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61)
162. 검의 제전(5)
#162
더 이상의 기권자는 없었다. 대치 구도가 하나둘씩 무너지며 난전이 시작되었다.
“더, 덤벼랏!”
“추악한 놈들! 신성한 검의 제전이 노략질을 위한 자리인 줄 아느냐!”
“시끄럽다! 너 그 폴암 좋아 보이는데!”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 똑똑하거나 약한 놈들은 벽을 등진 채 싸웠고 강하거나 멍청한 놈들은 대놓고 한복판에 뛰어든 뒤 창칼을 휘둘렀다. 함성과 비명, 쇠 부딪히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검기가 투기장 허공을 가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따금 뿌려지는 핏물이 달아오른 공기를 식혔다.
‘역시 첫 번째 시험이라 그런지 어중떠중이가 대부분이군.’
잘려나간 손목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무기를 노리고 베다가 실수한 건지, 원래 손목을 노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로난은 턱을 매만지며 그들을 관전했다.
겨울 마녀를 해치웠다는 명성 때문인지 덤벼드는 놈이 없었다. 곳곳에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지만 그는 슐리펜과는 달리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공명심을 느끼지 못했다.
‘지들이 원해서 온 건데 뭘. 수가 줄어들면 나야 좋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욕망을 심장 삼아 움직이는 놈들이었다. 목숨보다 우선시되는 욕망에 우열 따위는 없었다. 남의 무기를 탐해서 싸우나 성검의 주인이 되기 위해 싸우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다.
사실 청년의 등에 칼을 박으려던 여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칼을 휘두르기 위해 온 주제에 그 정도의 각오도 없으면 곤란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로난의 뇌리를 스쳤다. 그가 소녀를 내려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는 안 도망치냐?”
“내가 왜 도망을 쳐?”
“내가 니 검을 부러뜨리면 어쩌려고. 딱 보니까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거 같은데.”
“안 그럴 거잖아. 그 정도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 너는 착해.”
“허.”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인 모양이었다. 괘씸해서라도 이 어린 변태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막 칼자루에 손을 얹는 순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요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하하하! 아가씨, 이리 와!”
“뭐야?”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해골 수집간지 뭔지 하는 놈이 소녀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 쥐어진 두 개의 손도끼가 섬뜩한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제법인데.’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마나의 격을 보아 하니 상당한 실력자였다. 벌써 몇 명 해치운 모양인지 잘 갈아진 도낏날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소녀가 혀를 빼물며 질색했다.
“으엑. 역시 못생겼어.”
“아가씨라 존대해 주는데 가서 말이라도 들어 봐.”
“너 미쳤어? 혹시 못생겼어도 내면이 훌륭하면 괜찮다고 자위하는 유형이야?”
“경우에 따라 다르지.”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간격이 빠르게 좁혀지고 있음에도 소녀는 긴장한 기색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달아나거나 싸울 채비를 갖출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자신의 추잡한 외모지상주의적 지론을 설파하는 데 낭비하고 있었다.
“물론 내면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나 정도 되는 레이디를 모시려면 당연히 마음씨도 고와야지. 하지만 첫 번째는 누가 뭐래도 얼굴이야. 너나 네 친구처럼 다리 길고 엉덩이도 탄탄하면 더할 나위···”
“간만에 도끼를 어린 피로 적셔야겠다!”
“아으. 시끄러워.”
해골 사냥꾼이 다시금 포효했다. 한숨을 폭 내쉰 소녀가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머리카락 사이로 삐져나와 있는 칼자루를 움켜잡고 당기자 강철이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길쭉한 롱 소드가 뽑혀 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에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제법 쓸만하지.”
어떠냐는 듯이 칼을 한 바퀴 휘둘러 잡은 소녀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벙쪄 있던 로난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낡은 거 아니냐?”
확실히 좋아 보이는 검이었다. 한 오백 년 전쯤에는.
롱소드의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날이 듬성듬성 나가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단풍이 든 것처럼 녹이 슬어 있었다. 어디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건가? 로난의 표정을 본 소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뭘 모르는구나. 중요한 건 휘두르는 사람이지, 검이 아냐.”
“그건 나도 좋아하는 말이기는 한데.”
“됐어. 잘 봐.”
그 말과 함께 소녀가 달려나갔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도저히 인간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뿐한 몸놀림이었다. 해골 수집가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뭐, 뭐야?!”
과연 해골 수집가는 실력자였다. 일단 소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감지했다는 것만으로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문득 로난은 그녀가 군중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쾌검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정말 실력자였던 거야?’
탓! 순식간에 사내의 눈앞까지 도달한 소녀가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꼭 바람으로 이루어진 토끼가 도약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겁한 사내가 황급히 도끼를 교차하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우아아아악!! 저, 저리 가라!”
“잘 가.”
소녀의 몸이 공중에서 회전했다. 풍성한 백발이 그녀를 휘감았다. 몸을 축 삼아 회전하는 검로는 구원자의 검술에도 밀리지 않을 만큼 완벽했다. 로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며 환호했다.
그래, 사실 저 검도 생긴 것만 후질 뿐이지 엄청난 명검일지도 몰라! 부드럽게 바람을 가르며 나아간 칼날이 도끼에 닿는 순간이었다. 카장창! 소녀의 롱소드가 유리잔이라도 된 것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어라.”
“흐어···어?”
후두둑. 수백 개로 나뉜 칼 토막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녀가 뒤따라 착지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칼자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해골 수집가가 격분하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이 망할 꼬맹이가 장난하는 거냐! 뒈져라!”
“아.”
도끼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소녀가 뒤늦게 몸을 돌렸지만 도끼날은 이미 그녀의 정수리 부근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체념한 듯 눈을 감는 순간이었다. 서걱! 사내의 머리가 목울대를 중심으로 몸과 분리되었다.
“···아?”
해골 수집가의 입이 벌어졌다. 허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한달음에 도약해온 로난이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쾅! 머리 없는 몸뚱이가 거칠게 튕겨 나갔다.
높게 솟구친 그의 머리통은 포물선을 그리며 가마솥 안쪽으로 떨어졌다. 풍덩! 펄펄 끓어오르는 쇳물 속으로 가라앉은 머리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가뿐하게 착지한 로난이 소녀를 내려보며 말했다.
“얌마, 휘두르는 사람이 뭐가 어째?”
“네 선함을 믿고 있었어.”
소녀가 태연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겁에 질리거나 반성하는 기색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탄식했다.
“햐. 이거 진짜 안 되겠네. 이제 무기도 없는데 뭘 어쩌려···”
“크아아악! 죽어라!”
그가 뭐라 한마디를 하려는 차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열댓 명의 참가자들이 동시에 고함을 내지르며 로난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로난이 소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발, 갑자기 뭐야?”
“숨 막혀.”
옷깃에 목이 졸린 소녀가 켁켁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방금까지 다른 상대와 싸우던 놈들마저 등을 돌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무기를 치켜들고 돌진해 오는 참가자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초점이 없었다.
‘좀 의도적인데.’
로난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아무리 난전이 심력을 소모한다고 해도 잘 싸우던 놈들이 전조도 없이 이러는 건 이상했다.
‘이건···.’
그는 머지않아 수상한 마나의 기류가 투기장 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눈치챘다. 불그스름한 흐름은 냇물처럼 참가자들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자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의 마나가 아니었다. 그때 겁에 질린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사내 한 명이 수상한 마나를 들이마셨다. 정확히 삼 초가 지나는 시점이었다.
“크아아아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내가 로난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눈동자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초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결론을 도출해낸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오러. 아니면 무기의 효과군. 그런데 왜 하필 나야.’
참가자 중 누군가의 능력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다만 워낙에 투기장이 난장판이라 시전자를 찾을 수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씨발.”
이렇게 된 이상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도 이상한 마나는 점점 광인의 수를 늘리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소녀가 로난에게 물었다.
“많다. 너도 네 친구 같은 거 할 수 있어?”
“아니.”
“그럼 어떻게 하게? 다 죽일 거야?”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자세를 낮췄다. 조금 큰 기술을 사용할 때 취하는 자세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마침 이런 상황에서 시험해보고 싶었던 기술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되려나 모르겠네.’
다만 로난이 생각하기에도 어려운 기술이라 문제였다. 까딱해서 실수라도 했다가는 스무 명 남짓 되는 참가자들이 전부 죽거나 병신이 될 터였다. 물론 로난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실전을 통해 기술의 정밀함을 연마하는 것이 목적인 만큼 한 번에 되는 것이 가장 좋았다. 광인이 된 참가자들은 어느새 열 걸음 안쪽까지 다가와 있었다. 로난이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네는 싹 다 탈락이다. 이 병신들아.”
로난이 정신을 집중했다. 코어에서 발현된 마나가 라만차를 붉게 물들였다. 눈이 아릴 정도로 선명한 선홍빛에 소녀와 주변의 참가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참가자가 다섯 걸음 안쪽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지금.’
로난의 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투기장 한복판에 붉은 초승달이 그려졌다. 검로를 따라 발현된 검기가 물보라처럼 뿌려졌다. 검기를 액체화하는 라만차의 능력이었다.
다만 평소에 로난이 사용하던 것과는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검기는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를 향해서만 날아가고 있었다. 정확히 스물네 개의 붉은 물방울이 사람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마솥 앞에서 그를 지켜보던 슐리펜이 헛웃음을 쳤다.
“거기까지 간 건가.”
응어리진 예기는 참가자들의 손가락조차 건들지 않았다. 호를 그린 라만차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검기와 날붙이들이 거칠게 충돌했다. 콰광! 쾅! 작은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사방에서 금속 파편이 흩날렸다. 꼭 강철로 된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모습에 진행 위원들이 일제히 감탄을 터트렸다. 가만히 로난에게 붙어 있던 소녀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와.”
동시에 곳곳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산한 파편이 참가자들의 몸에 박힌 탓이었다.
“끄하아아아악! 아아악!”
“어, 얼굴! 내 얼굴이!”
극적인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몸에 깃들어 있던 광기가 사라진 것 같았다. 역시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는 충격 요법만 한 게 없었다. 참가자들은 거의 동시에 쓰러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기술이 성공한 것을 확인한 로난이 히죽 웃었다.
“그럼 이제···.”
하지만 그의 눈매는 머지않아 가늘게 좁혀졌다. 이따위 짓을 벌인 놈을 찾아서 족쳐야 했다. 로난이 수색을 위해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부우우우! 투기장을 둘러싼 관중석에서 다시금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규칙을 공지했던 안내인이 투기장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모두 멈추세요! 현시점에서 남아 있는 무기는 열 개입니다. 1차 시험을 종료하겠습니다!”
“뭐라?”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제야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투기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은 그를 포함하여 일곱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