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68)
169. 검의 제전(12)
#169
“따라와라.”
낮게 깔린 목소리가 진지했다. 다만 이전에 황궁에서 봤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적어도 검게 타오르던 태양 같던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별안간 식당 안쪽에서 나비로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 어딜 간 거냐. 스승이 혼자 술을 마시게 하다니,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하.”
로난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혀가 꼬부라져 있는 걸로 보아 상당히 취한 것 같았다. 하긴 두 제자가 시험에서 대활약을 펼쳤으니 기분이 어지간히 좋을 만도 했다.
시험을 시작하기 전에는 무모한 짓 하지 말라며 그렇게 신신당부하더니, 막상 백 마리를 잡는 데 성공하니까 입이 귀에 걸려서 싱글벙글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자이파가 귀를 쫑긋거렸다.
“이 목소리는···그 뱀도 같이 온 건가.”
“그렇게 됐네.”
“···귀찮군. 꽉 잡아라.”
“엉?”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팔을 뻗은 자이파가 순식간에 로난을 어깨에 들쳐멨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소리를 지를 시간도 없었다. 팡! 몸을 한껏 웅크렸던 그가 밤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이런 씹···!”
밤하늘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무시무시한 각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자이파가 땅을 박차며 뛰어오를 때마다 별이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것을 반복했다. 눈 덮인 능선을 딛으며 뛰어오르던 그가 어느 순간 착지했다. 어깨 위에서 뛰어내린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야 이 새끼야, 이게 다짜고짜 뭐 하는 짓이야?”
“내 임시 거처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거든.”
“임시 거처?”
뒤집혔던 속이 가라앉자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웬 널찍한 동굴 안이었다. 깊지는 않았지만 자이파가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있을 정도로 높고 넓었다.
들어온 입구 바깥쪽으로는 별하늘과 저물어가는 달, 동부의 대평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암벽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서 날개가 달린 것이 아니고서는 출입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파르잔에 오면 숙식은 대부분 여기서 해결한다. 성지까지 올라가면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많아서 말이지.”
“···제법 쓸만한데.”
거처를 둘러보던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단촐해 보이면서도 은근 있을 건 다 있었다. 입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거대한 모닥불이 방금 지핀 듯 힘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큼직한 고기가 박혀 있는 말뚝 몇 개가 모닥불 주위에 박혀 있었다.
“무슨 고기야?”
“엘크. 좀 들겠나?”
“나중에.”
동굴 안쪽에는 뭐가 들었을지 모를 나무 상자가 대여섯 개쯤 쌓여 있었다. 양쪽 벽에 못을 박아서 만든 해먹은 침대라기보다는 들소 같은 동물을 잡는 덫 같았다.
그 옆에는 오직 자이파만이 휘두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언월도 한 자루가 비스듬이 기대져 있었다. 다시 봐도 병기보다는 건축 자재에 가까운 크기였다.
생긴 것이 미묘하게 달라진 걸로 봐서 나비로제에게 파괴당한 뒤 다시 만든 것 같았다. 성큼성큼 걸어간 자이파가 상자 위에 걸터 앉았다. 로난이 팔짱을 낀 채 질문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다는 게 뭐야?”
“네가 내 부하들을 죽였나?”
자이파가 덤덤하게 물었다. 마치 어제 내 화분에 물 줬냐고 물어보듯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한순간 로난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상한 질문이기는 했는데,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 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세로로 좁혀진 동공이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래. 그렇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리 되뇌인 자이파가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적막 속에서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렸다.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형용할 수 없는 스산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위험해.’
로난은 본능에 가까운 동작으로 두 검의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동시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밤하늘 아래 울려 퍼졌다. 카아아앙-! 자이파와 눈이 마주친 로난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언월도에 손이 닿는 거리에 앉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교차된 라만차와 이미르의 검신 사이로 언월도의 서슬 퍼런 칼날이 끼어 있었다. 여전히 엄청난 힘에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빼는 순간 이마가 반으로 쪼개질 터였다. 그를 지켜보던 자이파가 흥미 섞인 투로 말했다.
“몰라보게 늘었군. 이도류로 바꾸었나.”
“기분 내킬 때마다 바꿔서 들지. 한번 해 보자는 거냐?”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말없이 자세를 다잡은 자이파가 언월도를 내질렀다. 크기와 중량을 고려했을 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세 개의 날붙이가 격돌할 때마다 물보라 같은 불티가 허공에 피어났다. 불규칙한 금속음이 동굴 속에서 메아리쳤다. 스무 합 정도를 겨루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자이파가 언월도를 거뒀다. 막 사선으로 검을 올려 베던 로난이 다급하게 동작을 멈췄다. 라만차의 칼 끝은 정확히 자이파의 목울대 앞에서 멈춰섰다.
“씨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로 벨 뻔 했다. 그를 위아래로 흩어보던 자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는 아니군.”
“뭐라?”
“그때 황궁에서부터 의아하기는 했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게서는 그 광신도들과 어느 정도 유사한 기운이 느껴졌거든.”
로난이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나 눈치채고 있었다. 언월도를 다시 벽에 기대 놓은 자이파가 구석에서 남는 상자 두 개를 들고 와서 모닥불 근처에 내려놓았다.
“앉아라.”
“또 이래놓고 칼 휘두르려고? 유사하다면서.”
“네 혐의는 방금 풀렸다. 비슷하긴 하지만 결이 달라. 네게서는 허황에 젖어 있는 놈들 특유의 풋내가 나지 않는다. 칼 휘두르는 법도 내 부하들의 몸에 남은 검흔과는 완전히 다르더군.”
“어떻게 다른데?”
“그건 감정이 없는 도살자만이 저지를 수 있는 학살이었다.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 네 검과는 근본이 틀려.”
자이파가 주억거렸다. 소름이 끼치도록 정확한 분석에 로난이 굵직한 침을 삼켰다. 반짝이는 마나가 보이지도 않으면서 저런 정확도라니, 대단한 직감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황궁에서 오해를 풀었어야 했는데, 유감이다.”
“아닌 거 알면 됐어. 네 부관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군의관의 말로는 심적 요인이 클 가능성이 높다더군. 지독히도 충격을 받은 탓에 스스로 마음을 닫아 버린 거지.”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아직도 구덩이 속에 웅크린 채 겁에 질려 있던 암사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회복하지 못하다니, 생각보다 마음의 상처가 깊은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그래도 몸은 완전히 나았으니 곧 정신을 차릴 거다. 안 앉을 건가?”
“재촉하기는.”
그제야 검을 내린 로난이 상자에 걸터 앉았다. 모닥불의 온기가 따스했다. 자이파는 새끼손톱만을 이용하여 또 다른 나무상자의 뚜껑을 개봉했다. 큼직한 술병 대여섯 개가 잘 포장된 채 들어 있었다. 두 병을 꺼내든 그가 한 병을 로난에게 건넸다. 고급스러운 종이로 만들어진 상표에는 눈 결정 모양이 세밀하게 스케치되어 있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거 설마 만년설화 담금주냐?”
“고향의 술이지. 나중에 바래다 줄 테니 말동무나 좀 해다오.”
그리 대답한 자이파가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목을 몇 번 꿀렁거리자 단번에 병이 비어 버렸다.
그는 아무런 지체도 하지 않고 바로 다음 병을 꺼내서 개봉했다. 아무리 부유하게 산다고 해도 쉽사리 구하지 못할 물건일 텐데, 과연 검성다운 씀씀이였다.
“말동무라···그렇게 할까.”
로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이파처럼 단번에 술을 들이킨 그가 얼큰한 숨을 내뱉었다. 몸이 확 달아오르며 기력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게 강함의 비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매로 입가를 닦은 로난이 자이파를 쳐다보았다.
“푸하···끝내주네. 그래서 뭐 하다가 늦은 거냐?”
“해충들을 죽이고 왔다. 결국은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해충? 네뷸라 클라지에?”
“그래. 못해도 백 마리는 잡은 것 같군.”
자이파는 황궁을 떠난 그날부터 부하들을 죽인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온 대륙을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네뷸라 클라지에는 검성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고, 그 결과 제도 인근의 소규모 지부는 완전히 씨가 말라 버렸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혼자서 다 잡았다고? 이상한 방어막 치는 놈 없디?”
“간혹 있었지. 무슨 짓을 해도 뚫리지 않는 방어막을 다루는 놈들이. 하지만 하나같이 지속력이 약해서 별 문제는 없었다.”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자이파는 별의 가호를 운용하는 놈들을 상대하는 놈들은 따로 공략하는 법이 있다고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치고 빠지는 것을 반복하다가 가호가 흐릿해질 때 잡으면 된다는 거였는데, 대머리들처럼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방어막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었다.
‘괴물 자식.’
그래도 말이 쉽지 대단한 업적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 사란테도 결국은 패배한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여러모로 역대 최강의 검성이라는 말이 절절히 체감됨과 동시에, 이런 작자가 도대체 최후의 결전 당시 왜 보이지 않았나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누구한테 살해당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머리가 복잡했다. 나비로제도, 크라티르도 그렇고 행방불명의 원인을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침음을 흘리던 로난이 재차 술을 들이켰다. 어차피 당장 고민해도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그때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자이파가 로난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참, 이게 뭔지 알고 있나.”
“음?”
작고 반짝이는 금속은 칠각성 모양으로 세공되어 있었다. 익숙한 형태를 본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틀림없이 사막의 유적 다인하르에서 주교 테라닐이 차고 있던 물건이었다.
“···이걸 어디서 났어?”
“버러지의 행렬을 습격했을 때 얻은 물건이다. 거기의 우두머리가 팔과 함께 두고 가더군. 무언가를 마차로 운반하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놓치고 말았다.”
자이파가 혀를 찼다. 대륙의 남서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풀과 나무가 온통 새하얀 숲에서 놈들을 기습했고, 궤멸시켰지만 우두머리와 마차를 놓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하얀 숲에 대한 묘사를 들은 로난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러셀이 말했던 곳과 위치는 전혀 달랐지만 특징이 놀라우리만치 흡사했다.
“거기가 어디야?”
“그러니까···북서부의 이타시안 산맥을 넘으면 나오는 삼림이었다. 특정한 구간만 유별나게 하얗게 변해 있더군.”
“유적 같은 건 못 찾았고?”
“유적이라…? 부끄럽지만 그때는 분노에 미쳐 날뛰던 시기라 상세한 조사를 하지 못했다. 관심이 있다면 찾아가 봐라. 그건 네게 줄 테니까.”
자이파가 손짓했다. 옅게 끄덕인 로난이 뱃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점점 진실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네뷸라 클라지에 말고도 2년간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법 도수가 센 술 덕분에 분위기가 마냥 심각해지지는 않았다.
“맞아, 네 스승 되는 자가 그렇게 부관의 병문안을 자주 온다는군. 일면식도 없는 놈이 말이지.”
“스승? 설마 바렌?”
“그래. 황궁에서 나를 가로막은 애송이 말이다.”
“푸흐흐, 하긴 그 사자도 결혼할 때가 됐지. 제법인데.”
로난이 낄낄거렸다. 자이파도 즐겁다는 듯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문득 로난의 시선이 벽에 기대어 있는 언월도에 닿았다. 칼을 배달하던 다르만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못 받았나 보네?”
“뭘 말하는 거냐.”
“어···그러니까.”
로난이 말꼬리를 끌었다. 다르만이 했던 말이 생각난 탓이었다. 그는 분명 배달하는 검을 두고 자신의 스승이 자이파에게 선물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원래 깜짝 선물이 가장 기분이 좋은 법이지.’
괜히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시선을 피한 로난이 둘러대며 말했다.
“아냐. 곧 알게 될 거다.”
“싱겁군.”
“그러고 보니 너는 여기 왜 온 거냐? 나비로제 누님처럼 참가자로 온 건 아닌 것 같고.”
“제국의 검성은 최종 시험과 성지에서 벌어지는 의식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최종 시험에서 우승한 풋내기를 주물러 주고, 검사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도 내 의무지. 귀찮은 일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기대하는 중이다. 너와 제국의 샛별을 비롯해서 싹수 있는 참가자가 제법 있으니까.”
물론 그 뱀은 귀찮지만. 그리 중얼거린 자이파가 술을 들이켰다.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건 전혀 모르고 있던 규칙이었다.
설마 최종 시험의 우승자가 검성과 대련을 하게 될 줄이야. 찰나 러셀과 악마, 네뷸라 클라지에와 관련된 생각들이 빠르게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턱을 매만지던 로난이 천천히 입을 뗐다.
“자이파.”
“왜 그러지.”
“내가 찾았다 하면 어쩔래? 네 부하들을 죽인 놈.”
한순간 자이파의 눈빛이 변했다. 잠시 벙쪄 있던 그가 두 번째 술병을 단번에 들이켰다.
집 한 채도 족히 사고 남을 액체는 세 모금만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챙그랑! 비어버린 술병을 바닥에 내던진 자이파가 로난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서는 다시 살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로난이 여명패를 만지작거렸다. 만년설과 뒤섞인 바람이 동굴 밖에서 우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