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76)
177. 검의 제전(20)
#177
“성검, 너가 가질래?”
“뭐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이 성검을 맡아놓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주가 두 번이나 들어간 만큼이나 표정이 진지해서 장난을 치는 걸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딨는지는 알고?”
“응. 알아.”
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투명한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손을 들어 올린 로난이 검지로 그녀의 뺨을 쿡 찔렀다.
“그럼 네가 뽑지 그러냐.”
“그건 안 돼. 당장에라도 옷을 전부 벗어 던지면서 기뻐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별로네. 성검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린이 말했다. 눈매가 가늘어진 걸로 보아 어쩐지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아주 잠깐 고민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좋은 칼.”
“···그게 다야?”
“응. 그렇게 이름을 날릴 정도면 분명 튼튼할 테니까.”
말투가 단호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 이상의 묘사는 나오지 않았다. 린의 얼굴이 점진적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입을 삐죽 내민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멍청이.”
“갑자기 왜 삐졌어 또.”
“너무하잖아. 그래도 마룡을 무찌른 검인데.”
“솔직히 나는 그 말이 진짜인지도 잘 모르겠다. 초대 황제가 오르세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나는 여기 와서 처음 들었거든.”
로난이 말했다. 실제로 요리 못하는 원로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 일화를 평생 모르고 살았을 터였다. 린이 잔뜩 토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자신을 역사에 기록하지 말아 달라고 성검이 부탁했으니까.”
“어엉?”
“하지만 발론은 그 약속을 어겼어. 성검의 뜻을 존중하여 일을 크게 벌이지는 않았지만 측근들에게는 그 사실을 말해 버렸지. 당연히 비밀은 지켜지지 않았고, 거기에 실망한 성검은 여기 파르잔에 와서 자리를 잡았어. 휘두를 사람은 없었지만 그 신성함은 건재했지. 그렇게 빛이 고여드는 파르잔의 웅덩이는 검의 영혼이 모여드는 무덤이 된 거야.”
조막만한 입술 사이로 물 흐르듯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무언가 들어서는 안 될 굉장한 비밀이 귓가를 스쳐 지나간 기분이었다. 로난이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는 그런 걸 다 어떻게 아냐?”
“그냥 알아. 그리고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내 말이 맞다니?”
“그냥 튼튼한 검이라는 거. 사실 오르세를 패퇴시킨 건 성검의 힘이 아니거든.”
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영문 모를 소리에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성검은 그저 발론이 품고 있는 힘을 깨워줬을 뿐이야. 찰나에 불과한 삶을 살아가는 필멸자들 중에서는 간혹 불멸의 존재조차 압도하는 잠재력을 가진 이들이 있지. 발론은 그 중 하나였어.”
“잠재력이라.”
“응. 역대 드래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도록 강하다는 오르세도 그 폭발력 앞에 부상을 입고 도망쳐야 했지. 발론은 제국을 세워 마땅한 사람이었어.”
린은 담담하게 발론이 오르세와 싸우며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꼭 초대 황제가 친구라도 되는듯한 말투였다.
물론 제국군이라는 조직을 처음 만든 작자인 만큼 징벌병 동기들 사이에서는 더한 멸칭으로도 불리고는 했지만 막상 이렇게 들으니 이질감이 상당했다. 부모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놈을 보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린은 로난의 어깨에 머리를 콩콩 부딫혀 가며 말을 이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검이 아니라 휘두르는 사람이야. 너는 그걸 제대로 알고 있고. 물론 그것만 보고 점찍은 건 아니지만.”
“점찍어?”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 부딪히는 것을 멈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난은 린의 머리카락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너···정체가 뭐야?”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해.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타오르는 석양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청아한 바람에는 아무 냄새도 실려 있지 않았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해의 투쟁은 오늘따라 더 격렬하게 느껴졌다.
“설마···.”
린을 응시하던 로난의 눈이 커졌다. 돌이켜 보면 첫만남부터 기묘하던 소녀였다. 문득 하나의 가설이 그의 머릿속에서 벼락처럼 번득였다. 린을 만난 이후에 벌어진 일을 그 가설에 대입해본 로난은 소름이 전신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뭐라 대답하려던 차였다. 성지 쪽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르만.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는 거냐. 어서 나가거라!”
“히이익! 하, 한번만 봐 주세요. 이번에 못 드리면 정말로 못 드릴 것 같단 말이에요···!”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낯익은 소년이 성지의 흙을 밟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검에 닿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걷는 꼴이 제법 우스꽝스러웠다. 그의 등에는 로난이 익히 보아온 길쭉한 상자가 메어져 있었다.
“다르만?”
영문 모를 행동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중에 주면 될 것을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듣기로는 원로들과 검성, 최종 합격자를 제외하고는 들어올 수가 없는 구역이라 했었다. 그를 반증하듯 자신을 은검의 주인이라 소개했던 노파가 다르만을 호통치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드리다니, 뭘 말이냐?”
“저희 스승님이 자이파 님에게 보내는 선물이에요. 마담 올가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거 때문에 파르잔에 왔어요. 진짜, 진짜 잠깐만 시간을 주시면 안될까요?”
다르만은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는 지난 보름 동안 자이파를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나날을 근거 삼아 눈물 어린 호소를 했다.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모습에 원로들이 서로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그때 의무적인 태도로 검령을 뽑던 자이파가 고개를 까닥였다.
“가져와라.”
“거, 검성이여···!”
원로들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자이파 본인이 저렇게 말한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르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가, 감사합니다!”
부리나케 달려온 다르만이 자이파 앞에 섰다. 시커먼 호랑이는 세상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검령 뽑는 것을 멈췄다. 눈에 핏발이 선 것이 어지간히도 피곤해 보였다.
“지, 지금 바로 보여 드릴게요. 그러니까···여기요!”
다르만은 몸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허둥거리며 상자를 열었다. 새하얀 롱소드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켜보던 원로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트렸다.
“저, 저건?!”
“어, 어때요? 정말 잘 만든 검이에요.”
다르만은 조심스레 검을 꺼내 자이파에게 내밀었다. 원로들의 시선은 다르만이 꺼내 든 검에 집중되어 있었다. 두 달도 더 전의 일이었지만 아직도 생생했다. 일곱 명 모두가 그 검을 알고 있었다.
“분명···꿈에서 나온···.”
“맞아요. 틀림없이 그 검이에요.”
두 달 전, 원로들은 전부 같은 꿈을 꾸었다. 별 하나가 성지에 추락하고, 그곳에 새하얗게 빛나는 검 한 자루가 박혀 있는 꿈을. 그들은 그것이 성검이 출현할 징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검의 제전을 앞당겨서 개최했다. 키가 작은 원로 한 명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서, 성검?”
“···역시 그대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가?”
알로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르만의 손에 쥐어진 검은 꿈에서 본 성검과 형태가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사실은 말이 좋아 흡사지 완벽히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려하게 뻗은 검신, 십자형의 폼멜. 검 끝을 타고 흐르는 은은한 백색 광채까지.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던 차였다.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자이파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 검을 내게 주겠다고?”
“네, 네에···저희 스승님이 보내는 선물이에요. 이걸 꼭 받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스승이라. 누구를 말하는 지 모르겠군.”
유일하게 자이파만이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꼬릴로 바닥을 툭툭 치며 선물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있었다.
“모, 모르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예전부터 자이파 님을 흠모하시던 분이에요. 꼭 사용해 주시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엄청 열심히 만드셨어요.”
“그렇군. 확실히 잘 만든 검이다.”
자이파가 끄덕였다. 수인의 예리한 눈빛으로 봐도 흠 잡을 곳이 없는 명검이었다. 굳이 이걸 전해주기 위해 법석을 떤 것이 어느 정도 이해될 정도로.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린 다르만이 자이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그럼 받아 주시는 건가요?”
“아니. 거절한다.”
“어?”
다르만의 얼굴이 굳었다. 등을 돌리는 자이파의 태도는 베일 듯이 단호했다. 벙쪄 있던 다르만이 당황하며 외쳤다.
“자, 자이파 님! 검이 너무 작아서 그런 건가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상황을 위해 특수한 기능이 있거든요. 여기를 잘 보시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검을 받을 수는 없다. 감사하다고만 전해라.”
다르만은 필사적으로 자이파를 붙잡으려 했다. 허나 시커먼 호랑이는 매정하게 성지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가 쫓아서 달려가려 했지만 다른 원로들이 그를 눈빛으로 저지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르만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
“안타깝게 됐구나, 다르만. 일단 돌아가고 의식이 끝나면 이야기하자꾸나. 그리고 그 검은 도대체···.”
몇 명의 원로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다가서는 차였다. 한순간 다르만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위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듯이 커졌다.
“잠깐만, 저 새끼···!”
“으음?!”
위협을 감지한 자이파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언월도를 휘둘렀다. 후웅! 거대한 칼날이 다르만이 서 있던 자리를 가르며 지나갔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때, 자이파의 뒤편에서 다르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
자이파가 고개를 돌렸다. 다르만은 말없이 쥐고 있는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았다. 티없이 하얗던 검신에는 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로난이 땅을 박차며 뛰쳐나갔다. 툭···반으로 쪼개진 언월도의 창대가 바닥에 떨어졌다.
“안 돼.”
린이 읊조렸다. 동시에 자이파의 가슴팍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촤아아악! 덩치가 커서 피가 많은 건지 급소를 찔려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에 있던 두 원로가 노호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맙소사!”
“다르만! 이게 무슨 짓이냐!”
원로라는 직책에 걸맞는 경이로운 반응속도였다. 둘 중 한 명은 자신을 은검의 주인이라 소개했던 노파였다. 마르야의 대검은 우습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양손 도끼가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다시금 다르만의 형체가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맹렬하게 달려든 세 사람이 교차하며 지나갔다. 쇳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르만이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두 원로의 머리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촤아아아···머리 없는 몸의 절단면에서 솟구친 핏물이 다시 한번 성지를 물들였다.
“······!”
한순간 세상이 적막에 빠졌다. 비틀거리던 자이파의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 불어오던 바람마저 갑자기 멎었기에 성지에서는 원로들의 몸과 머리가 널브러지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안 돼지. 남의 성의를 함부로 거절하면.”
다르만이 차게 웃었다. 자이파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잿빛을 띠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덕지덕지 묻어 있던 재가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시 검을 회전시켜 피를 털어낸 그가 고개를 돌렸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익히 보아온 섬전이 다르만을 중심으로 퍼져 나오고 있었다. 낙엽 같은 갈색 눈동자에 서서히 단풍이 들고 있었다. 끝내 로난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가 입을 열었다.
“동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