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85)
188. 불의 어머니(4)
#188
“···다들 환영해 주십시오. 나바르도제 님입니다.”
크라티르가 말했다. 곧바로 환호성이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한참이나 유지되던 침묵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지, 진짜 불의 어머니야? 진짜로?”
“거짓말···그럴 리가 없잖아. 교장님이 장난을 치신 거겠지.”
“그, 그렇다기에는 방금의 마법진은 너무···!”
학생들은 그녀가 나바르도제라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라티르의 말은 거짓말이라기에는 너무 과감했다. 세계에 군림하는 강자들은 흔하게 농담거리가 되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자리에서만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마법진을 찢고 나타났던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영혼마저 쓸어가 버릴 것처럼 강렬하던 마나 폭풍도. 혼란에 빠진 대광장을 바라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나바르도제다. 다들 반갑다.】
“······!”
그 순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의심이 사라졌다. 필멸자의 성대로는 결코 낼 수 없는 목소리였다.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침묵이었다. 머지않아 터져 나온 함성이 필레온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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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장 가까이에서 아카데미 생활을 하게 될 여러분의 선배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우아아아! 어서 와라, 신입생들!”
“무예과면 제발 갑옷 격투 동아리 들어오자!”
입학식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나바르도제에게 적의가 없는 것을 깨달은 학생들은 머지않아 소년소녀 특유의 천진함을 되찾았다.
돌발적인 사태에도 불구하고 크라티르는 어찌어찌 상황을 수습하여 행사를 이끌어 나갔다. 물론 조금씩 여유가 생길 때마다 나바르도제를 돌아보며 안부를 묻기는 했다.
“아드렌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리는 좀 편안하십니까?”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장이라기보다는 그냥 친절한 식당 종업원 같았다. 하긴 불의 어머니 앞에서 누가 안 그러겠느냐마는.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하도록.】
감사를 표한 크라티르가 다시 연단으로 나섰다. 상투적이지만 썩 괜찮은 내용의 연설이 이어졌다. 로난은 그 와중에도 쭉 나바르도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 있기는 했던 모양인데.’
아주 조금이기는 했지만 지친 기색이 눈에 띄었다. 머리 양옆으로 자라난 뿔의 표면에는 어젯밤에 보이지 않던 작은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이타르간드의 시선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어쩐지 전날 밤에 그녀가 말했던 ‘공세’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나바르도제와 맞서는 존재나 세력이 있는 건가? 도대체 누가?’
계속 고민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마음 먹은 로난이 그녀의 얼굴에서 살짝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몇 번을 봐도 굉장한 절경에, 로난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나도 용 엄마 있으면 좋겠다.”
“음? 지금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시선은 나바르도제의 흉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로브로 싸매고 있어도 굴곡이 심상치 않았다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이타르간드 이 씹새끼.’
나비로제나 마르야도 상당했지만 저건 제대로 말이 안 나오는 수준이었다. 종족의 차이에서 나오는 격차라 해야 할까. 화염을 담는 주머니가 발달한 걸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만 아니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을 터였다. 드레스가 조금만 더 파여 있었다면 일어서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고. 그때 턱을 매만지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짐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네.”
황제가 주억거렸다. 몹시도 공감한다는 말투였다. 잠시 마주친 그의 시선은 암묵적인 동의를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 너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같다고 믿는다는.
‘이 아저씨도 글러 먹었군.’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거린 두 사람이 다시 나바르도제를 바라보았다. 로난이 입을 열었다.
“물론 저는 마나의 규모를 말한 거예요.”
“그야 당연하지. 다른 건 상상도 할 수 없네.”
“다른 거라. 예를 들면요?”
“······오, 저길 보게. 슬슬 막바지 같은데, 뭘 또 하려나 보군.”
로난의 말을 은근슬쩍 무시한 황제가 검지를 뻗어 크라티르를 가리켰다. 과연 그는 무언가 큰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루한 연설은 이쯤 하고···모두가 기대하는 순서로 들어가야겠죠?”
학생들이 환호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것 같았다. 크라티르가 손짓하는 순간 대광장 전체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면이 꺼지고 솟아나는 것을 반복했다. 머지않아 평평했던 광장은 거대한 원형의 투기장으로 형태가 재구성되었다. 크라티르가 말했다.
“그럼 필레온 아카데미의 전통인 ‘간단한 인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지명된 무예과의 신입생과 2학년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주세요.”
신입생과 2학년에서 각각 열 명의 학생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스무 명의 학생은 투기장의 한복판에서 마주 보며 도열했다. 이타르간드는 신입생 행렬의 가장 좌측에 서 있었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오. 수석이셨어?”
“내가 듣기로는 저 잘생긴 청년이 나바르도제 님의 아들이라는데, 맞나?”
“맞아요.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타르간드는 다른 신입생들과 똑같은 절차로 필레온에 입학했다. 입학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진행했다.
폴리모프의 형태를 더 어리게 바꾸고, 이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어차피 다들 그렇게 부르게 될 텐데 어젯밤에는 왜 지랄을 떤 건지.
어쨌든 이타르간드의 출신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기에 대부분 사람은 그가 레드 드래곤이자 나바르도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무예과의 수석이라는 점과 잘생긴 외모로 나름대로의 주목을 받았다.
귀족적인 백금발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귀티는 슐리펜이나 에르제베트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관중석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그 날개 꺼냈던 애 아니야? 동생인가?”
“몰라. 잘생기기는 했다.”
“시험용 마공학 기사를 힘으로 찍어눌렀다는데, 어디서 저런 괴물이···.”
평가는 전체적으로 훌륭했다.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나바르도제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녀가 몇 번씩이나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로난을 돌아보았기에 그는 주기적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음으로써 참 대단한 아들을 두셨다는 의견을 넌지시 전달해야 했다.
문득 3년 전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정확히 저 자리에 서서 열 명을 동시에 상대했었다. 걱정 많은 누나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 당시에 이릴이 앉아 있던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제법 새로웠다.
‘잘 해야 할 텐데 말이지.’
로난은 이타르간드를 내려보았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평소에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긴장한 것이 여기서도 보였다.
“어쩐지 불안한데···.”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바르도제는 관시 없는 척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이타르간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잔뜩 모여 있지만 않았다면 당장 양손을 모아 입에 가져다 댄 채 아들을 응원할 것 같았다.
‘어우. 부담스러워.’
로난이 혀를 빼물었다. 만약 본인이 이타르간드였다면 저 자리에서 구토할 것 같았다. 그때 이타르간드와 2학년의 한 명을 제외한 모든 학생이 투기장에서 내려갔다. 대련 상대가 결정된 모양이었다.
2학년 대표는 몹시도 말을 안 듣게 생긴 청년이었다. 머리가 새카맣고 칼 한 자루만 손에 쥐고 있는 것이 꼭 과거의 자신을 연상케 했다. 관상을 보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닥쳐왔다.
‘진짜 말 존나 안 듣게 생겼네···아냐, 편견을 가지면 안 돼지.’
로난은 선입견을 떨쳐 버리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나는 린이 아니다. 생긴 걸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
그렇게 되뇌이던 와중이었다. 퉷! 바닥에 침을 뱉은 청년이 칼끝으로 이타르간드를 겨누며 소리쳤다.
“하하, 네가 신입생 수석이냐? 반반하게 생겼는데!”
“그렇다.”
“뭔가 대단한 게 있는 모양이군. 얼굴만 보면 민들레씨처럼 유약해 뵈는데 말이지.”
아. 씨발.
한순간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옆에 앉아 있던 황제가 헛숨을 들이켰다. 물을 마시다가 사래에 들린 아셀이 맹렬하게 기침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케엑! 케에엑!”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나바르도제를 돌아보았다. 불의 어머니께서는 변함없이 덤덤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간이 살짝 좁혀진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았다.
드래곤을 도발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제발 더 하지만 말아 달라고 로난이 기도하던 와중이었다.
“내 이름은 타이버 파티잔이다! 결투 전에는 이름을 대는 법이라고 어머니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나?”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라는 말을 들은 이타르간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르다.”
“이르! 누가 지어줬는지 모르겠지만 이름도 이상하군.”
타이버라는 개자식이 검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웃어젖혔다. 크라티르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리고 싶은 표정을 지은 채 나바르도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거 알고 있나 이르? 무예과의 간단한 인사에서 신입생이 선배를 이긴 건 787기가 마지막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로난 선배께서 열 명을 한 번에 상대해서 이겼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네게 그런 기적이 벌어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라는 소리다. 교장님, 시합 개시를!”
타이버가 크라티르를 돌아보며 외쳤다. 의도야 어쨌건 그의 과감한 도발 덕분에 투기장의 분위기는 화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야죠. 그럼, 첫 번째 인사를 시작하겠습니다.”
크라티르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콰앙! 동시에 타이버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객석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로난이 보기에도 제법 날카로운 돌진이었다.
‘자신감의 이유가 있었군.’
잠시 그의 정신 나간 짓거리가 잊힐 정도로 훌륭한 실력이었다. 재능이라는 반석 위에 무수한 노력을 쌓아 올린 결과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정말 불행하게도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이르의 목전까지 도달한 타이버가 참격을 내지르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이르가 쥐고 있던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콰아앙! 그대로 튕겨 나간 타이버가 투기장의 반대쪽 벽에 처박혔다.
“커어어억!”
타이버가 충돌한 자리에 거미집 형상의 균열이 일어났다. 검의 제전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이르가 그를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감히 어머니를 욕보이다니.”
“자, 잠깐만!”
용케도 기절하지 않은 타이버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벽면에 박히다시피 한 채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이타르간드는 남들이 뭐라 할 새도 없이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검로를 따라 일어난 불의 파도가 지면을 타고 쏟아졌다.
“끄아아아악! 살려줘!!”
타이버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만물을 불사르는 레드 드래곤의 화염이 그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로난이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저 등신이!”
결국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게나 힘 조절을 하라고 경고했는데 안 먹힌 모양이었다. 마나로 각력을 강화한 로난이 용수철처럼 도약했다. 탓! 타이버의 앞을 가로막으며 착지한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숙여!”
“로, 로난 선배?!”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피처럼 붉어진 라만차가 뽑혀 나왔다. 정신을 집중하자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심장 소리마저 정체되는 세상 속에서 원래대로 움직이는 것은 오직 로난과 그의 검 뿐이었다. 하얀 선 수백 가닥이 화염의 파도 위로 그어졌다.
“저건···!”
“나, 나바르도제 님?”
그 순간 나바르도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을 흉내 내던 눈동자가 세로로 좁혀져 있었다.
어젯밤부터 그녀의 머릿속을 배회하던 기시감의 정체가 물 위로 떠올랐다. 지금 보니 얼굴도 판에 박힌 듯이 닮았는데 왜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을까.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홀린 듯한 목소리가 새나왔다.
“그래. 저 아이가 네 아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