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83)
184. 일상을 되짚다
#184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로난은 몇 초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나바르도제의 학부모 참관이라니. 열 번 정도 삶을 다시 살더라도 자의로는 떠올리지 못할 것 같은 단어였다.
“···입학식이 정확히 언제죠?”
“일주일 뒤라네.”
“좆됐네···황제께서는 알아요?”
“아마도 아직 모르실 걸세. 후···편지가 이런 식으로 와서 이걸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지 아닌지도 판단이 서질 않는군.”
크라티르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내장이라도 꺼내서 보여 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바르도제의 편지를 로난에게 내밀었다. 진홍색 종이의 한복판에는 단촐한 글귀 한 줄이 필기체로 적혀 있었다.
[간다. 엿새 뒤.]“시발.”
로난이 다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십년지기 친구에게 쓰는 장난 편지도 이딴 식은 아닐 것 같았다. 문제는 그녀의 일방적인 통보에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바르도제의 행차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끔씩 제국을 방문하면 그 날은 이유를 불문하고 임시적인 공휴일이 되었다. 상인들은 점포의 문을 닫고, 시민들은 잠시 집 안에 대기하며 불의 어머니에 대한 예를 표했다.
‘아마 신에 가장 가까운 생물이겠지. 신이라는게 존재한다면.’
그런 거물이 고작 아들의 입학식을 본다는 이유만으로 필레온에 행차한다니, 크라티르의 곤혹스러운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문득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로난이 아랫입술을 질겅였다.
나바르도제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세간에 전해져 오는 그녀의 위상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 거인 중 하나였던 두아루를 태워 죽일 당시 그녀가 내뿜었던 불꽃은 수천 킬로미터씩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아침이 된 줄 알고 일어났었지. 한참 잘 자고 있었는데 말야.’
하늘을 찢으며 솟구치는 불기둥은 잠시나마 세계에서 밤이라는 개념을 말소시켰다. 용의 도시로 파견된 제국의 전령들은 새카만 숯이 되어 죽은 거인과 탈진해서 쓰러진 나바르도제, 그리고 무수히 많은 용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허나 불행히도 거인은 한 명이 아니었다. 아직 니르바나와 아하유테가 남아 있었고, 힘을 소진한 나바르도제는 다음 싸움에 참전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인류는 로르혼이라는 대마법사를 잃는 것으로 모자라 대륙의 삼 할 정도가 갈려 나가는 피해를 입어야 했다. 결국은 멸망해 버렸고. 신음하던 크라티르가 입을 열었다.
“후···일단 이 건은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네. 고민만 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스승님께 자문을 구해야 할 것 같군.”
“스승이면···로르혼 님한테요?”
“그래. 함부로 결정할 일이 아닐세.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연통이 왔는데 자네들의 안부를 묻더군. 특히 아셀 군에게 관심이 많으셨네.”
크라티르의 얼굴은 아까보다 한결 나아져 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접대용 원탁 위의 공간이 뒤집히며 찻잔과 간식거리가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하네. 그럼 밀린 이야기를 나눠 보세나.”
“제 이야기도 마냥 유쾌하지는 않는데. 괜찮겠어요?”
“다음주면 불의 어머니께서 내방하는 마당에 뭐가 더 심각하겠나. 괜찮으니 말해 보게.”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생각해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담담한 어투로 파르잔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크리티르와의 접견에는 한 시간 정도가 소모되었다. 일부러 세상의 멸망과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기에 그가 찻잔을 집어던지며 비명을 지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딱히 늙은이의 정신 건강을 걱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밍에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로난은 곧바로 동아리 구역으로 향했다. 구름 없는 하늘이 아름다웠다. 나바르도제의 방문에 대해 생각하던 로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기회야.’
그녀의 방문에 대해 생각하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질색했지만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시간이 다하기 전에 한번 찾아가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찾아온다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이참에 언질해 놔야겠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애초에 나바르도제를 설득하는 것은 회귀한 로난의 목표 중 하나였다. 거인을 태워 죽인 전적이 있는 용의 가치는 이루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별의 가호를 파괴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녀와 대화를 나눌 방법이 통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고고한 드래곤이 자신과 말을 섞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입학식 도중에 오줌이라도 갈겨서 주의를 끌어야 하나? 성격이 더럽다고 들었는데 개소리를 지껄인다고 불을 뿜으면 어쩌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로난은 어느새 동아리와 이어진 창고에 도착했다. 느닷없이 요란한 환성이 쏟아져 나왔다.
“퇴원 축하해!”
“아씨, 깜짝이야.”
지하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소리였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아셀과 마르야를 비롯한 특급 모험 동아리의 부원들이 여전히 광활한 훈련장을 배경으로 모여 있었다.
“너희들···.”
“로, 로난. 이제 몸은 다 나았어?”
아셀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더 길어진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앞머리 한구석에는 겨울의 마녀가 깃들며 생겨난 브릿지가 여전히 하얀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한 달만의 재회였다. 생글생글 웃는 것이 다들 건강해 보였다. 훌쩍 뛰어오른 마르야가 로난의 목에 매달렸다.
“커억!”
“진짜 괜찮아? 너 엄청나게 오래 잤어. 정말 엄청나게.”
“괜찮았는데 이제 아파지려고 그래.”
여전히 굉장한 완력이었다. 목이 졸린 로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그녀가 손을 뗐다.
“미, 미안. 요즘 힘 조절이 잘 안되네. 아하하···.”
“괜찮아. 그나저나 니들 동아리 활동 간 거 아니었어? 그리폰이 어쩌고 하는걸 분명히 들은 것 같은데.”
“그게,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우리 귀염둥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마르야가 아셀을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아셀의 얼굴이 머리카락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색으로 물들었다. 쪼다같은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도 연애 관계에는 별로 진전이 없는 듯했다. 그들의 뒤에 서 있던 브라움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 고작 한 달인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검의 제전은 어땠나?”
“뭐, 나름대로 괜찮았지.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숙연해질게 분명하니까 다음에 해 줄게. 방패는 이제 좀 잘 다루냐?”
“하하, 말해서 뭐하나. 여지껏 졸업반의 누구도 나의 브람스를 뚫지 못했다!”
브라움은 자신의 등에 메어져 있는 대방패를 텅텅 두드렸다. 로난이 그란 카파도키아에서 맞춰 준 방패였다.
이름까지 지어준 걸 보니 어지간히도 아끼는 듯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로난의 한쪽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그래?”
“잠깐···!”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헛숨을 들이킨 브라움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카아아앙! 허공에서 불씨가 튀기며 쇳소리가 작렬했다.
“오.”
“와, 와하하하···! 봤느냐, 내가 막았다!”
로난이 입을 둥그렇게 말며 감탄했다. 하얀 칼날은 방패에 맞닿은 채 멈춰 있었다. 정말 가볍게 휘두른 거였지만 그래도 막아낼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제법이네, 브라움.”
“여전히 무시무시한 쾌검이군. 살다 보니 내가 그 로난의 검을 막는 날이 올 줄이야, 기쁘다!”
브라움은 허리까지 젖혀 가며 웃어젖혔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만큼이나 비보를 전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무안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 미안하다.”
“와하하하···음? 뭐가 말이지?”
“다음에는 다른 대장장이 말고 도론에게 직접 문의해 봐. 그 정도 실력이면 만들어 줄 거야.”
영문 모를 소리에 브라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대방패 위로 하얀 선이 수직으로 그어졌다. 땡그랑! 깔끔하게 좌우로 나뉘어진 방패가 바닥에 떨어졌다.
“따으억! 브람스!”
“생각보다 더 날카롭네···주의해야겠어.”
로난이 라만차의 칼날을 보며 중얼거렸다. 원래도 뛰어난 절삭력을 자랑했지만 성검화가 진행된 이후 훨씬 더 성능이 흉악해져 있었다.
“우오오오! 나, 나의 동반자가 어찌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가. 나는, 나는···!”
브라움의 절규가 훈련장을 가득 메웠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조각난 방패를 끌어안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누가 보면 연인이라도 죽은 줄 오해할 모습이었다.
별안간 그의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현상이었다. 머지않아 웬 은발의 소녀 하나가 그림자를 찢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브라움···시끄러워.”
“허억! 미, 미안하오. 깨셨소?”
“응. 너 때문에.”
필레온 유일의 뱀파이어인 오필리아였다. 어째 안 보이나 싶었는데 동아리 건물 안쪽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브라움의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새하얀 손가락이 경동맥이 지나가는 자리 주변을 빙글빙글 멤돌았다.
주접을 떠는 것을 멈춘 브라움이 뱀 앞의 쥐처럼 굳어 버렸다. 로난에게 고개를 돌린 오필리아가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안녕 로난···그새 더 강해졌네. 비결이 뭐야?”
“좆같은 일을 많이 겪으면 돼. 그런데 너, 그 돌은···.”
로난이 검지를 뻗어 오필리아를 가리켰다. 하얗고 맨질맨질한 돌멩이 하나가 그녀의 옆구리에 끼어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많이 본 돌이었다. 마르야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외쳤다.
“아앗! 어디 갔나 했더니!”
뒤이어 고개를 돌린 아셀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로난을 포함하여 세 사람만이 정체를 알고 있는 돌이었다. 오필리아가 돌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즘···베개로 쓰는 돌이야. 예쁘고···마력이 느껴져서 좋아.”
“···베개?”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오필리아는 저 돌이 원래는 엘프 노인이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모르고 있을 터였다.
악몽에 시달릴 만도 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던 것 같았다. 헌데 저걸 단순히 천벌 받을 일로 봐야 할까?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던 로난이 바위를 돌려받으려는 마르야를 제지했다.
“왜 막아? 저건···”
“나도 알아. 그런데 미소녀의 베개가 된다면 행복한 거 아닐까? 생각해 보면 둘이 나이도 비슷할 거 같은데.”
“···미친놈.”
마르야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럼에도 로난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바위가 된 사란테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도마뱀 새끼는 어디 갔냐?”
“도마뱀? 아, 이타르간드는 입학 준비 때문에 아드렌으로 돌아갔어. 입학식 전날이나 당일에 돌아온다고 하더라.”
“그러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무난한 반응을 보아하니 뭐가 같이 오는지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다들 반가웠다. 불현듯 로난은 자신이 눈앞의 소년소녀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징벌병 시절에도 느꼈던 건데, 역시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인 듯했다. 로난이 말했다.
“어쨌든 잘 지냈다면 됐다. 오랜만이라 그런데 아카데미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나 좀 알려줘.”
“물론이지. 그런데 그 전에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몸은 이제 완전히 괜찮아진거 맞지?”
마르야가 물었다. 뜻 모를 질문에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할 일? 뭐, 그렇기는 한데···.”
“그럼 우리랑 대련해. 진지하게.”
“엉?”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언제나 제안은 자신 쪽에서 했지, 먼저 권유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생각해 보니 네가 저주를 풀고 난 뒤로는 대련한 적이 없더라고. 우리도 나름 열심히 했거든.”
마르야의 말투가 진지했다. 로난은 다른 부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결의에 찬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색이 다른 눈동자에서는 다양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긴장감, 두려움, 반드시 이기고자 하는 호승심 등···피식 웃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원한다면야.”
부원 하나는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톡톡 두드렸다. 검집의 틈새로 노을색 빛무리가 회답하듯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는데,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185 불의 어머니(1)
#185
대련이 끝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는 덤벼오는 부원이 없는 것을 확인한 로난이 흡족스레 미소 지었다.
“다들 고생했어. 이제 어지간한 전쟁터에 던져도 살아남겠네.”
진심어린 칭찬이었다. 못보던 2년 동안 부원들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어 있었다. 재능과 노력, 훌륭한 지도가 맞물려서 탄생한 황금 같은 결과였다. 물론 로난은 한 번도 사망 판정을 당하지 않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기에 따지고 들 생각은 없었다.
“니들 진짜 많이 늘었어.”
그 한 마디를 덧붙인 로난이 납도했다. 찰칵. 검집과 검이 맞물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린과 결합한 라만차는 짤막하게나마 폼멜이 생겨서 검을 더 안정적으로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허억···말도 안 돼···헉,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오오···브람스에 이어 하인드까지···.”
“우엑! 우에에에!”
대련을 마친 부원들은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마르야와 브라움은 대자로 팔을 벌린 채 뻗어 있었고, 마나를 거의 고갈당한 아셀은 벽을 짚고 구토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추해지기 전에 기권한 오필리아는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본인이 와인이라 주장하는 액체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의 너는···발자크랑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아.”
“그래야지. 내가 어떤 고생을 했는데.”
로난이 낄낄거렸다. 발자크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오필리아를 사모하는 그림자 대공의 동생. 선혈의 정수를 빼앗아서 자로딘에게 줬었는데, 두 사람 다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너무 좌절하지는 마. 니들이 한 짓을 봐라.”
로난은 턱 끝을 들어 엉망이 된 훈련장을 가리켰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야수가 만취한 상태로 난동을 부린 것 같았다.
마르야의 대검이 작렬했던 자리는 하나같이 거대한 균열을 동반하고 있었다. 로난과 슐리펜이 남겼던 검흔과 비교해 봐도 절대 꿇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브라움 또한 엄청난 분전을 보여 주었다. 비록 하인드라는 이름의 임시 대방패마저 명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만약 이곳이 전쟁터고 적이 로난이 아니라 다른 불특정 다수의 적군이었다면 그는 부원 전원의 목숨을 구했을 터였다.
“우으으으···너, 너무해. 아무리 오러라고 해도 저런 게 어딨어어···.”
【괜찮단다 아이야. 네가 약한 게 아니라 저 악마가 이상한 거란다.】
아셀이 입가를 닦으며 울먹거렸다. 그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바쥬라로부터 겨울 마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열이 뻗친 로난이 칼을 뽑아들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파아아···! 검신에서 발현된 주홍색 빛무리가 아셀의 몸을 휘감았다. 둘 사이의 간격이 좁혀졌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닥쳐온 로난의 모습에 아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흐야악! 사, 살려줘!”
“너한테만큼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인마. 너무한 건 저런 게 너무하다고 하는 거야.”
로난은 양손으로 아셀의 머리를 잡아 훈련장 쪽으로 돌렸다. 어지간한 건물보다 큰 얼음 가시들이 군데군데 자라나 있었다.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냉기가 훈련장 전체의 기온을 낮추고 있었다. 겨울의 마녀가 다루던 것과 같은 얼음이었다.
“저런 걸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열댓 개씩 갈긴 주제에 뭐? 너무해? 나랑 다른 마법사들한테 사과해 인마. 천재로 태어나서 죄송하다고.”
【굳이 따지자면 표정은 변했다.】
“아줌씨는 조용히 하쇼. 요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로난은 겨울 마녀를 무시한 채 아셀의 뺨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말랑말랑한 볼살이 쭉 늘어났다.
“하, 하디마! 내가 잘모태써!”
“니가 고블린 팬티나 훔치던 시절부터 사용하던 염력이랑 내 오러랑 다른 게 뭔데. 엉? 심지어 나는 당길 수만 있다고.”
아셀이 바동거렸지만 로난은 그를 쉽사리 놓아 주지 않았다. 꼬집은 볼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리자 아셀의 비명이 한층 더 커졌다.
“으아아앙! 놔 줘!”
“괘씸한 놈. 이대로 확 뜯어버릴까.”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로난의 입꼬리는 귀에 걸릴 듯이 올라가 있었다. 과연 로르혼에게 영입 제안을 받은 인재였다. 이 자식은 별의 가호만 뚫을 수 있다면 당장 거인들과 싸우게 해도 될 것 같았다. 별안간 전생에서 사라져간 강자들의 얼굴을 떠올린 로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가장 관건이긴 하다만.’
어떻게든 파훼법을 알아내야 했다. 아니면 내가 그 모든 거인을 찢어 죽일 정도로 강해지던가. 아셀의 볼에서 손을 뗀 로난이 등을 돌렸다. 검의 제전에 참가한 동안 놓쳤던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미리 예습해놔야 할 것 같았다.
“노력한 너희들에게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주지. 교장님이랑 나밖에 모르는 건데 특별히 말해 주는 거야.”
“좋은···소식?”
“그래. 엿새 뒤에 열리는 입학식에 나바르도제가 참가할 거야. 학부모 참관이지. 만약에 아들에게 못된 물을 들였다고 나를 태워 죽이면 뼛가루는 우리 누나에게 전해 줘.”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제 뭘 먹었는지 말해주는 것처럼 평탄한 말투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쨍그랑! 오필리아의 손에서 와인잔이 떨어졌다.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마르야가 입을 열었다.
“···뭐가 온다고?”
“레드 드래곤 나바르도제. 어차피 알아봤자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나는 간다.”
로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동아리 구역을 벗어났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갔을 즈음에 등 뒤에서 비명 비스무리한 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신이 나서 지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네메아 소령에서 편지가 늦어지는 덕에 로난은 오랜만에 아카데미 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간만에 수업을 들으며 그가 느낀 것은 역시 공부보다 쉬운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시타를 쓰다듬으며 약초학 교재를 읽던 로난이 중얼거렸다.
“그냥 계속 이러고 살고 싶네···.”
좆같은 거인들만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렇게 했을 터였다. 적당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적당한 직장에 취직하고, 적당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적당히 가정을 꾸리고 살았을 것이다. 서로를 닮은 아이도 두 명쯤 키우면서.
그로서는 이런 평온함이 싫다고 삐뚤어지는 놈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거친 삶에 동경을 품고 있다면 저기 내전이 한창인 남부의 격전지에 삼 일만 견학을 보내 놓으면 알아서 정신을 차릴 텐데. 문득 그의 시선이 달력에 닿았다.
‘드디어 내일이군.’
13이라는 숫자 위로 불을 형상화한 그림이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입학식. 그리고 나바르도제가 오는 날이었다.
로르혼과 상의한 크라티르는 결국 황제에게 나바르도제의 방문을 알리기로 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용무로 오는 것이었기에 최대한 시민에게는 함구하는 쪽으로 합의를 봤다고 했다.
‘그런다고 숨겨질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그건 나바르도제가 폴리모프를 해서 왔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드래곤을 통틀어서 가장 거대하다고 알려진 용이었으니 본모습으로 행차한다면 답이 없었다. 로난이 노트를 정리하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전신의 털이 한번에 곤두섰다.
“무슨···!”
“뺘하아아악!”
본능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자다가 깬 시타가 창문을 바라보며 하악질을 했다. 그때 어떤 반투명하고 얇은 파장 같은 것이 창밖으로부터 빠르게 밀려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난은 반사적이라 해도 좋을 동작으로 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스각! 자신을 덮치려던 파장이 찢어지며 등 너머로 지나갔다.
“젠장, 뭐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검에 베이는 걸로 보아 마법의 일종 같았다. 불현듯 로난은 시타의 하악질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고개를 내린 그가 당황하며 외쳤다.
“시타? 얌마, 정신 차려!”
시타는 하악질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호흡도 하지 않는 것이 꼭 돌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아주아주 느리게 뛰는 심장 소리와 사라지지 않은 온기만이 시타가 죽지 않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문득 로난은 기숙사 내부와 외부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모두 멎은 것을 눈치챘다.
“말도 안 돼.”
로난은 황급히 창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교정을 돌아다니던 학생들이 모두 시타처럼 굳어 있었다. 더는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대로에는 가로수마저 흔들리던 모양 그대로 멈춰 있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가늘게 좁히고 집중해 보니 누군가 대광장 한복판에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저 새끼군.’
로난은 본능적으로 저것이 이 마법을 시전한 술자임을 눈치챘다. 필레온 전역에 이런 마법을 걸 정도면 크라티르와 버금가거나 그보다 더 강력한 마법사겠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기다려라.”
로난은 그대로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신발 밑창이 돌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졌다. 마나로 강화된 허벅지가 부풀어 올랐다. 대광장을 목표 지점으로 잡은 그가 한걸음에 10m씩 거리를 좁혀 가며 뛰어가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시커멓게 변했다.
“뭐?”
전신의 털이 다시한번 곤두섰다. 길을 밝히던 달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급히 멈춰선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의 천체가 빛나야 할 자리에는 완연한 암흑만이 드리워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어둠이 깔려 있었다. 체조를 하듯 고개를 돌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저것이 괴한이 시전한 새로운 마법인 줄 안 로난이 검기를 발사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어둠이 걷히며 정체되어 있던 달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동시에 어둠의 가장자리를 본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저건···!”
그것은 날개의 윤곽이었다. 박쥐를 닮은 날개는 한 쪽만으로 필레온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다. 날개를 따라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기자 이번에는 꼬리가 보였다. 아직도 밤하늘의 뒤편에서 끌려오고 있는 꼬리는 신적인 존재를 징벌하기 위한 채찍처럼 보였다. 그가 벙찐 채 그림자의 윤곽을 바라보던 와중이었다. 팟! 한순간 어둠의 형체가 사라지며 광활한 밤하늘이 나타났다.
“뭐야 시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 봐도 방금 전에 하늘을 날던 무언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꿈이군. 분명해.’
로난은 그 무언가가 사라진 뒤에도 제자리에 서 있었다. 한번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탓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향하던 대광장 쪽에서 웬 남녀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입학식은 내일인데 왜 굳이 오늘 오셨어요?”
“필멸자들이 나를 어떻게 대할지 알면서 그걸 물어보니? 부담스러워서 물도 제대로 못 마실 게 뻔한데, 그 전에 아들하고 이야기 좀 해야지.”
주위가 조용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인의 목소리는 생소했으나 남자 쪽은 익숙했다.
그는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이타르간드와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팔을 들어올린 여인이 이타르간드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나저나 참 대단하다 우리 이르. 어쩌면 인간에게 배울 생각을 다 했니?”
“그게···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 오만한 이타르간드가 쩔쩔매고 있었다. 달빛이 비춘 여인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후드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홍염의 색을 띠고 있었다. 까치발을 들고 이타르간드의 머리를 쓰다듬던 여인이 입술을 들이밀었다.
“기특하기도 하지. 이리 오렴.”
“어, 어머니, 필멸자들 앞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전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데 뭐 어떠니. 자, 어서.”
동작으로 미루어 봐서는 볼에 키스를 해 주려 하는 것 같았다. 이타르간드는 필사적으로 팔을 휘적이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찰나 여인의 얼굴이 충격을 받은 듯 굳어졌다.
“이르. 너···.”
“그, 어머니···그게 아니고···.”
이타르간드가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여인은 이미 충분히 상처를 받았다는 듯이 고개를 훽 돌렸다. 침을 눈가에 찍어 바른 그녀가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너무하구나. 레어에서 독립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엄마를 구박하는 거니? 흑···흐윽···.”
“소,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울지 마세요. 네?”
로난은 숨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타르간드가 어머니라고 부를 사람이 달리 있겠는가.
다만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심호흡한 로난이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얌전히 돌아가자.’
그냥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할 생각이었다. 대화로 미루어 보아 시간을 멈춘 듯한 마법도 악의가 있어서 사용한 것은 아니었으니 금방 풀어 줄 것 같았다. 그래, 이대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야지. 그가 막 뒷걸음질치던 도중이었다.
“흑, 정말이지 서럽구나.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고개를 돌린 채 훌쩍이던 그녀와 로난의 눈이 우연히 마주쳤다. 한순간 로난의 심장이 배꼽까지 내려앉았다. 초인적인 속도로 판단을 내린 그가 동작을 멈췄다. 누가 보면 박제나 석상으로 착각할 수준의 명연기가 펼쳐졌지만, 여인은 이미 로난이 움직이는 것을 본 뒤였다.
“···너. 마법에 걸리지 않았느냐?”
“예?! 어머니, 그게 무슨···!”
여인의 말을 들은 이타르간드가 경악했다. 로난은 그때까지 나는 석상이라며 필사적인 자기암시를 걸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온 여인이 로난의 앞에 멈춰 섰다. 벌어진 그녀의 입 사이로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전혀 다른 목소리가 새나왔다.
【여봐라.】
“······안녕하세요. 나바르도제 님.”
로난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졌다. 이타르간드의 경악 어린 외침이 적막 속에서 울려 퍼졌다.
186 불의 어머니(2)
#186
“······안녕하세요. 나바르도제 님.”
“로, 로난?!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이타르간드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눈을 살짝 뜨자 여전히 굳어 있는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보였다. 적색으로 이글거리는 동공에서는 당장에라도 불길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너.】
“어, 저기···그러니까···할 일 마저 하세요. 보기 좋네요.”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좆같은 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혀 마땅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왜, 저는 부모님이 안 계서서 두 분 같은 관계를 내심 동경했거든요···어, 누나가 있기는 한데 하하···역시 엄마가 있는 편이 더 낫기는 하죠?”
로난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헛소리를 주절거렸다.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위아래로 뜯어보던 나바르도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그게···제가 체질이 좀 특이한지라.”
【체질이라.】
로난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걸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법을 자를 줄 안다고 섣부르게 말했다가 위험 분자로 분류되어 재가 되어 버린다면 그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을 터였다. 불현듯 나바르도제의 눈이 옅게 반짝였다.
【내가 누구인 줄 모르느냐?】
“커억!”
보이지 않는 무언가 로난의 목을 졸랐다. 그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셀의 염력은 애들 장난으로 보이게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나바···르도제···!”
【말장난 따위를 하고자 네게 물어본 것이 아니다.】
이건 정말 재미 없었다. 나바르도제의 어깨 위로 피어나는 기운이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대광장 전체가 아지랑이로 뒤덮인 것 같았다.
‘제기랄···!’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지금에라도 오른손을 뻗으면 칼자루를 쥘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염력을 베어 탈출하거나 한 방 먹일 수도 있을 터였다. 허나 그랬다가는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다시 묻겠다. 어떻게 내 마법에서 벗어난 거지?】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조여드는 힘이 더 강해졌다. 머리로 가는 피가 부족해지기 전에 서둘러 결단을 내려야 했다.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충격을 받아 벙쪄 있던 이타르간드가 기겁하며 외쳤다.
“고, 고정하세요 어머니! 이 자가 제가 말했던 그 인간입니다!”
【그 인간? 설마···.】
“네. 저를 구해주고 필레온에 다니라고 권유한 인간이요. 이 자가 로난입니다!”
【헉···!】
나바르도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로난을 옥죄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가 마른기침을 토내했다.
“커억···! 켁! 빌어먹을···!”
“미, 미안하다. 괜찮으냐? 내가 아들을 구해준 은인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나바르도제가 발을 동동 굴렀다. 대광장을 뒤덮고 있던 살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목을 매만지던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네, 괜찮아요.”
“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영혼을 짓누르듯 위압적이던 목소리도 원래의 사근사근한 음성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아들의 팔뚝을 탁탁 치며 말했다.
“이르, 진작 말했어야지. 정말 큰일 날 뻔했잖니.”
“어, 어머니께서 워낙 갑자기 행동하시는 바람에···죄송합니다.”
“···후우우, 아니야. 내가 성급하게 굴기는 했지. 괜히 탓을 해서 미안하구나.”
나바르도제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이르라는 호칭은 아들의 별명인 듯했다. 평정을 되찾은 나바르도제가 로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기소개는 필요 없겠지. 원하는 이름으로 부르거라. 다시 한 번 미안하구나.”
“로난이에요. 진짜 괜찮으니까 안 그래도 돼요.”
“그래, 반갑다. 로난.”
나바르도제가 웃었다. 이렇게 보니 그냥 예쁘장하게 생긴 사모님이었다. 문득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본 필멸자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의문이 들었다.
‘진짜 뒤질 뻔했네.’
물론 일단락된것과는 별개로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로난은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큼은 나대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로난은 그녀가 등을 긁는 정도의 수고만으로 자신의 뼈와 살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멈춰 있는 학생들을 둘러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이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된 거죠?”
“걱정하지 말거라. 잠시 범위 내의 시간을 느리게 한 것뿐이니까. 마법이 풀리면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을 이어나갈 거란다.”
나바르도제는 그들의 건강에는 어떤 지장도 없을 것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지금 필레온에서 움직이는 인간은 로난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8서클 마법사인 크라티르도 이 말도 안 되는 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구나. 이르는 내 마지막 자식이다. 타락한 서리 정령에게 당할 뻔했다고 들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별 거 아니었어요.”
“좀 더 자긍심을 가져도 좋단다. 네가 아니었다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 글라시아의 왕국을 멸망시키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이인지.”
로난이 굵직한 침을 삼켰다. 담담한 말투에 허언이나 과장 따위는 섞여 있지 않았다. 글라시아는 서리 정령왕의 이름이었다. 계약을 맺은 이는 역사를 통틀어 세 손가락에 꼽고, 그녀를 신으로 삼아 숭배하는 신자도 상당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나바르도제는 그런 글라시아를 누르면 들어가는 똑딱이 단추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왜 구원자가 그녀에게 굳이 사과를 전하러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이르가 네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단다. 세상의 넓이를 알게 되었다고 말이지. 나는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만큼이나 이런 깨달음을 준 것에 감사하고 싶구나. 내가 드래곤으로서의 오만함을 떨쳐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
“별말씀을요.”
“후후, 겸손하구나. 그것 또한 우리는 끝내 갖추지 못할 미덕이지.”
나바르도제가 웃었다. 그녀는 아들의 가치관이 바뀐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로난은 솔직히 이타르간드가 겨울의 마녀에게 패배하고 돌아갔을 때 숙청당해서 벽난로 위에 걸릴 줄 예상하고 있었다. 왜 그런 거 흔하게 있지 않은가. 너처럼 무능한 놈은 우리 일족이 아니다! 같은 전개.
나바르도제가 한창 로난을 치하하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그녀의 후드 안쪽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흠칫거린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오늘은 슬슬 돌아가봐야 할 것 같구나. 어찌 된 것이 갈수록 공세가 심해지는군.”
“공세요?”
“그래. 귀찮은 놈들이지. 내가 이래서 아드렌에도 잘 가지 못한다니까···.”
영문 모를 소리를 한 나바르도제가 후드를 벗었다. 적색 머리카락과 더불어 한 쌍의 뿔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히 로브를 쓰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환각 마법의 일종 같았다. 하늘을 향해 멋지게 구부러진 뿔은 독버섯을 연상케 하는 불길한 적색으로 천천히 점멸하고 있었다.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그녀가 로난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원하는 걸 말해 보거라.”
“갑자기요?”
“그래. 내 아들을 구한 상은 줘야지.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느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 또한 그녀의 성격처럼 예상외의 일이었다. 살려주는 것이 보상일 줄 알았는데 따로 하나를 챙겨준다 할 줄이야.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럼···나중에 한 번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을까요? 하루 정도.”
“시간이라? 안 될건 없다만···그걸로 되겠느냐?”
“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나바르도제의 호의를 사는 것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어마어마한 보상이었다.
“···흥미로운 선택이구나. 대부분의 필멸자는 만질 수 있는 것을 원하던데. 역시 너는 뭔가 다르구나.”
“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래. 내가 조만간 내어 보도록 하마. 으음, 그나저나···.”
별안간 나바르도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로난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피며 침음을 흘렸다. 당황한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왜 그러세요?”
“너, 어디서 나를 본 적이 있지 않느냐?”
“···제가 나바르도제 님을요?”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정말로 알아듣지 못할 소리였다. 우연히 폴리모프를 하고 돌아다니던 것을 마주친 적이 있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나바르도제의 기운은 결코 헷갈릴 만한 것이 아니니까. 그녀가 먼저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다음번에 이야기하자꾸나. 오늘 일은 아무쪼록 비밀로 해다오.”
“혀가 뽑혀도 안 말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고맙구나. 이르, 내일 보자.”
나바르도제가 까치발을 들었다. 피부가 가볍게 닿는 소리와 함께 이타르간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 어머니···!”
“유년기의 미숙함을 즐기거라. 아들아.”
기어코 아들의 볼에 키스한 나바르도제가 등을 돌렸다. 본모습으로 변해서 돌아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공간 마법을 사용하여 자리를 떴다.
스아아···나바르도제 주위의 공간이 흐릿해지더니 그녀의 형체가 사라졌다. 머지않아 대기 중에 팽배하던 마나가 사라지며 정체되어 있던 시간이 원래의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아하하, 같이 가!”
“음? 달 위치가 좀 바뀌지 않았어?”
서늘한 밤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멈춰 있던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행동을 이어 나갔다. 나바르도제의 말마따나 자기들이 마법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그때 어둠을 가르며 날아온 그림자 하나가 로난의 어깨에 착지했다. 시타였다.
“뺘하아앗!”
시타는 네 장의 날개를 펼친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바르도제의 기척이 사라져서 의아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 모습이 처음으로 경계 임무를 맡는 신병 같아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뺘우우···?”
로난이 시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시타는 그제야 가늘었던 눈매를 바로 뜨며 로난의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그가 이타르간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슬슬 돌아갈까. 이르.”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좀 봐 줘. 이타르간드는 솔직히 너무 길잖아.”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본 것을 타인에게 발설한다면···너를 태워 죽일 테다.”
“무섭다 이르. 불은 뿜어도 좋으니까 키스만 하지 말아줘.”
“이놈!!”
참다 못한 이타르간드가 노호를 터뜨렸다. 인간의 성대를 통해 나오는 외침이라 해도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크기에 학생들의 이목이 쏠렸다.
“꺄아아악!”
“뭐, 뭐야?!”
귀가 시뻘게진 것이 어지간히도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한번 웃어젖힌 로난은 이타르간드와 티격태격 대며 대광장을 떠났다. 보름달에서 흘러나온 빛무리가 교정을 포근하게 뒤덮고 있었다.
****
입학식 날 아침이 밝았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서광이 진했다. 어젯밤에 워낙 많은 일이 벌어져서 그런지 평소보다 늦잠을 자고 말았다.
“흐아아암···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군···.”
로난이 기지개를 켜면서 중얼거렸다. 불의 어머니가 쩔쩔매며 사과하거나 사근사근하게 미소 짓던 모습은 꿈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도 굉장히 현실성이 없는 꿈.
‘오늘은 뭘 입고 오려나.’
아마 지금쯤이면 나바르도제가 필레온에 방문한다는 공지가 내려왔을 터였다. 여러모로 역대급 입학식이 되겠군. 그리 중얼거린 로난이 몸을 일으키던 와중이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난 님. 저에요.”
“아, 루시···들어와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손을 쓸 수가 없어서···으으, 꽤 무겁네요.”
“음?”
로난이 문을 열었다.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루시의 손에는 웬 고급스러운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상자를 건네받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묵직하네. 이게 뭐예요?”
“후우···살았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파르잔이라는 곳에서 왔던데요?”
“파르잔?”
“네. 저는 대광장을 청소해야 해서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루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송장에는 알로긴의 이름이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자이파보다 훨씬 상태가 심각했었다고 들었는데, 어찌어찌 살아난 모양이었다.
“늙은이가 명줄도 질기군.”
로난이 피식 웃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헌데 그것과는 별개로 뭐가 들어 있을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뭘 보냈길래 이렇게 꽁꽁 싸놨담.”
상자의 표면에는 황제의 칙서에 걸려 있던 것과 같은 봉인 마법이 인챈트 되어 있었다. 로난은 어리둥절하면서 상자를 개봉했다. 내용물을 본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