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7)
18. 피와 알(1)
#18
“여기 어디쯤인데….”
합격자를 발표한지 하루가 지났다. 로난과 아셀은 이른 아침부터 숲 속을 거닐고 있었다.
제도의 지근거리에 뿌리를 내린 셰모 숲이었다. 계속 끙끙거리던 아셀이 걱정스레 물었다.
“로, 로난···정말 괜찮을까?”
“아직도 그 걱정이냐? 괜찮다니까.”
간밤에 한 숨도 자지 못한 아셀의 눈가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어제 로난과 슐리펜이 일으킨 사건 때문이었다.
잠이 들면 슐리펜이 고용한 암살자들이 찾아와 심장에 단검을 꽂고 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귀족인데 해코지라도 당하면···.”
아셀은 두려웠다. 저번에 데어리안이라는 망나니 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만은 아니었다.
황실 바로 다음 가는 대가문의 후계자와 칼부림을 한 것으로 모자라, 그의 코를 깨 버리고 달아난 것은 누구라도 걱정할 만할 일이었다.
허나 로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슐리펜은 괜찮은 인간이야. 특정한 상황에 눈이 돌아갈 뿐이지.”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애초에 슐리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상대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만난 시간이 짧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강함에 대한 병적인 집착만 아니라면 그는 올바른 귀족의 귀감이라 부를 수 있는 사내였다.
신뢰를 중히 여기고, 으스대지 않고, 약자를 보호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안심해 인마. 틀림없이 어제 일도 자기 책임으로 돌렸을 테니까.”
“설마 그렇게까지···?”
“우리가 아침에 체포당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잖아.”
“드, 듣고 보니 그러네···.”
아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난은 들고 있던 양피지를 펼치며 이리저리 기울였다.
조잡한 지도에는 페나르도 샘이라는 지맥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웨어라이온 바렌 교수가 손수 그린 지도였다.
“진짜 그림은 더럽게 못 그렸네. 아니지, 그 북슬북슬한 손으로 이 정도라도 그린 걸 대단하다 해야 하나···.”
입학식은 보름 뒤였다. 로난은 고향에 들르기 전에 지맥을 먼저 찾아가 보기로 정했다.
마르야에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상단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에 함께할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이쪽인데···.”
셰모 숲 내부에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가면 되는 위치였는데, 키가 큰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탓에 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도를 구기듯이 접은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못 해먹겠네. 나 좀 띄워 주라 아셀. 나무 위까지.”
“응. 인비저블 핸드!”
아셀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로난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확연히 빨라진 속도를 체감한 로난이 탄성을 흘렸다.
“오, 이제 정말 빨라졌는데?”
승차감(?) 또한 확연하게 나아졌다. 이전에는 힘조절 못 하는 어린애가 마구잡이로 쥐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부드러운 손을 가진 누님이 살며시 들어올리는 느낌이랄까.
금세 나무 꼭대기까지 다다른 로난이 칼을 휘둘렀다. 파사삭! 초록색 천장이 잘려 나가며 셰모 숲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손짓하는 나무들 사이로 길고 가느다란 물줄기가 굽이치는 것이 보였다.
****
로난은 강가를 따라서 발 아프게 한참을 걸어 갈 바에 차라리 물 위로 가자고 주장했다.
“이러고 있으니 그때 생각 나네. 시간 참 빨라.”
“으응···.”
그래서 두 사람은 엉성한 뗏목 위에 나란히 드러누워 있었다. 양떼 같은 구름이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로난이 입에 물고 있던 담뱃대를 빼서 내밀었다.
“펴 볼래?”
“응? 아, 아니···괜찮아.”
“에잉, 쫄보 새끼.”
다시 담뱃대를 문 로난이 한껏 연기를 빨아들였다. 엎드린 채 강물에 손가락을 담궈보던 아셀이 입을 열었다.
“뗏목 만드는 법은 어디서 배웠어?”
“군대에서.”
“구, 군대? 무슨···.”
“그런 게 있어 인마.”
아셀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로난은 한 시간도 안 걸려서 그럴싸한 뗏목 하나를 만들어 냈다. 징벌병 생활을 하며 익힌 생존 기술 중 하나였다.
통나무와 질긴 덩굴로 만들어진 뗏목은 육로보다 훨씬 쾌적하게 소년들을 인도했다. 로난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만 알고 있는 지맥을 알려주다니. 그 사자, 정말 인심 많이 썼군.”
“지맥이라는 게 그렇게 찾기 힘든 거야?”
“아무래도 그렇지. 하나만 찾아도 팔자를 필 수 있으니까.”
로난은 과거 어떤 노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평생을 지맥을 찾는 데 바친 노인은 지맥을 마나가 고이는 웅덩이에 비유했다.
세상을 떠도는 마나가 저마다의 이유로 한 곳에 정체되어 생기는, 아주 희귀한 웅덩이.
“지맥은 발견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는 순간 제국 소유가 돼. 그래서 더더욱 찾기가 힘들지. 발견을 해도 정보 공유를 안 하니까.”
“왜?”
“거기 있는 돌 쪼가리 하나까지도 금처럼 비싸지거든.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실제로 몇몇 모험가들은 지맥을 땅 위의 금광이라고 불렀다.
한 곳에 정체되어 있는 마나는 주변의 사물에 스며들며 평범한 돌을 마석으로, 이름 모를 잡초를 영험한 약초로 바꾸어 놓았다.
아셀은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배낭에 물통을 그렇게 많이 챙겨 온 거구나. 뭔가 했어.”
“페나르도 ‘샘’ 이랬으니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맥에 자리잡은 수원(水源 )에서 나오는 물은 영약이나 포션 비스무리한 물질이 되었다.
배낭 안에 자루와 물통을 그득그득 채워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발견이 안 됐을지도 모르겠네···.”
문득 전생에 우연히 들러 본 지맥들이 생각났다. 당시에는 이미 국영화가 이루어지거나, 물 한 방울에 풀 한 포기까지 착취당해서 황폐화가 된 지맥들이었다.
로난이 아는 것은 대여섯군데 정도였는데, 나중에 한번 찾아가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맞다, 로난.”
“엉?”
“그 알은 괜찮아? 어제···.”
“아, 맞다.”
로난은 안주머니에서 마르페즈의 알을 꺼내들었다.
마냥 뭉그러진 말똥처럼 못생긴 외형은 변화가 없었지만, 오늘은 조금 예뻐 보였다. 슐리펜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일등공신이었다.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알을 보며, 로난이 읊조렸다.
“계집애처럼 삐진 건 아니지?”
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알을 한 번 공중에 던졌다가 받은 로난이 눈을 감았다.
로난과 아셀은 그날 밤을 강물 위에서 보냈다.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찬란한 별무리가 그들의 이불이 되어 주었다.
로난은 불을 뿜으며 제도를 불사르는 마르페즈와, 춤을 추며 목숨을 구걸하는 슐리펜의 꿈을 꾸었다.
****
두 사람은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페나르도 샘에 도착했다. 지맥의 영향을 받는 나무들의 이파리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구만. 공기는 좋네.”
작은 샘의 중심에서 물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제법 깊어 보이는 샘이었다.
샘터에는 푸른빛을 띠는 수풀이 자라나 있었다. 마석화가 진행되어 변색된 바위들이 듬성듬성 솟아 있었다.
“생각보다 평범하군.”
로난이 싱겁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나름대로의 운치는 있었지만, 그가 지금껏 보아온 비경들에 비하면 영 수수했다.
“음···뭔가 어색한데. 기분 탓인가.”
“와아아아아아···.”
하지만 아셀은 달랐다. 그는 처음 제도의 풍경을 봤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숨을 한껏 들이쉬고 내뱉은 아셀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살면서 이렇게 마나가 풍부한 곳은 처음 봐.”
“젠장, 뭐가 좀 다르냐? 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냥···엄청 많아. 마나가, 응. 눈에 보일 정도로.”
지금이라면 훨씬 강한 마법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나가 고이는 웅덩이라는 비유는 정확했다. 평소에는 넓게 산개되어 있어 보이지 않던 마나가 곳곳에 과실처럼 영글어 있었다.
“내 원 더러워서.”
로난이 담뱃대를 강하게 빨았다. 그놈의 마나, 마나, 마나.
이쯤 되면 더러워서라도 마나 감응을 성공하고야 말겠다 다짐했다. 그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아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뭐냐?”
“로, 로난! 주머니!”
아셀은 지팡이를 뻗으며 로난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주머니? 왜?”
“알···! 알 꺼내 봐! 얼른!”
그에게는 보였다. 주위에 덩어리져 있던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로난의 주머니로 빨려들고 있었다.
로난은 마르페즈의 알을 꺼내들었다. 아셀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은 대기 중의 마나로도 모자라 땅이나 나무에 스며들어 있는 마나까지 게걸스레 빨아 마시고 있었다.
“뭔 일인데 그래?”
“아, 알이 마나를 흡수하고 있어!”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이지 않는 그로서는 생뚱맞게 느껴질 뿐이었다. 꿈새도 아니고 알이 마나를 흡수한다고? 갑자기?
-파직!
그때였다. 말라붙은 똥을 연상케 하던 껍데기가 조금씩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로난이 얼굴을 알 가까이 가져다 댔다.
“부, 부화하나?!”
그러나 로난의 기대와는 달리 균열이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색과 질감이 변하고 있었다. 말똥을 연상케 하던 갈색의 거칠거칠한 표면이 매끄러운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뭐야?”
알은 몇 분에 걸쳐 모습을 바꿨다.
변화를 마친 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티 하나 없는 알껍데기는 흑진주를 연상케 했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껍데기를 두드렸다.
“돌겠네 진짜. 무슨 애벌레도 아니고 알이 탈피를 하냐.”
“흡수는 계속되고 있어.”
“이쯤되면 강철 부리나 화염 깃털로도 모자라. 더 굉장한 게 나와야 해.”
변화가 일어났다고는 하나 부화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로난이 투덜거리며 다시 알을 집어넣었다.
그는 물이 솟아나고 있는 샘으로 다가갔다. 지속적으로 파문이 일어나는 수면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고 있었다.
“아.”
문득 바람 한 줄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여기에 올 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 로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아셀.”
“응?”
“좀 이상하지 않냐?”
“···뭐가?”
“분명히 그 사자는 여기를 보고 환상종들도 종종 모이는 곳이라고 했지?”
아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문 모를 소리였다. 로난의 손은 칼자루 위에 얹어져 있었다.
“그···랬지?”
“환상종이란 건 일반적인 짐승들보다 훨씬 까탈스러운 놈들이고. 당연히 환상종이 사는 곳에는 다른 동물들도 많이 살겠지?”
“······그치?”
“그런데 왜 참새 한 마리도 안 보이냐.”
아셀이 입을 다물었다. 로난의 말마따나 그 흔한 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샘에서 솟아난 물이 보글거리는 소리, 나뭇잎들이 바람 속에서 부비적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별안간 오싹한 소름이 뒷목을 타고 올라왔다.
“하···각오해 둬라 아셀.”
“뭐, 뭘?”
“피 냄새다.”
로난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콧잔등을 간질이는 바람에는 비릿한 혈향이 배어 있었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득였다.
“그, 그런···!”
아셀이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로난이 허공에다 대고 칼을 휘둘렀다.
툭. 반토막난 화살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히이익!”
“먼저 온 손님이 계셨군.”
로난은 아셀의 목덜미를 잡아서 근처의 바위 뒤로 던졌다. 재차 날아온 화살이 그가 있던 자리에 박혔다.
아셀은 가쁜 호흡을 고르며 로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셀이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나, 나도···!”
저번처럼 짐덩이가 될 수는 없었다. 용기를 쥐어짜낸 아셀이 바위 밖으로 머리를 뺐다. 그는 지팡이로 로난을 겨눈 채 주문을 영창했다.
“인비저블, 핸드.”
쿠구궁! 크고 작은 바위와 나뭇조각이 둥실둥실 떠오르며 로난의 몸 주위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두 발의 화살이 바위에 튕겨 나갔다. 아셀을 뒤돌아본 로난이 씩 웃었다.
“제법인데.”
“저, 저 자식 뭐야?!”
멀지 않은 곳에서 당황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사람의 키보다 큰 수풀이 빽빽하게 자란 곳이었다.
방향을 확인한 로난이 땅을 박차며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