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77)
178. 검의 제전(21)
#178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동생아.”
다르만의 시선은 로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고동빛의 눈동자는 이제 완연한 주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백발은 꼭 하얀 덤불처럼 보였다.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 다르만의 어깨 위로는 반짝이는 마나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암시하는 바가 명확한 현상이었다. 폭류검이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생이라는 말을 들은 로난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뭐?”
“그때 숲에서는 고마웠다. 기억 봉인이 예상보다 세게 먹히는 탓에 정말로 곤욕을 치를 뻔 했거든. 네 덕분에 상처도 흉지지 않았어.”
다르만은 칼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원래대로라면 신참 사냥꾼들에게 두들겨 맞아 흉터가 생겨야 했을 자리였다. 상처에 손수 포션을 발라 주던 기억을 떠올린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너···.”
그는 잠시 화가 나는 것도 잊은 채 벙쪄 있었다. 도대체 저게 무슨 개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변하는 건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규 옵션이라 쳐도 갑자기 동생이라니? 로난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다르만이 말을 이었다.
“착한 동생을 둬서 기쁘구나.”
그 순간 로난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고민하고 있던 자신이 등신같이 느껴졌다. 일단 팔다리를 다 잘라 놓고 알아보면 해결될 일인 것을. 마나를 머금은 로난의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누가 니 동생이야, 이 새끼야.”
쾅! 잠시 멈췄던 로난이 다시금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흙과 눈이 거칠게 튀어 올랐다. 다르만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검을 들어 올렸다. 카아아앙-! 한낱 날붙이가 충돌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분화구에 메아리쳤다. 다르만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힘이 넘치는군. 검령에 손을 전혀 대지 않았나?”
“무슨···!”
뼈를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첫 합을 나누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창고에서 폭류검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처음부터 모든 힘을 쏟아붓고 있음에도 다르만은 밀려나지 않았다. 교차하며 맞물린 두 개의 칼날이 서로를 잡아먹을 기세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다고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자이파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정말로 네가 아는 다르만이었으니까.”
다르만이 큭큭거렸다. 비열한 웃음소리에서 예전의 유약한 면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불현듯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이 자식도 기억을 봉인해서 올라왔나.’
언젠가 린이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폭류검 또한 나비로제를 마주치는 것을 분기점으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었다. 다르만이 파르잔의 경계망을 뚫은 것도 같은 방법일 터였다. 심호흡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자이파를 죽이는 게 목적이냐?”
“그게 가장 컸지. 운이 좋았어. 성검을 찾는 의식이 아니었다면 제법 애를 먹었겠더군.”
다르만은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자이파를 벨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로난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말마따나 자이파나 원로들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결코 저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때 로난의 얼굴을 뜯어 살피던 다르만이 흥미 섞인 투로 말했다.
“그런데···너는 정말로 닮았구나.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뭐?”
“교주님의 젊었던 시절과 헷갈릴 지경이야. 그 머리카락 색만 제외하면 말이지.”
“교주라니,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다르만의 덩치가 커지며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동글동글하던 눈이 매섭게 좁혀지고 아직 약간 남아 있던 젖살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머지않아 변화를 멈춘 그의 얼굴은 로난이 아는 사람과 매우 닮아 있었다. 다르만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이제 우리가 형제라는 걸 믿겠나, 동생?”
****
“이게···도대체가···.”
성창 기사단의 부단장 티르는 전대미문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도저히 성검을 찾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하고 드러누워 있었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소년 하나가 원로 둘을 살해하고 자이파를 쓰러뜨렸다.
정체불명의 소년은 44번 참가자인 로난과 맹렬한 칼부림을 벌이고 있었다. 검과 검이 격돌하며 나는 금속음이 연달아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싸움이 워낙 빠르고 격렬해서 다른 참가자들은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원로들이 쫓아다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잡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자, 자이파 님···.”
불현듯 티르의 시선이 자이파에게 향했다. 가슴 깊숙이 칼을 맞은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가슴팍의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 나오고 있었다. 발아래로 드리운 피 웅덩이가 빠르게 넓어지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티르가 거친 숨만 들이내쉬던 와중이었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시오.”
“당신은.”
티르가 고개를 돌렸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눈그늘 짙은 사내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잘 빠진 철퇴를 들고 있는 여인 한 명이 과묵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여인을 알아본 티르가 눈썹을 치켜떴다. 대륙 동부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는 자유 용병인 철퇴의 엘레나였다.
“엘레나? 저 자는 왜 여기에···.”
“아란 파르잔에서 함께 올라온 동료요. 마침 둘이서 자이파 님을 들어 옮기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는데, 잘 되었군.”
“잠깐, 들어서 옮긴다는 말인즉슨···.”
눈그늘 짙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이파를 구할 심산으로 왔다고 설명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죽어야 할 출혈량이지만 검성께서는 웨어타이거니 어찌어찌 될 것 같소. 따라오시오.”
“어엇, 자, 잠깐만!”
사내와 엘레나가 자이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티르는 얼떨결에 그들을 뒤따랐다. 제법 멀었지만 세 사람 모두 숙련된 전사인지라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크르르르···.”
“거, 검성. 조금만 참으십시오.”
자이파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상처 입은 맹수의 모습이었다. 눈그늘 짙은 사내가 품에서 포션을 꺼내드는 차였다. 별안간 그림자 하나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착지했다.
“과연 대단하네. 이런 방법으로 한 번에 정리할 줄이야.”
티르의 눈이 커졌다. 그림자의 정체는 웬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남자처럼 짧게 머리를 친 그녀는 다르만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주홍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눈그늘 짙은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당신은 본 적 없는 것 같은···”
그 순간 여인의 손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사내의 목 위로 붉은 선이 그어지나 싶더니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티르와 엘레나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무슨···!”
두 사람 모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여인의 손에는 어느새 두 자루의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검신에 묻은 피를 핥은 그녀가 배시시 미소지었다.
“으흠. 역시 수인보다는 인간 피가 맛있다니까.”
“이, 이년이!”
그녀가 적인 것을 눈치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티르와 엘레나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태연하게 피를 핥던 여인은 그들이 한 발자국 이내로 접근하고 나서야 몸을 움직였다.
먼저 달려온 엘레나가 횡으로 철퇴를 휘둘렀다. 마나를 머금어 급가속된 일격은 묵묵히 할 이를 하는 과묵함과 더불어 그녀의 명성을 드높여준 기술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다리를 고정한 채 상체만 뒤로 젖히는 것으로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엘레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너···!”
“성검 찾는다고 힘만 안 낭비했어도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아깝네.”
키득거리던 여인이 단검을 휘둘렀다. 사각! 엘레나의 가슴 위로 작은 호가 그어짐과 동시에 그녀의 가슴과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커억.”
“이크, 묻을라.”
여인은 잽싸게 뒤로 제비를 넘으며 몸을 물렸다. 심장을 양단당한 엘레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영원히 과묵해진 그녀를 본 티르가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단검에 묻은 피를 핥던 여인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먹거나 마시는 건 좋은데 몸에 묻는 건 싫거든. 왜, 꿀도 그렇잖아.”
“그, 그쪽은 도대체 정체가 뭐요···?”
“어차피 말해도 모를 텐데? 우리는 뤼코포스야. 내 이름은 아지에고.”
“뤼···코포스?”
아지에라는 이름의 여인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티르가 더듬거렸다. 픽 웃은 아지에가 방금까지 자기가 핥던 단검을 투척했다.
“봐봐. 모르지.”
“허어어억!”
단검은 일직선을 그리며 티르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비극적인 미래를 예측한 그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예리한 칼끝이 티르의 미간을 파고들려는 찰나였다. 캉! 무언가 빠르고 날카로운 것이 단검을 쳐냈다. 그것은 길고 넓은 대태도의 검신이었다. 자신의 앞으로 치고 나가는 어느 여인의 뒷모습에 티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나, 나비로제 님!”
“이크.”
단검을 튕겨낸 나비로제가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지에가 다급하게 어깨를 비틀자 칼날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비로제를 돌아본 아지에가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너는 아직 쌩쌩하네?”
“정체가 뭐냐.”
나비로제가 낮게 쏘아붙였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수십 개의 검령과 교감했음에도 그녀의 눈빛에는 아직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지에가 눈웃음쳤다.
“하긴 그러니까 크로덴이 당한 거겠지. 애초에 그 등신을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네뷸라 클라지에 소속의 뤼코포스. 그 이상을 듣고 싶으면 재량껏 노력해 봐.”
“그렇게 하지.”
사뿐하게 도약한 아지에가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파고들었다. 두 자루의 단검은 벌의 침처럼 매섭게 움직였다. 캉! 날붙이가 부딫힐 때마다 허공에서 불씨가 튀어 올랐다.
“역시 강하네.”
“잡스럽기는···.”
합을 겨루던 나비로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검을 다루는 실력 자체는 나비로제 쪽이 우위였으나 아지에의 발놀림이 워낙에 잽싸고 변칙적이라 결정타를 내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제비를 넘고, 물구나무를 서고, 때로는 신발에 달린 비밀 독침을 내지르며 나비로제를 공격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제비를 넘다가 착지점에서 돌부리를 밟은 그녀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얼레.”
나비로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진녹색으로 빛나는 대태도가 아지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칼날이 여인의 두개골을 쪼개 버리려는 찰나였다. 카아앙! 요란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아지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위험했네.”
“이건···.”
나비로제의 얼굴이 굳었다. 대태도의 칼날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간격을 두고 그녀의 눈앞에서 멈춰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장막이 그녀의 검을 가로막고 있었다.
분명 폭류검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기술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줘 봐도 장막은 부서지지 않았다. 묘기를 부리듯이 단검을 돌리던 아지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슬슬 제대로 해볼까.”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지금까지와는 격을 달리하는 살기가 아지에의 어깨를 타고 번져 나왔다. 칼자루를 쥔 나비로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빌어먹을!”
캉! 로난의 손에서 칼자루가 떨어졌다. 원을 그리며 날아간 라만차가 바닥에 꽂혔다. 다르만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느냐 동생아. 동작이 눈에 띄게 느려졌는데.”
“닥쳐···!”
다르만의 검격은 칼을 주울 틈을 주지 않고 파고들었다. 곧바로 단검 이미르를 뽑아든 로난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쾅! 호를 그리며 떨어진 검이 이미르의 칼배를 강타했다.
“크윽!”
“형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충격이라도 받은 게냐?”
충격은 손목을 타고 무릎까지 전달되었다. 다르만의 얼굴이 변한 직후 로난은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다. 도저히 전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진짜 그렇게 된 건가?’
다르만의 면상은 그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약간 더 못생기기는 했지만 누군가에게 쌍둥이라 소개하면 이견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좆같은 일이었지만 로난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는 요소는 따로 있었다. 그는 자신과 다르만의 원판이 되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교주님이라고 했지. 분명.’
다르만은 자신을 두고 교주님과 못 알아볼 정도로 닮았다고 했었다. 그 한 마디가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뒀던 역겨운 가설을 증명하려 들고 있었다. 계속해서 부정해 왔던 출생의 비밀.
‘역시 내 애비 되는 새끼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온 신경을 기울여서 상대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이래서는 안 됐다. 그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전투에 집중하려는 차였다. 카장창! 다르만의 검격을 받아 내던 이미르가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졌다.
“뭔, 씨발···!”
“안타깝구나. 시커먼 칼은 제법 쓸만하던데.”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다르만이 찌르기로 파고들었다. 도저히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거리였다. 죽음을 직감한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하얀 칼날이 로난의 목울대를 파고들려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로난의 뒷덜미를 잡아당김과 동시에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푹! 묘하게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언가를 꿰뚫은 다르만의 검이 멈춰섰다.
“이건 또 뭐야.”
“아윽.”
로난의 눈이 커졌다. 작은 어깨가 경련하고 있었다. 벙쪄 있던 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린?”
하얀 검신은 린의 등을 뚫고 자라나 있었다. 붉은 피가 그녀의 옷 위로 번지고 있었다. 검에 관통당한 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입을 오물거리며 뭐라고 말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 참,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다르만이 눈살을 찌푸렸다. 로난의 시간이 잠시 멈췄다. 린의 얼굴은 빠르게 창백해지고 있었다. 작은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는 그녀의 새하얀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더욱 붉게 보였다.
“너.”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로난이 바닥에 박힌 라만차를 뽑아들었다. 다르만이 칼을 휘적이자 린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워낙에 가벼워서 그런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로난은 양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쥔 채 다르만에게 달려들었다.
“애인이라도 됐었나?”
다르만이 조소했다. 태연하게 검을 들어올린 그가 방어 자세를 취했다. 로난이 있는 힘을 다해 참격을 날렸으나 분노에 지배당해 궤도가 뻔한 공격은 너무나도 쉽게 가로막혔다.
“아직 배울 게 많구나 동생아. 나도 이제 일을 해야 하니 슬슬 끝내자.”
다르만이 픽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캉! 쇳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붉게 달아오른 라만차로부터 물보라 같은 검기가 쏟아져 나왔다. 다르만의 얼굴이 굳었다. 위험을 감지한 그가 황급히 몸을 물렸다.
“으윽!”
하지만 완전히 피하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응어리진 예기가 그의 몸 곳곳을 찢으면서 지나갔다. 촤아악! 그의 왼쪽 옆구리와 오른쪽 어깻죽지가 상어에게 물린 것처럼 뜯겨 나갔다. 줄곧 여유롭던 다르만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감히!”
불현듯 다르만의 어깨 위로 반짝이는 마나가 회오리치며 솟구쳤다. 주교를 맡았던 테라닐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규모였다. 하지만 지금의 로난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은 그가 말없이 다르만을 향해 쇄도했다.
“이···짐승 같은 놈···!”
다르만이 오른팔을 쳐들었다. 그의 어깨 위로 한 쌍의 거대한 날개가 펼쳐짐과 동시에 거센 바람이 로난을 덮쳤다. 거인의 권능 중 하나인 광풍이었다. 콰아앙! 바람에 휩쓸린 로난이 저 멀리 튕겨 나갔다.
“커억!”
태풍을 압축해 놓은 듯한 바람이었다. 직선으로 날아간 로난이 분화구의 외벽에 충돌했다. 척추가 모조리 박살나는 듯한 충격과 함께 그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가 막 몸을 뽑아내려는 차였다. 쾅! 한 번의 도약으로 거리를 좁힌 다르만이 로난의 가슴에 발차기를 꽂았다.
“······!”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또 하나의 작은 분화구가 로난을 중심으로 생성되었다. 콰과광!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외벽이 무너지며 로난과 함께 산 아래로 추락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르만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후우···거기서 머리나 좀 식히고 있어라.”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가 몸을 돌렸다. 어깻죽지와 옆구리의 상처가 깊었다. 하마터면 정말 당할 뻔했다.
다르만은 품에서 비상용 포션을 꺼내 몸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성지를 둘러보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분명히 방금 자신이 찔러 죽인 계집아이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