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62)
163. 검의 제전(6)
#163
1차 시험이 종료되었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죽거나 다친 이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 의식이 있는 자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가 투기장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윽···파, 팔이···.”
“꺼흑, 천벌을 받을 놈들···! 가문의 보검을 쇳물에 처넣다니···!”
“흐아아악! 아파! 살려줘!”
이윽고 대문이 열리며 진행 위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난장판이 된 투기장을 돌아다니며 사상자를 부축하거나 들것에 실었다.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은 로난을 포함하여 일곱 명뿐이었다. 투기장으로 뛰어든 안내인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합격자를 확인해야 하니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무기를 모두 꺼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인은 투기장을 돌아다니며 무기의 소지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슐리펜의 검이 온전한 것을 확인한 안내인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기권자를 지키는 모습 잘 봤습니다. 신분이나 지위 따위는 의미를 잃는 파르잔이지만, 그대의 고결함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게 옳았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합격입니다. 제국의 샛별이여.”
안내인은 정중하게 묵례를 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문득 로난은 서 있는 사내 중 한 명이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어캣이라도 된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젠장!”
그의 발치에는 끝 부분이 부러진 브로드 소드 한 자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내가 막 칼자루를 쥐려는 순간이었다. 푹! 관중석에서 날아온 쇠뇌 한 발이 사내의 엄지 발가락 앞에 박혔다.
“흐악!”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사내가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조금만 더 움직였어도 다리병신이 되었을 터였다. 안내인이 엄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지금 와서 주워 봐도 소용없습니다. 열 개의 무기는 이미 정해졌으니까요. 빛을 발하고 있는 무기만이 온전하다 인정받는 무기입니다.”
“···빌어먹을.”
“나머지는 전부 파손으로 간주되어 측정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저희가 정리할 테니 그대로 내버려 두시면 됩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사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보아하니 어찌어찌 마지막까지 몸을 건사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무기를 챙기지 못한 것 같았다. 곧이어 달려온 진행 위원이 그가 집어 들려 했던 브로드 소드를 챙겼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빛?”
그는 라만차와 이미르를 슬쩍 뽑아서 살펴보았다. 과연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은은한 청빛이 검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식별 마법의 일환인 모양이었다.
“에잇! 쓸모없기는!”
그때 남아 있던 참가자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메이스를 내던졌다. 금이 덕지덕지 간 쇳덩이는 빛을 뿜고 있지 않았다. 안타까운 불합격.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다섯 명 뿐이었다.
‘저 둘 중 하나가 개짓거리를 한 놈이겠군.’
소녀와 슐리펜을 제외하면 사실상 남은 용의자는 두 명이었다. 이 중에 사람들을 광분시켜 로난을 공격하게 한 개새끼가 있다. 한 명은 전신 갑옷을 입은 여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장창을 들고 있는 노인이었다.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둘 다 칼밥을 제법 오랫동안 먹어온 듯 했다.
‘기묘하군. 조금이라도 기척이 느껴질 만 한데.’
헌데 뭔가 이상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들을 살피던 로난이 입매를 비틀었다. 두 사람에게서는 참가자들을 광기에 빠뜨리던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헷갈릴 만한 기운도 아니었는데 유령이 곡을 할 노릇이었다. 그때 차례대로 무기를 검사하던 안내인이 로난의 앞에 멈춰 섰다.
“참가번호 44번.”
“아, 여기요.”
로난은 반짝거리는 라만차와 이미르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두 자루 모두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안내인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 제도에 기거하고 있어 당신의 명성은 잘 알고 있지요. 놀라운 기량의 검사라 들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별 거 아니었어요.”
“겸손하지 않아도 될 실력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그건 제가 파르잔에서 일한 10년 동안 본 것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술이었어요.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고 스물 네 개의 무기를 부수다니···도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로난이 마지막에 뿌린 물보라 검기의 이야기였다. 그건 로난으로서도 처음 성공한 것이었으니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로난은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내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본 사람처럼 감격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디 파르잔의 정상에서 원하는 바를 이뤘으면 좋겠군요. 합격입니다.”
“고마워요.”
“성검이 그대를 축복하기를. 그럼 다음은···.”
로난에게 합격 판정을 내린 안내인이 시선을 내렸다. 흰 머리의 소녀는 여전히 로난의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아.”
불현듯 로난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재생되었다. 기세 좋게 도끼날과 충돌한 소녀의 롱소드가 산산조각나는 장면이었다. 맞아. 이 꼬맹이는 무기가 없었지. 다급하게 소녀를 내려본 그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얌마, 너···”
“참가번호 72번. 무기 소지 확인했습니다. 합격입니다.”
소녀의 합격을 인정한 안내인이 자리를 떴다. 소녀는 손을 슬쩍 흔들어 주는 것으로 고생하라는 뜻을 표했다. 로난의 미간이 급격하게 좁혀졌다.
“···엉?”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낡아빠진 검신이 박살 나며 울려 퍼지던 금속음이 아직도 귀에 선했다. 그 롱소드 화석은 도론의 할아버지가 와도 복구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됐을 터였다.
‘내가 치매에 걸린 건가?’
로난이 스스로의 정신 상태를 염려하던 와중이었다. 소녀가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사리 같은 손에는 어디서 많이 본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것이 전투보다는 의전에 적합할 것 같은 물건이었다.
“야.”
“응?”
“너 그거 어디서 났냐?”
로난이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을 치던 그녀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주웠어.”
“그러니까 어디서?”
“네 안주머니 속에서.”
소녀가 뻔뻔스레 대답했다. 담담한 목소리에서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난은 말없이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과연 있어야 할 단검이 존재하지 않았다. 소녀가 말했다.
“이해해 줘. 더 올라가고 싶어졌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바보 같은 행사에 흥미가 생겼다는 이야기야. 매번 중간에 그만뒀는데 처음으로 정상까지 가 보고 싶어졌어. 아니다, 행사가 아니라 너랑 네 친구에게 흥미가 생겼다는 말이 옳으려나···.”
불현듯 소녀가 로난에게 머리를 기댔다.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로난은 딱히 그녀를 추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부수적인 수입 느낌으로 주워 온 단검이었거니와 그 또한 내심 소녀가 합격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만 제대로 갖춰지면 꽤 강할 것 같은데.’
로난은 소녀가 싸우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칼이 박살나는 바람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몸놀림이나 자세만 보면 지금까지 보아온 검사들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훌륭했다. 그때 무기의 현황을 파악하던 안내인이 손을 들며 외쳤다.
“혹시 무기를 더 소지하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갑자기 왜 저래?”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소리에 당혹이 묻어나 있는 걸로 보아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진행 위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상하다. 한 자루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군요. 왜 아홉 개뿐이지?”
안내인은 무기 하나가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혹시나 싶어 가마솥 안쪽도 휘저어 봤지만 시뻘건 쇳물만이 막대기에 묻어 나올 뿐이었다. 그때 투기장 한구석에서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있소.”
“뭐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소···누가 좀···.”
투기장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사상자 무더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황급히 달려간 진행 위원들이 겹친 채 널브러진 사람들을 수습했다. 머지않아 가장 아래쪽에서 두건을 쓴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원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세상에, 계속 여기 있었던 거요?”
“하하···고맙소. 몸을 꼼짝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
두건을 쓴 사내가 끌끌거렸다. 온몸이 피와 상처로 뒤덮인 것이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완전히 탈진해 버렸는지 가만히 누워서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안내인이 그의 앞에 섰다.
“참가번호 3번. 괜찮으십니까? 상태가 너무 안 좋으시다면 기권해도 됩니다.”
“괜찮소. 조금 쉬면 나아질 거요.”
“다행이군요. 혹 온전한 무기를 소지하고 계십니까?”
“온전한 무기? 아아, 그래···내가 가지고 있지.”
불현듯 누워 있던 사내가 자신의 허리 아래로 팔을 집어넣었다. 다시 빠져나온 손에는 짤막한 곡도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국적인 형태의 검이었다. 온전함을 보증하는 푸른 빛 무리가 검신을 휘감고 있었다.
“···확인했습니다. 합격입니다.”
“크흐흐, 고맙소. 이제 나를 좀 옮겨 주겠소? 팔은 그럭저럭 움직이는데 도저히 일어서지를 못하겠군.”
사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위원들이 그를 들것에 실었다. 사내는 다른 부상자들과 함께 투기장의 바깥으로 옮겨졌다.
그가 들것에 실린 채 이동하던 와중이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사내가 히죽 웃었다. 저딴 몰골을 하고도 웃음이 나온다니. 긍정적인 면모에 감복한 로난이 손이라도 흔들어 주려던 찰나였다.
“너···.”
“으음? 왜 그러나?”
로난의 눈이 커졌다. 눈에 익은 마나가 사내의 가슴 위로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참가자들을 광인으로 만들던 불그스름한 기류였다. 말없이 웃음만 흘리던 그가 입을 뗐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내가 좀 상태가 안 좋아서 말이지···나중에 봅세, 젊은 친구.”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내는 의식을 잃었다. 피 묻은 손이 들것 아래로 축 늘어지자 가슴 위로 피어나던 마나가 사그라졌다. 사내를 호송하던 위원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뭐야, 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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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험은 이틀 뒤의 저녁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전까지 참가자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자유롭게 훈련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통과한 합격자들은 마을을 떠나 산 위에 있는 거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정상에 위치한 성지와 가까워지는 방식이었다. 다행히도 첫 번째 거점까지는 길이 아주 잘 닦여 있어서 몸이 지쳤음에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었다.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바람이 차가웠다. 노을이 저물어 가는 하늘 저 높이 새털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을 안내하던 길잡이가 합격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겨우 여섯 명만 합격했다니, 이렇게 적게 살아남은 조도 오랜만에 보는군요. 굉장히 치열하게 싸우셨나 봅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새하얀 김이 뭉게뭉게 올라오고 있었다. 바로 뒤에서 그를 따라가던 로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렇죠. 우리가 가장 합격률이 낮나요?”
“어···그건 아닐 겁니다. 산 너머의 아란 파르잔에는 더 적게 합격한 조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여섯 명보다 더? 몇 명이길래?”
“한 명입니다. 혼자서만 합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