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80)
181. 오러(3)
#181
[내 예상보다 훨씬 굉장하네. 기분이 어때?]“···과거로 돌아간 것 같아.”
[과거?]린이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신이 검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런 게 있어.”
이게 린이 말했던 잠재력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과거 아하유테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을 당시와 매우 비슷한 감각이었다. 저주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을지언정 결코 물러나지 않았던 시절의.
돌이켜 보면 그때 로난을 움직인 동기도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복수심 따위가 아니라 그냥 해야 해서 한 거였다. 빡빡이들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은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가자.”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검격에 잘려나간 바윗더미가 무너지자 그의 얼굴 위로 석양이 쏟아졌다. 지금껏 다루지 못했던 힘이 심장을 타고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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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라만차가 다르만의 가슴을 꿰뚫었다. 새하얀 칼날이 등 뒤로 빠져나왔다. 꼬챙이가 된 다르만이 피를 토했다. 로난이 검을 앞으로 밀며 위로 들어 올리자 그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커어억!”
“어때. 너도 아프지.”
로난이 낮게 읊조렸다. 다르만이 린에게 한 짓을 고스란히 돌려준 것이었다. 진득한 핏물이 얼굴 위로 쏟아지고 있었지만 로난은 개의치 않고 칼날을 비틀었다. 카득. 칼날이 살을 헤집어 놓자 그의 입에서 고통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숨을 고른 다르만이 로난을 노려보았다.
“이, 이게···!”
로난의 얼굴은 담담하다 못해 평온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노을과 같은 색으로 일렁이는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다르만의 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너한테는 물어볼게 많으니까.”
다르만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혈기에 날뛰는 애송이에 불과하던 조금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의무적으로 살인을 수행하는 도살자, 혹은 군인에게서나 느낄 법한 살기가 로난에게서 배어나오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
다르만이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면 승패를 뒤집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단순히 로난의 실력이 갑자기 향상되서만은 아니었다.
차라리 기량에서만 밀린다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얼마든지 있었을 터였다. 어차피 일정한 경지를 넘어선 검사들의 싸움은 찰나의 방심이나 난조 때문에 승패가 결정되니까. 다르만이 자이파라는 괴물에게 한 방을 먹일 수 있던 것도 같은 원리였다.
그를 좌절하게 한 것은 로난의 담담한 태도였다.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무수한 훈련으로 단련된 그는 로난이 자신에게서 빼낼 정보를 모두 뽑아낸 뒤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라는 미래를 어렵잖게 예측할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힘을 억제당하고 있어.’
게다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마나를 운용할 수 없었다. 내장을 헤집고 있는 검이 온몸의 힘을 빨아들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주 약간의 틈만 있다면···.’
이대로는 정말 끝이었다. 다르만의 머리가 빠르게 뜨거워졌다. 전략적인 후퇴도, 비장의 수도 이 상태로는 시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틈을 만들어야 했다. 심호흡한 그가 입을 열었다.
“살려달라는 말은···통하지 않겠지.”
“당연한 걸 물어보고 있어.”
“···역시. 그렇다면 저승길 선물로 좋은 걸 알려주지.”
다르만이 말을 할 때마다 피비린내가 풍겼다. 거친 호흡을 이어나가던 그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와 나는, 크흐···사실 형제가 아니다.”
“뭐라?”
“그런데 왜 우리가 닮았을 것 같나. 응?”
말뜻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로난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다르만이 자신의 배를 꿰고 있는 검신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칼날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크으으!”
다르만은 검신을 왼쪽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동시에 몸의 정중앙에 자리하던 라만차가 그의 옆구리를 뚫고 빠져 나왔다. 한층 더 예리해진 칼날은 다르만의 뼈와 살을 버터라도 되는 것처럼 부드럽게 잘라냈다.
촤아악! 잘려나간 틈이 벌어지며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바닥에 엎어진 다르만이 황급히 몸을 굴렸다. 쾅! 로난의 발이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떨어졌다. 검에서 몸이 떨어지자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서둘러 몸을 일으킨 그가 로난을 등진 채 땅을 박찼다. 붉게 물든 흙이 파도처럼 솟구쳤다. 순식간에 로난과 거리를 벌린 다르만이 쾌재를 외쳤다.
“커헉, 헉···됐다!”
“추하기는.”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용물을 질질 흘리면서 달아나는 꼴이 썩 보기 좋지 않았다. 자신의 체력도 많이 소진되어 있었기에 그는 제자리에 선 채 검을 휘둘렀다. 붉은 초승달 하나가 다르만을 향해 쏘아졌다.
“조금···조금만 더···!”
주문처럼 들리는 소리가 다르만의 입에서 빠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르만은 발을 현란하게 놀리며 회피를 시도했다. 원래대로라면 무리 없이 피할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로난의 검기는 일반적인 검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다르만과 인접한 위치까지 다다른 초승달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응어리진 예기의 덩어리들이 그를 덮쳤다.
“크아아아악!”
콰아앙! 검기의 물보라를 맞은 다르만이 공성추에 치인 것처럼 튕겨 나갔다. 요란한 폭발음이 분화구에 메아리쳤다. 로난은 천천히 엎어져 있는 다르만에게 다가갔다. 걸레짝이 된 다르만의 몸에는 오른쪽 다리가 붙어있지 않았다. 그는 벌레처럼 엉금엉금 기어가는 와중에도 영문 모를 말을 주절대고 있었다.
“을···강림하되···나는···.”
“싹수없게 말을 하다가 말고 있어.”
콰직! 로난의 발이 다르만의 등 위로 떨어졌다. 먼젓번에 찢어진 옆구리로 창자가 흘러 나왔다. 꼼짝할 수 없게 된 다르만이 몸을 뒤틀었지만 로난은 개의치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이미 엉망이 되어 버린 다르만의 팔다리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순식간에 할 일을 마친 라만차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남아 있는 세 개의 팔다리가 그의 몸에서 분리됐다.
촤아아악! 세 갈래의 피분수와 함께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목을 짓밟아 제압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냐 그거. 형제가 아니라니?”
“크, 크흐흐···글쎄. 무슨 뜻일까. 나도 오늘 너를 보고서야 깨달았다···처음에는 교주께서 뿌리고 잊어버린 씨인 줄만 알았는데···근본적인 무언가 달라···.”
다르만이 띄엄띄엄 말했다. 맥없는 웃음이 그의 입가를 감돌고 있었다.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닌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머리가 이상해진 걸까? 로난이 누르는 힘을 더하며 질문했다.
“근본적인 거라니?”
“···글쎄, 하지만 이거 하나는···알려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다르만이 이빨을 강하게 부딪혔다. 딱! 그를 중심으로 발현된 기운이 파문을 그리며 터져 나왔다. 보이지 않는 힘에 튕겨 나간 로난이 오십 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에 착지했다.
“개새끼, 또 말하다가 말았네.”
고개를 든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르만의 몸은 새하얀 용오름에 휘감겨 있었다. 성지 전체로 번져 나가는 반짝이는 마나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슬슬 위험한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린에게서 받은 가불이 끝나가고 있었다. 숨을 한번 들이 내쉴 때마다 뼈마디가 저려왔다.
“흐으읍···!”
무슨 개수작을 부리는 건지는 몰라도 이번에 끝을 내야 했다. 마나로 강화된 로난의 허벅지가 맹렬하게 부풀어 올랐다. 쾅! 지면을 박차며 도약한 그의 검이 용오름에 닿으려는 차였다. 기괴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늦었다. 반푼아.】
“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지저의 수맥처럼 낮은 목소리에서는 명백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불현듯 용오름을 찢으며 튀어나온 주먹이 로난을 강타했다. 콰아앙! 분화구의 외곽까지 날아간 그가 석벽의 한복판에 처박혔다.
“크억!”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쇠구슬 수백 개가 머릿속에서 요동치는 것 같았다. 칼을 눕혀 방어했음에도 이 정도의 충격이라니. 곧바로 몸을 떼어낸 그가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아까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설마 이 권능을 쓰게 될 줄이야. 나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걸 칭찬하마.】
“너는···.”
고개를 든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용오름이 바람에 뒤섞이며 흩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다시 팔다리가 자라난 다르만이 서 있었다.
문제는 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르만의 몸집은 전체적으로 두 배 정도 커져 있었다. 설원처럼 완연한 백색으로 변한 피부가 눈에 띄었다. 떡 벌어진 어깨 뒤쪽에는 조류를 연상케 하는 날개 한 쌍이 자라나 있었다.
아주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크기나 위세 모두 원본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어떤 존재에서 힘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굳어 있던 로난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아하유테.”
【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니. 역시 너는 뭔가 있구나.】
다르만이 말했다.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방향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맙소사, 괴물이다!”
“저, 저건 또 뭐야?”
그들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막 세 명의 끄나풀을 제거하고 로난에게 가세하려던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유이하게 패닉에 빠지지 않은 나비로제와 슐리펜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진녹색 초승달과 바람의 칼날이 동시에 다르만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앙! 지면마저 뒤엎는 폭발이 그의 형체를 집어삼켰다. 나비로제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것을 눈치챘다. 과연 폭발이 가라앉자 건재한 다르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구형의 방어막은 주변 공간을 일그러져 보이게 할 정도로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얼핏 봐도 폭류검이나 아지에가 다루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했다.
【필멸자의 강함 따위는 부질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도망쳐라!”
나비로제가 외쳤다. 허나 다르만의 목표는 그들이 아니었다. 그가 팔을 들어 올리자 새하얗게 변한 손아귀로 주변의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빛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창이 다르만의 손에 쥐어졌다.
“저건···!”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역시나 익숙한 기술이었다. 광풍을 일으키며 날아오른 다르만이 로난에게 창을 내던졌다.
【사라져라.】
벼락이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찰나 한 눈에 담기조차 힘든 거대한 폭발이 로난이 있던 자리를 뒤덮었다. 지름이 30m는 될법한 빛의 기둥이 저 하늘 위로 솟구쳤다. 다리가 풀린 참가자 몇 명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로난!”
슐리펜이 소리쳤다.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보이지 않는 폭발이었다. 빛이 가라앉자 완전히 파괴된 분화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라도 남겨갈 걸 그랬군.】
다르만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연기가 빛의 기둥이 솟구쳤던 자리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허공에서 날갯짓하며 로난이 존재했던 자리를 내려보던 와중이었다. 파아아···! 불현듯 연기를 뚫고 조금 전에 보았던 주홍색 빛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으음?!】
다르만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신의 일부를 받아들였음에도 직시할 수 없었다. 다시금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당겨지는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지켜보던 연기 속에 들어와 있었다.
【뭐···?】
다르만의 미간이 좁혀졌다. 당황을 감추지 못한 그가 막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찰나였다. 형용할 수 없이 맹렬한 살기가 뒤통수를 찔렀다. 다급히 고개를 돌린 다르만이 헛숨을 들이켰다. 칼을 뽑을 준비를 마친 로난이 코앞까지 들이닥쳐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로난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멀쩡했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에 다르만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눈을 응시하던 로난이 시큰둥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안한데, 나는 원본도 상대해 봤거든.”
다르만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허나 로난의 검은 이미 그의 목에 닿아 있었다. 성검과 결합한 라만차가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다르만의 목 위로 하얀 선이 그어졌다.
【커억!】
“엄살이 심하네. 그 새끼는 적어도 소리는 안 지르던데.”
로난이 말했다. 동시에 검이 지나간 자리에서 푸른 피가 솟구쳤다. 단칼에 목뼈를 베지 못한 것을 감지한 그가 혀를 찼다. 다르만이 덜렁거리는 목을 부여잡으며 비상했다.
【크아아아악!】
파란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다르만의 날개가 펼쳐지는 순간 불어닥친 광풍이 연기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생존자들 사이에서 다시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를 올려보던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이제 올려보는건 지긋지긋해.”
얼굴을 적시는 핏물이 차가웠다. 문득 오러에 대해 설명하던 나비로제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자신의 자아나 욕망이 반영되어 오러를 구성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얼추 맞는 것 같았다.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짐작가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하늘을 총횡무진하던 아하유테를 그저 지켜만 봐야 했던 무력함. 검이 닿는 거리에 대한 집착. 언젠가 아데샨과 어깨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눴던 노을과 얽힌 이야기.
아마 능력의 겉모습을 결정지은 것은 마지막 사유일 터였다. 죽지 않기 위해 온 세상의 빛을 끌어당긴다라. 다시 생각해도 모양새 나는 말이었다. 로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내려와라. 다르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라만차의 검신이 다시금 노을의 색으로 물들었다. 스며 나온 섬광이 날갯짓하며 달아나던 다르만을 감쌌다. 찰나 공간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석양을 닮은 빛무리가 그를 로난의 눈앞까지 끌어다 놓았다.
【네놈···!】
다르만이 뭐라 외쳤으나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팔이 한순간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유려한 검로가 다르만의 몸 위를 어지럽게 가로질렀다. 마침내 검격을 멈춘 그가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내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일곱 조각으로 찢어진 다르만의 몸이 폭발하듯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