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69)
170. 검의 제전(13)
#170
날이 밝았다. 언제나처럼 파르잔의 하늘은 청아한 푸른빛을 띠었다. 밤새 거세게 불어치던 바람이 한결 잦아들어 있었다.
참가자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거점은 정상과 거의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산을 타야 했다.
이번에도 행렬의 선두는 걸음이 빠른 로난과 나비로제였다. 로난은 성지가 있는 정상에 눈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이 등산도 이제 끝이네요.”
“아직 성지가 남았다. 물론 마지막 거점 기준으로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기는 하다만.”
“참, 그랬었죠.”
“그건 그렇고 어젯밤에는 상당히 늦게 들어오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나비로제가 질문했다. 훅 들어오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로난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유지했다. 밤새 자이파와 술을 퍼마시던 그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거점으로 돌아왔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로난이 넌지시 둘러댔다.
“어···그냥 바람 좀 쐬다 왔어요. 누가 칼 쓰는 법 좀 알려 달라길래 겸사겸사 알려줬고요.”
“그렇군. 자이파 그 고양이와 보낸 시간은 즐거웠나?”
“뭐, 나름대로 괜찮···헉.”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나비로제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며 걷고 있었다. 굵직한 침을 삼킨 로난이 입을 뗐다.
“···알고 있었어요?”
“모르는 게 이상하지. 내가 그 고양이와 몇 번을 겨뤘다고 생각하는 거냐.”
“미안해요. 말하면 싫어할까 봐.”
로난이 무안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검성이면 다 감이 좋은 건지, 감이 좋은 사람이 검성이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됐다. 네가 친하게 지내겠다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만 내가 전에 말한 건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거다.”
“말한 거? 아, 자이파가 위험한 놈이라던 거요.”
“그래. 내가 단순히 그 노괴를 싫어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라. 송곳니의 밤을 일으킨 것이 누구인지도. 증오는 역병과도 같아서 전염되기 십상이니까.”
“증오?”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비로제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앞질러 걸어갔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역시 자이파와 놀았다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저걸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동시에 누군가의 손바닥이 부드럽게 둔부를 쓰다듬었다. 어째 갈수록 손길이 음흉해지는 것 같았다. 로난은 멸시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린이 엉덩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손 안 떼냐.”
“어제 못 물어봤어. 너, 그렇게 내가 좋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다 알아.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한 거잖아.”
“그러니까 뭘?”
“엉큼하긴. 어제 시험에서 혼자 백 마리 잡은 거.”
린은 제법이라는 듯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로난이 실소했다. 하도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는데 사실인 모양이었다.
“뭐 잘못 먹었냐?”
“흐흥. 구시대적이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은 어필이었어. 네 제안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게.”
린이 눈웃음쳤다. 아무래도 아침에 혼자 이상한 걸 주워 먹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로난의 엉덩이를 찰싹 친 그녀가 앞질러 걸어갔다. 어느새 바로 옆까지 치고 올라온 슐리펜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학생회장이 가엾군.”
“시발, 너까지 왜 그러는데.”
그들은 오후가 되어서야 마지막 거점에 도착했다. 지금껏 거쳐 온 거점들과 규모는 비슷했지만 시설은 가장 좋았다. 이미 여러 명의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본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아무래도 먼저들 온 모양이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이 과연 세 번의 시험을 통과한 생존자다웠다. 다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그란 파르잔에서 올라온 참가자들과는 극명하게 달랐다.
말수가 거의 없었고, 함께 다니는 사람들도 없었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돌아다니는 것이 위축되어 있다는 인상마저 풍겼다. 그 차이를 눈치챈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긴 분위기가 왜 저래?”
“무시무시한 놈이 하나 있다는데, 그 자식 때문인가?”
“날붙이를 뺏어야 하는 거 아냐? 금방이라도 자살할 것 같은데.”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로난도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악마로 추정되는 놈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대련이 시작되기 전에 얼굴이라도 봐 두면 좋을 것 같은데. 두리번거리던 로난이 바로 근처에서 걷던 사내를 붙잡아 질문했다.
“이봐요. 그쪽에 무시무시한 놈이 하나 있다는데 어디 있는지 알아요? 머리카락 새하얀 놈.”
“···그 개자식은 왜 찾는 거요? 나도 모르오!”
사내가 뿌리치듯 팔을 휘둘렀다. 예상치 못한 신경질적인 반응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문득 아란 파르잔에서 온 다른 참가자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뭘 쳐다보는 거야?”
갑자기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갈겨도 저따위 눈빛으로는 보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러셀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제법 해볼 만 하겠는데···.”
“엉?”
러셀의 시선은 아란 파르잔의 참가자들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어쩐지 수상쩍게 들리는 말이었다. 로난이 질문했다.
“뭐가 해볼 만한데?”
“음···? 아아, 저쪽 참가자들의 기세가 주눅들어 있으니 무난하게 최종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었네. 저렇게 돼서는 싸우기도 전에 진 법이지.”
러셀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어쩐지 어색하게 보이는 미소였다. 로난이 경고하듯 말했다.
“괜히 헛짓거리하지 마. 어차피 내일이면 다 끝날 거니까.”
“여부가 있겠나. 자자, 어서 짐부터 풀러 가지.”
배낭을 다시 들쳐멘 러셀이 앞장서서 나섰다. 벙쪄 있던 참가자들도 하나둘씩 그의 뒤를 따랐다. 로난은 찜찜함을 느끼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했던 말마따나,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날 터였다.
****
저녁이 되었다. 아란 파르잔 측과 한 마디도 섞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로난과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던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아아, 당신이 세 번째 시험에서 백 마리를 잡았다는 분이었군요. 저희 쪽에서 몬스터 몇 마리를 데려가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죠. 대단한 걸요.”
“별 거 아니었어. 그쪽에서는 가장 많이 잡은 놈이 누구야?”
그녀는 아란 파르잔에서 올라온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식당 곳곳에서는 양측에서 올라온 참가자들이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난이 조금 늦게 훈련을 마치고 따로 온 탓에 다른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를 개선하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역시 발효된 보리음료였다. 자연스레 자리가 섞이고, 자연스레 맥주를 한두 잔씩 마시게 되다 보니 말문 또한 자연스럽게 트였다.
숙소는 여러 개였지만 식당은 하나였기에 참가자들이 다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점, 악마라는 놈이 이슬만 처먹고 사는지 식당에 나타나지 않은 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뜸을 들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그 악마죠. 마지막 순서였는데, 남아 있는 97마리를 전부 도륙했어요.”
여인이 질린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이 아가씨도 악마가 어쩌고 하는 걸 보면 꽤나 정형화된 별명인 듯했다. 그녀는 끔찍한 기억을 씻어내려는 것처럼 맥주를 들이켰다.
“뭐 어떤 짓을 저질렀길래 이 많은 사람이 꼬리를 말고 있어? 그쪽도 꽤 강해 보이는데.”
로난은 그녀가 차고 있는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타오르는 불꽃 형상의 조각이 은으로 세공되어 있었다. 제국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무력 집단인 불꽃 기사단의 상징이었다.
로난이 전생부터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기사단 중 하나였는데, 그곳에 소속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실력이 입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칼밥도 제법 오래 먹은 것 같은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여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하하···저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격이 다르더라고요. 직접 보셨어야 하는데.”
“지금은 어디 있어?”
“오자마자 숙소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고 있어요. 늘 저랬죠.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그녀는 세 번의 시험을 거치는 동안 악마가 저지른 짓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는 나머지 참가자들의 손목을 모조리 절단했고, 두 번째 깃발 쟁탈전에서는 상대 진영은 물론 방해가 되는 아군까지 사고를 빙자해 죽였다. 쾌검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살해한 탓에 일절 제재를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에서는 방금 들은 것처럼 97마리의 몬스터를 죽였는데, 그 학살극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말했다. 과연 러셀의 말처럼 악마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행적이었다. 다시 맥주를 쭉 들이킨 여인이 말을 이었다.
“푸하···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놈이 폭류검 크로덴과 연관이 있다는 거죠.”
“크로덴? 그 검성이었다는 놈?”
난데없는 소리에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분명 첫 번째 시험 당시에 슐리펜과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었다.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른 참가자를 모두 죽였다는 망나니. 신원 파악 과정을 귀찮을 정도로 철저하게 만든 원흉.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놈을 기억하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확신하고 있어요. 제자거나, 아니면 숨겨둔 자식이거나.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닮는 건 불가능해요. 괴물 같은 실력도 그럴싸하게 납득이 되고요.”
“뭐가 그렇게 닮았는데?”
“모든 게요. 칼을 휘두르는 방법, 잔혹성, 생고기만 먹는 식성까지···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과묵한 성격 뿐이죠.”
여인은 분노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폭류검과 얽힌 이야기를 풀었다. 로난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피식피식 웃었다. 재밌어서라기보다는 패악질이 하도 기가 막혀서였다.
악마를 감췄다는 누명을 씌워서 시골 마을 하나를 불살라 버리거나, 마음에 드는 여자를 겁탈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오직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만 먹는 특이한 식성으로도 유명했는데, 세간에서는 그가 식인을 한다는 소문까지 퍼졌다고 했다.
이쯤 되니 크로덴을 검성의 자리에서 추락시킨 나비로제가 왜 그토록 추양받는지 알 것도 같았다. 설명을 마친 여인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아, 나비로제 님이 참가하셨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러고 보니 필레온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하셨죠?”
“그렇지. 같이 올라왔어.”
“꺄아! 실제로는 어떤 분이에요? 내일이면 만나뵐 수 있겠죠? 어릴 때부터 기사단에 맡겨져서 직접 뵐 기회가 없었거든요. 저는 그 분 덕에 검을···”
우중충하던 여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선망하는 듯했다. 그녀가 한창 나비로제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던 와중이었다. 식당의 구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라일리, 그쯤하고 와! 회의하던 중이었잖아!”
“아아, 알았어요!”
신경질적으로 답변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난에게 싱긋 웃어 보인 그녀가 안타까움이 묻어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즐거웠어.”
“아하하···저도요. 꼭 성지에서 뵈었으면 좋겠네요.”
여인이 등을 돌렸다. 로난은 그녀가 걸어 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구석진 자리에서 다섯 명의 남녀가 수군거리고 있었다. 전부 얼굴이 낯선 걸로 보아 아란 파르잔에서 올라온 참가자들 같았다. 한 명만 빼고. 예상외의 인물을 발견한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저 자식은 또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야?’
러셀이 손짓까지 해 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라일리라 불린 여인이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로난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제 와 작당 모의를 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그는 조용히 남은 잔을 비우고 숙소로 돌아갔다. 토라진 나비로제를 어떻게 풀어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열성 신도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좀 나아지겠지.
간단하게 씻은 로난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등산이 길었던 탓인지 눈을 감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
“으음···.”
로난이 눈을 떴다. 밤새 이불을 걷어차고 자서 그런지 몸이 차가웠다.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일찍 일어났네.”
창문 밖으로는 검푸른 밤하늘이 엇비치고 있었다. 희미하게 색이 밝은 걸로 봐서는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같은 방을 쓰는 슐리펜은 자기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로난은 조용조용한 발걸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담배나 한 대 태우고 들어갈 심산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확 차가워졌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파이프가 없었다. 그제야 나비로제에게 담뱃대를 빼앗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분위기를 타서 그냥 넘겨 줬는데 생각해 보면 이런 부조리가 없었다.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궁시렁거리던 로난은 그녀의 나신을 떠올리고 나서야 분을 삭였다.
“···손해는 아니었으니까.”
로난은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발걸음은 없었다. 어차피 잠이 깼으니 산책이나 하고 들어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새벽녘의 공기가 폐부를 휩쓸었다. 적막에 빠진 거리를 둘러보던 로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길었어.”
드디어 오늘이었다. 이번 시험만 끝나면 그 잘나신 성지를 밟는다. 악마라는 놈에 대한 비밀도 이제 몇 시간 뒤면 진상이 드러날 터였다. 로난은 그저께 밤 자이파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가 십 분 정도를 배회하던 차였다.
“···음?”
로난이 코를 킁킁거렸다. 콧잔등을 스치는 바람에 이질적인 향취가 섞여 있었다. 로난은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피 냄새.”
헷갈릴 리가 없었다. 사무치게 익숙한 선혈의 향취였다. 방향을 바꾼 로난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예감이 관자놀이를 쿡쿡 찔렀다.
‘또 무슨 지랄이 난 거야.’
갈수록 걸음을 빨리 하던 로난이 결국 달리기 시작했다. 침묵이 내려앉은 거리 위로 그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 냄새는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후···씨발.”
마침내 멈춰선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식량 창고 역할을 하는 통나무집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혈향은 그 안쪽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제발 막 잡아온 야생동물을 손질하고 있는 거면 좋을 텐데.
심호흡한 로난이 나무문을 밀었다. 빗장이 걸려 있지 않은 문은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입을 벌렸다. 고여 있던 피비린내가 안개처럼 로난을 덮쳤다. 천장까지 쌓여 있는 포댓자루와 식재료가 빼곡하게 들어찬 선반, 고기 창고로 이어진 쪽문이 눈에 들어왔다.
로난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차였다. 무언가 그의 발치에 닿았다. 시선을 내린 로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두건을 뒤집어쓴 머리통 하나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러셀.”
로난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틀림없는 러셀이었다. 머리통 옆에는 목 없는 시체가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심장이 폭발할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는 걸로 보아 죽기 전에 지독한 고통을 겪은 듯했다. 피 웅덩이 속에 누워 있는 그의 몸뚱어리에는 양쪽 손이 붙어 있지 않았다.
주검은 러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여섯 구의 시체가 창고 곳곳을 나뒹굴고 있었다. 머리와 양쪽 손목은 모두 깔끔하게 몸에서 분리된 상태였다. 개중에는 어젯밤 로난과 대화를 나누던 라일리라는 여기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리한 단검 한 자루가 그녀의 입을 뚫고 뒤통수로 빠져나와 있었다.
“이건···도대체가···.”
절단면에 남은 검흔이 익숙했다. 끼이익- 그때 창고 안쪽의 쪽문이 열리며 웬 청년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뭘 처먹고 있는지 입술은 연신 우물거리고 있었고, 입가는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은 피로 젖어서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청년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음?”
뒤늦게 로난을 눈치챈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씹던 것을 삼킨 그가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너는 뭐냐?”
“이 씨발새끼가.”
반짝이는 마나의 유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본능에 가까운 분노가 몸을 움직였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기는 순간 악마의 눈이 커졌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퍼지는 쇳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깨부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