어 있으면 오지 말았어야지!”
그때 추격자 중 한 명이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마나로 각력을 강화했는지 도약한 높이가 말도 안 되게 높았다. 천옷으로 경무장을 한 여인의 손에는 발톱처럼 휘어진 단검 한 자루가 반짝이고 있었다.
쉬이익! 화려하게 제비를 돈 그녀가 청년을 향해 낙하했다. 꼭 먹잇감을 향해 강하하는 매를 연상케 했다. 청년과의 거리가 3m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불현듯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여인 앞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쉬릭!
“어?”
이변을 느낀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부러진 검신 위로 가느다란 선 하나가 그어졌다. 단검이 청년의 등을 찢어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푹! 선을 따라 반으로 쪼개진 검신이 튀어 오르며 그녀의 오른쪽 눈을 파고들었다.
“꺄아아아악!”
콰득! 균형을 잃은 여인이 머리부터 바닥에 추락했다.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움찔거리던 여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너, 너는···!”
추격자들이 황급히 멈춰섰다. 저벅저벅 걸어온 청년 하나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묵묵히 검을 들어올린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기권자를 내버려 둬라.”
“제, 제국의 샛별···!”
평온하면서도 무거운 목소리는 한바탕 뇌우가 쏟아지기 전의 바다를 연상케 했다. 폭풍을 담은 오러가 푸르스름한 검신을 타고 일렁이고 있었다. 기세에 압도당한 추격자들이 뒷걸음질쳤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우라질, 어떻게 되어 먹은 대진운이야···!”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왜 이 사람의 존재를 잊고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때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던 청년이 마침내 가마솥에 검을 던져 넣었다. 치이이익! 시뻘건 쇳물이 검을 흔적도 없이 삼켜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청년이 처절하게 소리쳤다.
“흐아아악! 기, 기권이요! 기권합니다!”
“참가번호 34번 기권 확인되었습니다. 퇴장해 주십시오.”
모르는 새 번호도 매긴 모양이었다. 투기장 구석에 나 있는 쪽문이 열렸다. 청년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울면서 퇴장했다. 석궁을 든 위원들이 다른 참가자들이 그를 공격하는 것을 제지했다. 별안간 슐리펜에게 가로막힌 추격자 중 한 명이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이, 이봐. 우리 이러지 말고 같은 편을 하는 건 어때. 너라면 이미 통과는 확정이잖아. 우리가 좋은 무기를 가진 놈들을 찾아올 테니 너는···흐아악!”
슐리펜은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어닥침과 동시에 추격자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단번에 토막났다. 단창과 롱소드, 철퇴였던 토막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추격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허어어억···!”
“계속 할 건가.”
슐리펜이 말했다. 이제 그들이 더 싸우기 위해서는 남의 무기를 빼앗아야 했다. 서로 눈치를 보던 추격자들이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로난이 픽 웃었다.
“오지랖은.”
하여튼 고결한 놈이었다. 저런 부류가 민중에게 귀족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하는 거겠지. 의지가 꺾인 추격자들이 조용히 쪽문으로 퇴장했다. 로난과 나란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녀가 입을 동그랗게 말며 감탄했다.
“호오···네 잘생긴 친구도 제법인데.”
“괜찮은 놈이지. 뭐야, 저 자식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어?”
“응. 세상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소녀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인생 다 산 노친네들이나 할만한 소리였다. 하긴 나도 폭류검이 누군지 몰랐었지. 그리 중얼거린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저건 내 기술인데 그새 베꼈네. 재수 없는 자식.”
다인하르를 여행할 때 몇 번 보여준 것이 고작인데 그걸 또 배운 모양이었다. 이래서 천재라는 족속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현듯 스산한 감촉을 느낀 로난이 시선을 내렸다. 은근슬쩍 손을 뻗은 소녀가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으음···고민되네. 이쪽이 더 탄탄할 것 같기는 한데.”
“손 안 치워?”
“쯧, 치사하긴.”
혀를 찬 소녀가 손을 내렸다. 하여튼 조금이라도 방심할 수 없었다. 슐리펜은 기권할 권리를 지키는 수호자라도 된 마냥 가마솥 앞에 자리를 잡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칼을 납도함으로서 선공을 당하지 않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내비쳤다. 그제야 눈치를 보던 참가자들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더 이상의 기권자는 없었다. 대치 구도가 하나둘씩 무너지며 난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