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71)
172. 검의 제전(15)
#172
“살아 있었나. 폭류검.”
코피를 닦아낸 나비로제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착지한 곳이 관중석과 가까운 곳이라 의도치 않게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잠깐. 폭류검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말 그대로다. 분명 두 번 다시 칼을 잡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놓았거늘,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군.”
나비로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는 노드렉이라는 놈이 폭류검 본인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노드렉의 오러가 만들어낸 황색 섬광이 번득이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듯 벙쪄 있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자나 자식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걸 헷갈릴 정도로 헛살지는 않았···음, 다시 오는군.”
나비로제가 혀를 찼다. 동시에 자욱하던 포연이 좌우로 찢어지며 노드렉이 쇄도해 왔다. 극소수를 제외한 사람들의 눈에 그의 돌진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비로제는 당황하지 않고 거리를 벌렸다. 마나를 끌어모은 그녀가 횡으로 검을 휘두르자 진녹색 초승달이 노드렉을 향해 쏘아졌다. 지름이 거진 100m에 달하는 것이 투기장을 완전히 뒤덮고도 남을 크기였다. 객석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과연 전대 검성···!”
피할 곳이 없었다. 돌진해 오던 노드렉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대기를 찢으며 날아온 검기가 그의 몸을 토막내려는 찰나였다. 노드렉이 검을 바닥에 꽂으며 지지대 삼아 도약했다. 쾅! 검 끝에서 터져 나온 폭발이 그의 몸에 추진력을 더했다. 노드렉의 발아래를 통과한 검기가 투기장의 반대쪽 면에 부딫히며 폭발을 일으켰다.
“기세가 많이 죽었구나. 어린 계집아.”
기존의 점잖고 이성적인 면모라고는 티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순식간에 나비로제의 목전까지 다다른 노드렉이 검격을 날렸다. 양손으로 자루를 움켜쥐고 휘두르는 수직 베기였다. 나비로제는 물이 흐르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의 검을 받아쳤다. 카아앙-! 야수의 포효를 연상케 하는 굉음이 투기장을 흔들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아가씨 소리를 들은 지도 꽤 됐거든.”
나비로제가 조소했다. 두 사람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제자리에서 검격을 교환했다. 황색과 녹색. 두 날붙이가 격돌할 때마다 두 개의 오러가 뒤엉키며 사나운 마나의 폭풍을 만들어 냈다. 강철로 된 천둥이 연달아 작렬했다. 한창 교전 중이던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크로덴.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기이한 집단에게 신세를 졌지. 기적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더군. 그 놈들이 해안가에서 죽어가던 나를 치료해 주었다.”
그들은 합을 나누면서도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표정이 평온한 것이 마치 오랜 벗들이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노드렉은 정체불명의 집단이 자신을 재기시켜 주었다고 설명했다. 나비로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흥미롭군. 기이한 집단이라.”
“그래. 네년에게 잘린 다리도 그들이 붙여 줬다. 의족이라기에는 안 믿기지 않나?”
“오호. 의족이었나?”
나비로제가 예상외라는 듯이 눈썹을 으쓱였다. 자유자재로 힘차게 움직이는 것이 노드렉의 말마따나 진짜 다리로 보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제국의 기술력을 아득하게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피부와 함께 뜯겨나간 신경은 끝내 돌려 놓지 못하더구나. 그토록 많은 벌레를 제물로 삼았거늘···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된 내 얼굴을 봐라.”
“제물로 삼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다리와 피부가 거저 주어진 것은 아니거든. 의도치 않게 살생을 많이 저질러야 했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머저리 같은 색으로 변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노드렉이 클클거렸다. 물론 표정이나 음의 높낮이는 변하기 않았기에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바람 새는 소리로만 들렸다.
그는 재료 수급을 위해 인간을 수도 없이 죽였다고 설명했다. 로난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산 채로 붙잡혀간 러셀의 동료들이 어떤 일을 당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나비로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기껏 목숨을 부지했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왜 다시 검의 제전에 온 거냐. 설마 아직도 성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가.”
“뭐, 성검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고···.”
별안간 노드렉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곡도를 휘감은 빛무리가 한층 거세지더니 검의 속도가 빨라졌다. 쾅! 벼락을 연상케 하는 참격이 대태도의 칼배를 강타했다. 팽팽하던 균형이 무너지며 나비로제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커억···!”
투기장 끝까지 날아간 나비로제가 벽에 충돌했다. 콰아앙! 공성추가 들이받은 듯한 충격음과 함께 관중석 일부가 붕괴했다. 그녀가 피를 토하는 것을 본 슐리펜이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한층 커진 노드렉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적당히 해라 이 창녀야. 왜 뱀을 꺼내지 않는 거냐.”
노드렉이 검 끝으로 나비로제를 겨누었다. 그의 주변에 안개처럼 퍼져 있던 마나가 꿈틀거리며 열 개 정도의 나선 기둥을 만들었다. 관중석 곳곳에서 경악 어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10m에 이르는 기둥들은 폭류검의 오러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덩어리였다. 벽에서 몸을 뽑아내다시피 한 나비로제가 비틀거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고통 어린 침음이 흘러나왔다.
“크으으···.”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지킬 생각인가? 오냐, 그렇다면 갈가리 찢겨나간 네년의 시체를 누가 치우게 할 지나 고민해라.”
노드렉이 으르렁거렸다. 수직으로 세워져 있던 나선 기둥들이 눕혀지며 그녀를 겨냥했다. 보다 못한 감독관 알로긴이 다급하게 입을 뗐다.
“이거 위험하군. 검성. 대련을 중단해야 하오.”
“아니. 기다려라.”
자이파가 고개를 내저었다. 알로긴의 얼굴이 굳어졌다.
“승부는 이미 났소. 게다가 저 자가 정말로 폭류검 크로덴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오. 당장 대련을 중단하고 크로덴의 신병을 확보해야 하오!”
“그러니까 기다리라는 거다. 저 뱀이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까.”
“그게 무슨···!”
알로긴이 항의했으나 자이파는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고개를 슬쩍 돌려 로난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두 사람 사이로 미묘한 시선이 오갔다.
아직인가.
아직이야.
그 순간 나선 기둥들이 일제히 쏘아졌다. 안전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관중석과 투기장 사이에 방어막을 만들었다. 적황색 섬광이 투기장을 뒤덮음과 동시에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특수 처리가 된 석재 바닥이 모래처럼 뒤집히며 튀어 올랐다. 다섯 겹으로 구성된 방어막이 깨지고 재생성되는 것을 반복했다. 커억! 정신적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마법사 몇 명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교관님.”
슐리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뼈를 추려내기는커녕 육편조차 찾아내지 못할 폭발이었다.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비로제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이라도 난입해야 하나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차였다. 아래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참 착하구나. 역시 잘생긴 애들이 마음씨도 곱다니까.”
“너는.”
“너무 걱정하지 마. 공주님은 괜찮을 테니까.”
슐리펜이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다가온 린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그는 공주님이라는 단어가 나비로제를 지칭하는 말인 것을 알아채기 위해 제법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로난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래 인마. 누님을 좀 믿어 봐.”
“···로난.”
슐리펜이 시선을 돌렸다. 로난은 팔짱을 낀 채 투기장을 뒤덮는 폭발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태연한 표정에서 긴장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되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엊그제 자이파가 말하더라. 북부를 떠난 이후 자기가 발톱을 꺼낸 게 처음이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교관님은 저 깐깐한 호랑이가 거의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소리야. 궁금해서 폭류검은 검사로서 어땠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대답하더라. 난폭하기만 하지, 실력 자체는 자기가 열다섯살 때보다 못하다고. 운이 좋아서 40년이나 해 먹었던 놈이라고.”
로난은 엊그제 새벽에 자이파와 술을 마시면서 나누던 대화를 그대로 읊어 주었다. 만년설화 담금주를 열 병쯤 해치우고 나서야 취기가 오른 자이파는 웃통을 훌렁 벗어 던지면서 가슴팍의 흉터를 보여 주었다.
흑요석을 팽창시켜 놓은 듯한 근육 위로는 거의 로난의 키만 한 길이의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무수히 많은 흉터들 속에서도 선명한 것이 누가 봐도 나비로제의 대태도에 베인 상처였다.
자이파는 나비로제와는 달리 그 흉터를 나름의 기념비로 취급하고 있었다. 확실히 오래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신력이 남달랐다. 이어서 그는 폭류검 같은 놈은 한 손만 써도 이길 수 있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물론 로난은 자이파와 나비로제가 규격을 벗어나는 천재일 뿐, 폭류검도 충분한 실력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도 오늘 새벽에 한판 붙어 봐서 알아. 저 노드렉인지 폭류검인지 하는 놈은 확실히 강해. 아마 지금의 나나 너보다는 강할 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네 말은···.”
“그래. 나보다 감도 좋은 놈이 왜 그러냐? 자세히 봐.”
별안간 슐리펜과 어깨동무를 한 로난이 나비로제가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가만히 그곳을 응시하던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로난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저 정도로는 우리 교관님 못 이겨.”
확신하는 말투였다. 머지않아 폭발이 멈췄다. 투기장의 반면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연기는 꼭 시커먼 벽처럼 보였다. 관중석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모두 노드렉의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재미를 좀 보고 죽일 걸 그랬군. 한창 무르익었던데 말이지.”
노드렉이 입맛을 다셨다. 음에 높낮이가 없어서 더 소름 끼치게 들렸다. 그는 연기의 벽에 시선을 둔 채 혼잣말했다.
“세례 따위는 받지 말걸 그랬나. 어차피 쓸 데도 없었는데.”
노드렉이 지난 몇십 년간 있었던 일을 회상하던 차였다. 별안간 연기 속에서 녹색 초승달 하나가 날아왔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비실비실한 검기였다. 크기도 조금 전에 나비로제가 쏘았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았다.
“뭐야, 아직 살아 있었나.”
노드렉이 코웃음쳤다. 죽어가는 이의 부질없는 저항을 형상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가볍게 어깨를 비틀자 미약한 검기는 허무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부디 얼굴이랑 몸통은 건재했으면 좋겠는데.”
팔다리만 날아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노드렉이 확인 사살을 위해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갑자기 연기의 벽이 폭발하듯 흩어지며 녹색 빛무리가 쏟아졌다. 거대한 검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노드렉이 당황하며 검을 쳐들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가로, 세로, 사선.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엇갈려서 날아오는 검기들은 신적인 존재를 잡기 위한 그물처럼 보였다.
시야를 온통 메우는 검기의 폭주 속에서 빈틈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완전히 피하지 못한 검기 하나가 노드렉의 뺨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허어억!”
툭. 노드렉의 오른쪽 귀가 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지만 고통스러워 할 여유는 없었다. 이를 부러뜨릴 기세로 악문 노드렉이 앞으로 내달렸다. 등을 돌려 도망치다 죽느니 정면으로 돌파하여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가 극적으로 검기의 그물을 돌파하는 순간이었다. 유달리 폭이 넓었던 검기의 뒤편에서 나비로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폭발에 휘말린 여파인지 옷 군데군데가 찢겨 나가 있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한껏 부푼 팔과 다리의 근육. 예리한 눈빛. 이미 검을 휘두를 준비를 마친 그녀가 차갑게 내뱉었다.
“조금 고민했다. 제자의 말마따나 네가 크로덴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이 갈보년이!”
노드렉이 반사적으로 검을 내질렀다. 나비로제의 대태도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로를 노리고 날아간 칼날이 교차하며 지나갔다. 파앙! 불처럼 일어난 나비로제의 머리카락 가운데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 동시에 노드렉의 가슴 위로 붉은 선이 생겼다.
“커억···!”
“그런데, 역시 맞더군.”
노드렉의 코와 입에서 피가 울걱이며 뿜어져 나왔다. 몸을 한 바퀴 돌린 나비로제가 그의 배를 강하게 걷어찼다. 콰아앙! 직선으로 날아간 노드렉이 투기장 반대편에 처박혔다. 거미집 같은 균열이 그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벽을 타고 미끄러진 몸뚱어리가 바닥에 엎어졌다.
“여전히 베어 마땅한 쓰레기였어.”
나비로제가 칼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노드렉은 움직이지 않았다. 밀도 높은 적막이 투기장에 드리워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알로긴이 입을 열었다.
“···시험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