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63)
164. 검의 제전(7)
#164
“혼자서만 합격했다고요?”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제법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여섯 명도 매우 적다고 생각했는데. 헛웃음을 친 그가 길잡이에게 물었다.
“젠장,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소식을 전해준 친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더군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던 모양입니다.”
길잡이가 혀를 찼다. 로난이 몇 번을 더 되물어 봤지만 그는 자기도 모른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추궁할만한 거리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자들이 이틀간 지낼 거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에서 중요한 건물만 뽑아 세워 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로난과 슐리펜, 그리고 소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식당으로 이동했다. 오늘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에 뱃가죽이 등에 붙을 것 같았다.
식당은 거점의 다른 건물처럼 통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길잡이의 말에 따르면 멧돼지 구이와 맥주를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다는데 아주 바람직한 식당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온기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훅 풍겨왔다. 널찍한 건물 안에는 이미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와서 식사하고 있었다. 한껏 들뜬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다른 조의 합격자들인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의 시선이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얼씨구.”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나비로제가 식탁 앞에 앉아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섯 명이 앉는 식탁에다 채광이 좋은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2m에 육박하는 대태도 우루사만이 비스듬히 기대진 채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왜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지 알 것만 같았다. 손을 말아 입가로 가져다 댄 로난이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나비로제 교관님!”
“···지금 온 건가.”
나비로제가 고개를 들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허기가 진 것은 마찬가지라 조금 야위어 보이기는 했지만. 불현듯 그녀를 본 소녀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우아, 크다.”
“으응?”
나비로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자신을 보고 말한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로난의 옷깃을 내팽개친 그녀가 나비로제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를 올려 보며 말했다.
“안아 줘.”
“잠깐, 너는 도대체···.”
나비로제가 당황한 기색을 비췄지만 소녀는 막무가내였다. 토끼처럼 폴짝 뛰어오른 그녀가 나비로제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소녀가 나비로제의 품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본 로난이 주먹을 움켜쥐며 경악했다.
“저런, 경우도 없는···!”
“푹신해.”
소녀는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나비로제의 가슴에 얼굴을 부벼 대기 시작했다. 역시나 어리광이라 치부하기에는 심도가 깊은 동작이었다. 벙쪄 있던 나비로제가 로난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난. 이 아이는 뭐지?”
“아이의 가죽을 뒤집어쓴 변태에요. 서둘러 퇴치해야 해요.”
“으음···?”
로난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올라왔다. 저 요사스러운 계집애도 밉고, 진심으로 그녀를 질투하고 있는 자신도 미웠다.
‘시발. 부럽다.’
저 셔츠 안쪽에 어떤 흉악한 것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 부러웠다. 철없는 아이의 어리광이라 생각하는지, 아니면 여자들에게는 저런 것이 익숙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비로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되려 귀엽다는 듯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똥 같은 인생. 나도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로난의 답변을 들은 나비로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농담하지 말고. 둘이 꽤 친해 보이던데.”
“어···그러니까 저랑 같은 참가자인데···.”
로난이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니 만난 뒤로 이름을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로난은 음미하듯 얼굴을 파묻고 있는 소녀의 등을 콕콕 찔렀다.
“야, 그러고 보니까 너 이름이 뭐냐?”
“쯧, 뭐야?”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묘하게 신경질적인 것이 한창 재미 보고 있는데 왜 방해하냐는 듯한 태도였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린.”
“짧네. 성 같은 건 없어?”
“없어. 너는 나중에 귀여워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미친년.”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만났을 때부터 한결 같은 계집애였다. 그나저나 린이라니, 굉장히 이국적으로 들리는 이름이었다. 특이한 용모도 그렇고 제국 사람이 아닌 걸까? 린을 쓰다듬던 나비로제가 픽 웃었다.
“재밌는 인연을 만났군.”
“뭐···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런데 별로 안 놀라시네요?”
“세상에는 천재가 많으니까.”
하긴 나비로제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전쟁터를 전전한 위인이었다. 로난과 슐리펜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그녀가 싱긋 미소지었다.
“그나저나 첫 번째 시험치고는 제법 거칠던데 잘 해내 줬구나. 하긴 너희 둘이라면 당연한 일이지.”
“별로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나저나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영 안 좋으시네.”
로난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까부터 느꼈는데 나비로제의 얼굴에는 묘한 시무룩함이 묻어나 있었다. 옅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입을 뗐다.
“후···배짱 있는 검사가 영 없더군. 적어도 한 명은 덤벼올 줄 알았는데 말이지.”
“···세상 어느 미친놈이 전대 검성한테 싸우자고 들어요?”
자기객관화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1차 시험이 어떻게 치러졌을 지 예상이 갔다. 아마 대다수는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터였다.
“이 부분만큼은 과거가 그립더구나. 걸음을 뗄 때마다 시비조로 대련 신청이 걸려왔지. 그들이 내지르던 단말마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맞아. 그러고 보니 참가자들끼리 대련을 신청할 수 있다고 했었죠.”
“그래. 첫 번째 시험이 끝났으니 이제 가능하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다면 가서 한번 날뛰고 와라. 합법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니까.”
“호오···.”
흥미로운 정보였다. 애초에 쓸만한 동료를 구하러 여기까지 온 건데, 실력을 보는 데는 대련만 한 것도 없을 터였다. 로난은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식당 내부를 슥 훑었다. 눈이 마주친 몇몇 사람들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나는 아니어라. 제발 나는 아니어라. 로난이 한창 인재를 물색하던 와중이었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잠깐 시간 좀 되나?”
“엉?”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 자리에 굳어 버렸다. 하마터면 곧바로 칼을 뽑아서 목을 날려 버릴 뻔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사람들을 광기에 빠뜨렸던, 두건을 뒤집어 쓴 사내가 거기에 서 있었다.
“너는···!”
“그래. 몇 시간 전에 인사했지. 몸은 괜찮아졌으니까 안심해도 되네.”
사내가 능청스레 웃었다. 의식을 잃고 들것에 실려가던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인데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어깨 위로는 여전히 불그스름한 기운이 피어나고 있었다. 로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용건이 뭐야?”
“왜 그렇게 날이 서 있나? 나가서 이야기하지. 석양이 그만이더군.”
사내가 엄지를 뒤로 치켜들며 문을 가리켰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뻔뻔스러운 태도였다.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이 새끼···.”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살기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왁자지껄하던 식당이 적막에 빠졌다.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나비로제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다녀올게요. 분명 죽여도 합법이라고 했죠?”
“대련이 성사됐을 경우에만.”
“고마워요.”
쿵! 사내와 로난이 식당을 빠져나갔다. 위축되어 있던 사람들은 그 뒤로 3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가만히 문을 쳐다보던 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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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난은 두건을 쓴 사내를 따라 이동했다. 개수작을 부리면 언제든지 목을 쳐 버릴 수 있도록 손은 칼자루에 올려진 채였다. 오 분 정도를 걷던 사내는 숙소로 보이는 건물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깎아지른 절벽 하나가 해가 저무는 서쪽을 향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아까 내가 봐 둔 장소지. 끝내주지 않나.”
절벽 끝에 선 사내가 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정상에 도착한 것이 아님에도 주위의 경치가 훨씬 눈에 잘 들어왔다. 이글거리는 석양이 세상을 불사르고 있었다.
끝내준다. 부정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심기가 불편한 로난은 그 말에 긍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칼자루를 움켜쥔 채 이렇게 대답했다.
“용건이 뭐야.”
“아아, 미안하군. 잠시 감상에 젖어서···.”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로난은 사내가 한 번만 더 시간을 끌 경우 저기서 밀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르를 발밑에 던진 다음에 충격파를 발동하면 암반 사고로 위장이 가능할 터였다. 그냥 밀어도 별 상관 없고. 한숨을 푹 내쉰 사내가 로난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네. 내 이름은 러셀 크로나일세. 첫 번째 시험의 막바지에 자네가 겪은 괴사건은 내가 저지른 걸세.”
“···뭐?”
“ 나보다 약한 이들의 정신을 흔들어서 이성을 잃게 만드는 것이 내 오러의 능력이거든. 그중에서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이 나오지 않아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 당혹스러운 일을 겪게 한 점,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자신을 러셀이라 소개한 남자는 수십 명의 참가자가 미쳐서 날뛴 것이 자신의 소행이라 자백했다. 눈빛이나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틀림없이 입막음을 목적으로 부른 줄 알았는데. 벙쪄 있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자네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
“실력을 확인해? 무엇을 위해서?”
“나는···악마를 죽일 동료를 모집하고 있다네.”
러셀의 얼굴이 진지했다. 영문 모를 소리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악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지. 그건 도저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어. 산 너머의 아란 파르잔에서 합격자가 한 명뿐인 조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거점으로 올라올 당시 길잡이가 해 주었던 이야기였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러셀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설명이 빠르겠군. 그럼 그 유일한 합격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알고 있나?”
“그건 모른다고 안 말해주던데.”
“아마 알면서 말하지 않았을 걸세.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거든. 연통이 있는 진행 위원 하나가 말해주었지.”
러셀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석양을 한 번씩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햇빛으로 두려움을 씻어 내려는 사람 같았다. 그가 자신의 손목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 악마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의 손목을 잘랐어. 다른 참가자들이 기권할 틈새도 없이 말이지.”
“뭐라?”
로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도 내용이 파격적이라 듣고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손목을 뭘 어쨌다고? 러셀이 말을 이었다.
“나는 애초에 놈을 쫓아 파르잔에 왔다네.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참가자가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