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87)
190. 하늘이 얇아지는 곳(1)
#190
나바르도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불길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시야가 암전됨과 동시에 공간 마법 특유의 구역질 나는 감각이 로난을 덮쳤다.
‘이건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군.’
내장을 자루에 담고 빙빙 돌리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눈앞이 다시 밝아졌다. 덩어리진 뭉게구름이 눈앞에서 표표히 흐르고 있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아?”
지면이 있어야 할 발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로난이 자신의 몸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젠장, 뭐야?!”
헛숨을 들이킨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몸은 곧장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바로 옆에서 함께 떨어지고 있는 나바르도제가 보였다. 그녀가 로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설명하는 것을 깜빡했구나. 한 번에 가기는 조금 먼 곳이거든. 공간 이동도 움직일 수 있는 사거리가 존재한단다.”
“알겠으니까 일단 뭐라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솔직히 지금 죽을 만큼 무섭거든요.”
로난은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나바르도제의 얼굴은 열이 받을 정도로 태연했다. 이 사모님이 앞으로 잘 보여야 할 드래곤만 아니었어도 욕설을 퍼붓거나 계집애처럼 비명을 질러 댔을 터였다. 별안간 팔을 뻗은 나바르도제가 로난의 손목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바르도제 님···?”
“너무 겁먹지 말거라 아이야. 네가 누구랑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눈웃음친 그녀가 로난을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마치 아기를 다루는 듯한 행동에 로난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키가 훨씬 컸음에도 거인에게 안긴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천박한 농담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불의 어머니께 안겨본 감상평을 짧막하게 두 줄로 남기자면 드래곤의 체온은 인간보다 훨씬 높다는 것, 그리고 이타르간드는 때려죽일 놈이 맞다는 것이었다.
그래, 장거리 공간 이동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따위 생각을 하던 도중이었다. 화르륵! 다시금 피어오른 불길이 두 사람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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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여행은 오랜 시간 이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총 일곱 번의 공간 이동에 걸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눈앞에 세워져 있는 웅장한 성채의 모습에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성···?”
“그래. 드리무어 요새. 우리의 전초기지란다.”
“지금 여기가···도대체 어디에요?”
로난이 벙찐 목소리로 물었다. 두 번의 삶을 살면서 온갖 진귀한 풍경을 보아 온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왜 하늘이 얇아지는 곳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요새가 지어진 곳은 하늘의 한복판이었다. 공중 감옥이 된 로돌란과 비슷한 인상을 풍겼지만 규모로 보나 뭘로 보나 거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웅장했다.
일단 하늘부터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하늘이 아니었다. 땅에서는 육안으로 볼 수 조차 없는 드높은 천공의 위쪽으로는 말로만 듣던 하늘 위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별이라는 게···이렇게 많았나.’
지상에서 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밤이 아님에도 새카만 하늘에는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로난은 절벽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아득히 먼 아래쪽에 그가 나고 자란 대륙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 얼룩처럼 생긴 땅덩어리 안에 지금껏 경험한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올리면 완만한 호를 그리고 있는 지평선이 보였다. 로난은 저 호가 그가 살아온 행성의 가장자리라는 것을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
로난은 대로를 따라 요새로 걸어가는 내내 첫 산책을 나선 아이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바르도제가 웃었다.
“신기한가 보구나.”
“네. 솔직히, 꿈을 꾸는 것 같네요. 이 요새도 보통 건물은 아닌 것 같은데.”
외벽을 구성하는 소재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전체적으로 푸른색을 띠는 드리무어 요새에서 미스릴은 가장 흔한 건축 자재였다. 오리하르콘, 다즘 스톤 등 그 이상 가는 귀금속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모두 물리적, 마법적인 피해를 흘려보내는 데 특화된 소재들이었다.
‘젠장, 이거 지으려고 다 긁어 가서 귀해진 거 아냐?’
거짓말이 아니라 작정하고 방어를 한다면 모든 제국군이 몰려 와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 같았다. 요새를 살펴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서 지어진 건 아니네요.”
“그렇지. 눈치가 빠르구나.”
“도대체 뭐랑 싸우길래 이런 요새가 필요한 거죠?”
“안 그래도 곧 보게 될 거다. 그것들을 쫓아내기 위해 여기 온 거니까.”
성문 앞에 도착한 나바르도제가 가볍게 손짓했다. 운석도 버틸 수 있게 생겨먹은 문짝 두 개가 부드럽게 벌어졌다. 바로 앞에 펼쳐진 요새 내부의 풍경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는 좁네요?”
“내구성만 보고 지어진 건물이라 그렇단다. 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일이 끝난 뒤에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
“네. 오늘 듣기만 하면 상관 없어요.”
워낙에 벽과 천장이 두꺼워서 그런지 내부는 생각한 것보다 좁았다. 물론 겉에서 보는 것에 비해 좁았다는 것이지 폴리모프를 하지 않은 이타르간드가 돌아다닐 정도는 되었다.
장식 같은 것이 거의 없어서 아무래도 조금 심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싸우기 위해 지어진 요새니 아무래도 별 상관은 없다만은.
나란히 복도를 걷던 두 사람이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로난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거한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구레나룻과 이어지게 기른 콧수염이 제법 멋진 사내였다. 나바르도제와 마주친 그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왔는가, 나바르도제. 조금 늦었군.”
“일이 조금 있었다. 상황은?”
“일단락지었지만 곧 다시 몰려올 거야. 당신이 나서줘야겠어.”
“알았다. ‘통로’에는 손상이 가지 않았겠지?”
“그걸 지켜냈으니까 내가 이렇게 다친 거 아니겠나. 젠장.”
사내는 투덜거리며 팔뚝에 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핏방울이 소량 배어 나오고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상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생채기였다. 불현듯 로난을 내려본 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래서, 이건 배고픈 나를 위해 준비한 간식인가?”
【농담을 삼가라 타클라마칸. 내 손님이다.】
로난이 뭐라 할 새도 없이 나바르도제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타클라마칸이라 불린 사내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입가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웃음이 지어졌다.
“하하···뭘 또 정색을 하고 그러나. 필멸자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 장난 좀 쳐본 것을.”
“나중에 보지.”
“그래, 그래···나중에 보자구. 거기 맛있게 생긴 인간도 죽지 않게 정신 바짝 차려.”
로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사내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로난이 말했다.
“드래곤이죠?”
“그래. 저래 뵈도 제법 유명한 어스 드래곤이다. 천 년쯤 전에는 이름을 모르는 자가 드물었지. 갈라시아 왕국을 하루아침에 멸망시킨 게 저 자다..”
“쉽지 않네요.”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 고대사였지만 멸망이라는 단어에서 그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복도를 빠져나가는 동안 몇 명의 인물과 더 마주쳤다. 전부 엘프나 드래곤처럼 불멸의 생을 살아가는 종족이었다. 새파란 머리카락의 여인이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앗, 오셨군요 나바르도제 님. 너무 많이 도움을 청해서 죄송해요.”
“아니다. 지금 전선에는 누가 있지?”
“브니하르도와 이라니엘 레마티온입니다.”
“괜찮은 조합이군. 푹 쉬어라.”
그들은 대부분 나바르도제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놈팡이처럼 뵈던 타클라마칸도 쫄았던 걸 보면 확실히 내로라하는 불멸자 중에서도 격이 다른 듯했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성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젖힌 나바르도제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도착했다.”
“이건···.”
로난의 머릿속이 잠시 새하얗게 변했다. 상상했던 것 이상의 장관이었다. 줄곧 올려보기만 하던 별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이것과 비슷한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모래 대신 소금으로 뒤덮인 사막의, 비가 내린 날 밤 풍경이 딱 이랬다.
삼백 걸음 정도 떨어진 전방에 반투명한 장막이 드리워 있는 것이 보였다. 상하 좌우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는데, 아무래도 방어막의 일종 같았다.
그 한복판에 바위에 맞아 깨진 듯한 구멍이 나 있었다. 지름이 10m 정도 되는 저 구멍이 나바르도제가 언급했던 ‘통로’인 듯했다. 로난은 발아래에서 빛나는 별무리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이거 그냥 낭떠러지 아니에요?”
“재질 탓에 이렇게 보이는 거란다. 방어막 너머로도 바닥이 이어져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발을 내디뎌 보거라.”
로난은 그렇게 했다. 과연 지면이 존재했다. 제법 단단한 것이 방방 뛰어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슬쩍 쳐다본 나바르도제의 모습은 꼭 하늘을 걸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놈들은 정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장막 너머에서 몰려온다. 원래는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걸 막는 형세였으나 로르혼이 공간을 재구성했지. 이 편이 훨씬 낫더군.”
“로르혼이요? 제가 아는 그 로르혼?”
“그래. 내가 말을 안 했던가? 그 아이도 우리 전선의 일원이란다. 필멸자 중에서는 유일하지.”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정보였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웬 남녀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심하군. 어머니께 의존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하는데 말이지.”
“어쩔 수 없잖습니까. 저희끼리 상대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역시 네가 가서 오르세를 설득해 보는 건 어떠냐. 싹수는 없어도 그 애송이라면 큰 전력이 될 텐데.”
“하, 차라리 당신이 나바르도제 님보다 뜨거운 불을 뿜게 되는 게 더 빠르겠군요. 오르세가 어디 말을 들을 놈입니까?”
로난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드 드래곤 한 마리와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엘프 사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바르도제를 발견한 엘프가 허리를 숙였다.
“앗, 나바르도제 님. 오셨습니까.”
“어머니.”
옆에 있던 드래곤도 덩달아 머리를 조아렸다. 어머니라는 호칭을 들은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어쩐지 비늘 색이 비슷하다 싶었는데 나바르도제의 혈족인 듯 했다.
그녀에 비해서는 덩치가 작았지만 그래도 이타르간드보다는 두 배 정도 큰 걸로 봐서는 꽤 나이를 먹은 드래곤 같았다. 나바르도제가 말했다.
“브니하르도. 놈들을 격퇴한지는 얼마나 지났지?”
“삼십 분이 조금 안 됐습니다.”
“곧 다시 오겠군. 고생했다.”
나바르도제가 드래곤의 콧잔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로난이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 아까부터 말하던 놈들이라는게 도대체 뭐죠?”
“하늘 너머의 하늘에서 온 존재들이지. 형태는 제각기 다르지만 목적은 모두 같은···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족속이란다.”
“목적?”
“그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나바르도제가 뭐라 말하려는 차였다. 그녀의 뿔이 다시금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브니하르도라는 드래곤과 엘프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마침 왔구나.”
나바르도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찰나 내장에 얼음물을 붓는 것 같은 한기가 로난을 덮쳤다. 이것과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은 딱 한 번 뿐이었다.
‘이건···!’
네 사람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교적 태연한 세 사람과는 달리 로난은 제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검지를 뻗은 나바르도제가 장막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잘 보거라 아이야. 저게 네 아버지가 가르쳐 준, 우리가 맞서야 할 진정한 적이란다.”
“진정한···적.”
로난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시커먼 덩어리 수백 개가 장막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기어서, 달려서, 날아서, 헤엄쳐서 오는 놈들의 기괴한 생김새는 적어도 지상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썩어서 부풀어 오른 고깃덩이에 촉수와 입을 붙여 놓으면 저런 모습이 될 것 같았다. 이라니엘이라는 엘프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윽. 가죽이 질긴 놈들이네. 어차피 나바르도제 님을 불렀어야 했군요.”
“그런 것 같군. 돕겠습니다. 어머니.”
“됐다. 금방 올 테니 그 아이를 지키고 있어라.”
손사래를 친 나바르도제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손짓하자 통로를 가로막던 방어막이 한순간 사라졌다. 그제야 로난을 내려본 브니하르도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뭐냐 인간. 어머니와 무슨 관계지?”
“저도 궁금했습니다. 로르혼처럼 마법사도 아닌 것 같은데요.”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나바르도제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통로를 빠져나가기 무섭게 방어막이 복구되었다.
‘저거 괜찮은 거 맞아?’
나바르도제가 강한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보이는 게 저러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시야를 뒤덮으며 몰려오는 괴물 떼 앞에서 폴리모프한 그녀의 모습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예의가 없는 인간이군. 겁을 먹었나?”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광경이기는 하지요.”
“뭐, 어련히 지켜줄 테니 헛짓거리 말고 우리에게 붙어 있기만 해라. 필멸자 따위는 생채기도 낼 수 없는 놈들이니까.”
브니하르도가 오만한 투로 말했다. 뒤늦게 반응한 로난이 그녀를 흘겨 보았다.
“생채기도 낼 수 없다고?”
“뭐야, 말할 수 있었군.”
“네. 저 괴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필멸자 중에서는 저들에게 피해를 줄 만한 강자가 없다시피 합니다. 기본적으로 마나와는 궤가 다른 보호막을 두르고 있어서요.”
이라니엘이 대신하여 답변했다. 궤가 다른 보호막이라는 말이 로난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머리들이 사용하는 별의 가호 같은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내 나바르도제가 행동을 개시했다.
【질리지도 않고 오는구나. 죽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
-캬아아아아악!
웅장해진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몰려 오던 괴물들이 일제히 괴성을 내질렀다. 로난의 미간이 구겨졌다. 워낙에 조용해서 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하늘이 흔들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목청이 좋았다.
이제 괴물들과 나바르도제의 간격은 이백 걸음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조용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일대를 구성하는 마나의 기류가 그녀의 손바닥 주위로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라니엘이 말했다.
“눈을 가리는 게 좋을 겁니다.”
“엉?”
그는 이미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로난이 뭐라 말하려는 차였다. 한순간 붉은 섬광이 번쩍이나 싶더니 나바르도제의 손바닥에서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콰아아아! 진홍색 격류가 괴물들을 집어삼켰다.
-캬아아아악!
-키엑! 키에에엑!
기괴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잿더미가 되었지만 덩치가 큰 몇몇은 서서히 타죽으며 물 밖에 건져진 고기처럼 몸을 뒤틀어 댔다.
로난은 이 엘프가 왜 눈을 가리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열기와 빛무리가 방어막 너머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나바르도제는 천천히 몸을 돌려 가며 괴물들을 불살랐다. 방사형으로 쏟아지는 그녀의 화염은 장막과 같은 면적의 붉은 벽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브니하르도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역시 우리 어머니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쓰고도 저 정도라니!”
“오늘은 평소보다 불이 약하군요. 역시 오전의 피로가 쌓여 있는 거겠죠.”
이라니엘의 말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이게 약해진 거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장막이 서서히 사그라질 무렵이었다. 별안간 방어막의 한구석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응?”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그를 제외하고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바늘처럼 길고 뾰족한 괴물 하나가 이쪽으로 쇄도해오고 있었다.
“뭔, 씨발···!”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나바르도제의 불에 태워지고 있는 괴물의 몸은 꼭 붉은 유성처럼 보였다. 괴물이 뒤늦게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키아아아악!
“뭐?!”
그제야 나머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허나 괴물은 이미 브니하르도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로난은 곧바로 지면을 박차며 도약했다. 공격이 안 통하니 어쩌니 했던 것 같지만 그건 지금 알 바가 아니었다.
“이런···!”
너무 늦었다. 위기를 직감한 브니하르도가 이를 악물었다. 나선형으로 휘어진 괴물의 몸체가 그녀의 목을 꿰뚫으려던 차였다. 간발의 차로 도달한 로난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불이 붙은 고깃덩이 위로 하얀 선이 그어졌다.
“···어?”
브니하르도의 눈이 커졌다. 바닥에 착지한 로난이 칼에 묻은 피를 뿌렸다. 두 동강이 난 괴물의 몸뚱어리가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