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88)
191. 하늘이 얇아지는 곳(2)
#191
두 동강이 난 괴물의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보라색을 띠는 피가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브니하르도를 올려보며 말했다.
“떠들어댄 거에 비해서 동작이 굼뜨네. 지켜주기는 무슨.”
“······어떻게?”
한참을 굳어 있던 브니하르도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괴물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한 발 늦은 상태였다. 중상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는데, 설마 인간에게 도움을 받을 줄이야.
“글쎄다···나도 그걸 알고 싶어서 온 거라서.”
“불가능한 일이다.”
“진짜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면 댁은 멱이 따여서 죽었겠지. 그런데 저거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거야?”
로난이 턱끝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괴물이 날아온 방향이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드래곤과 엘프의 눈이 커졌다. 말 두 마리가 통과할 만한 크기의 균열이 방어막 한구석에 나 있었다.
“맙소사, 균열이···!”
“일단 저것부터 막아야겠는데.”
불을 피하거나 숨이 끊어지지 않은 괴물들이 균열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크기가 맞지 않음에도 몸을 찢거나 구겨 가며 머리를 밀어 넣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기괴했다. 쾅! 브니하르도의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 균열 앞에 도달한 그녀가 브레스를 내뿜었다.
【미물들이 감히···! 사라져라!】
-캬아아아아아!
불길이 쏟아졌다. 휩쓸린 괴물들이 재가 되어 산화했다. 규모만 따지자면 나바르도제보다 한 수 위였다. 사방을 뒤덮는 빛무리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장난 없네.’
갈수록 넓어지는 화염은 제방이 붕괴하며 쏟아져 나오는 수류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이라니엘과 그녀가 나눴던 대화처럼 나바르도제의 불과 비교하면 온도가 딸리는 듯 했다. 그를 반증하듯 덩치가 좋은 몇 마리가 불을 맞으면서도 꾸득꾸득 버티고 있었다. 로난은 그때 처음으로 이라니엘이 말했던 ‘보호막’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건가. 비슷하면서도 다르군.’
로난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반투명한 수지 같은 막이 괴물들의 육체를 뒤덮고 있었다. 보호막이 쳐진 부위나 규모 같은 것은 개체마다 달랐다.
별의 가호에 비해서는 한참을 못 미쳤지만 그래도 내구성이 제법 쓸만해 보였다. 브니하르도의 불은 보호막을 완전히 녹이고서야 그 너머의 살을 태울 수 있었다.
철퍽. 어찌어찌 불을 뚫고 침입한 괴물 몇 마리가 바닥에 추락했다. 브니하르도는 균열 바깥의 적에 집중해야 했기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머지않아 몸을 일으킨 살덩이들이 촉수를 뻗어 가며 돌진해 왔다.
-키햐아아아아!!
“역시 화력이 부족한가.”
쓰게 읊조린 이라니엘이 눈을 감았다. 나지막한 영창 소리와 함께 괴물들의 머리 위쪽과 발아래로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떠올랐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이었다. 마법진을 찢으며 튀어 나온 얼음 칼날이 괴물들을 꿰뚫었다.
-캬아악! 캬우욱!
-끄리릭!
위아래로 관통당한 괴물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한기가 넘실거리며 퍼져 나갔다. 예상을 뛰어넘는 강력한 마법에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제법인데.”
마탑주나 탑 메이지가 되기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솔직히 둘 다 허풍쟁이인 줄 알았는데, 인간을 멸시할 정도의 실력은 되는 것 같았다.
허나 불과 얼음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장막 안쪽에 들어온 괴물들은 아직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결정타를 먹이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답답해진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저렇게 해서 잡겠나.”
코어가 빠르게 맥박치기 시작했다. 라만차의 칼날이 피를 연상케 하는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콰장창! 그새 얼음 속박을 뚫고 나온 괴물이 이라니엘에게 달려드는 찰나였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로난이 팔을 휘둘렀다. 검로를 따라 그어진 붉은 꼬리가 괴물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꾸륵?
이변을 눈치챈 괴물이 멈칫거렸다. 동시에 문어를 연상케 하는 몸뚱어리 위로 붉은 선 몇 가닥이 그어졌다. 퍼억! 선을 따라 절단된 괴물의 몸뚱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끈적거리는 체액을 그대로 뒤집어쓴 로난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에이, 역겨워.”
“당신은 도대체···.”
이라니엘이 벙찐 채 중얼거렸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브니하르도의 불조차 반감시키는 보호막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다른 괴물들을 향해 달려갔다. 퍼억-! 그의 검격이 뿌려지는 자리마다 피보라가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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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하르도, 괜찮으신가요?”
“그래. 목이 좀 칼칼하긴 하지만.”
사태는 머지않아 일단락되었다. 방어막 안팎의 괴물을 모두 처치한 브니하르도와 이라니엘은 새로 생긴 균열 위에 임시적인 결계를 설치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어지간한 몬스터는 닿는 것 만으로 산화해 버릴 만큼 강력한 결계였다. 숨을 고르던 이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후우, 얼른 교대하고 들어가서 쉬고 싶군요. 그나저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로난은 괴물들의 주검 사이를 돌아다니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놈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좆같이도 생겼네.”
얼굴에 묻은 체액을 닦아내던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발아래에는 말미잘에 눈알을 달아 놓은 것 같은 촉수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쓸데없이 초롱초롱한 괴물의 눈동자에 칼을 박아 넣었다. 푹. 부패한 익사체를 찌르는 듯한 은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끄베륵.
잠시 경련을 일으킨 몸뚱어리가 축 늘어졌다. 로난이 괴물의 머리를 툭툭 걷어차며 말했다.
“이거 죽은 거 맞지?”
“···그런 것 같군요.”
“시체는 어떻게 처리하냐? 냄새도 고약한데.”
“그냥 내버려 두시면 됩니다. 뒷처리 담당이 따로 있으니까.”
이라니엘이 말했다. 로난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투가 벌어지긴 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로난의 몸에 묻어 있던 피가 말끔하게 기화되며 사라졌다.
“오,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간단한 마법입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나누지 않았군요. 저는 이라니엘 레마티온입니다. 그쪽은?”
“로난.”
“그래요, 로난. 본인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계십니까?”
이라니엘의 표정이 진지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뻔히 봤으면서 뭘 물어보는 건지.
“괴물 새끼들을 베어 죽였잖아.”
“그렇죠. 괴물을 죽였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도살한 존재들이 일반적인 몬스터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죠. 저는 당신의 칼날이 보호막을 무시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그 비결을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죠? 벌써 백 년 가까이 저 끔찍한 종자들을 연구하고 있지만 이건 정말이지···!”
갑자기 다가온 이라니엘이 로난의 손을 덥썩 맞잡았다. 그의 미간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이거 안 놔?”
“아아. 로난 님, 부디 당신을 연구하게 해 주십시오. 최고의 대우로 모시겠습니다!”
“셋 셀 때까지 안 놓으면 때린다. 하나. 둘···.”
“그러지 마시고요, 당신이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열쇠···크억!”
정확히 셋을 센 로난이 이라니엘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체격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살살 때렸는데도 상당히 먼 거리를 날아갔다. 와당탕!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후, 후후후···이럴 줄 알고 방어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먹에는 파괴 효과가 없으시군요.”
“순 미친놈 아냐 이거.”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쩐지 손맛이 안 느껴진다 싶었는데 방어막을 때린 모양이었다. 일단 저거부터 찢고 두들겨 줘야 하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로난이 칼자루로 슬슬 손을 가져가던 차였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고생 많았다.”
“나바르도제 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일을 마치고 온 나바르도제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어느새 재 봉인된 방어막 건너편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잿더미가 잔뜩 쌓여 있었다. 정말로 그 많던 것을 모조리 태워 버린 모양이었다. 브니하르도가 머리를 숙였다.
“어머니.”
“새 균열이 생겼더구나. 조금 멀리 있는 곳까지 태우고 오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
“임시 조치는 마쳤습니다. 다만 요즘 들어 이런 일이 늘어나고 있어 걱정입니다. 하늘이 점점 더 얇아지고 있으니.”
“나도 느끼고 있단다. 방어막이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봐야지. 두 사람 다 내 손님을 지켜 줘서 고맙구나.”
이라니엘을 격려한 나바르도제가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로난과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가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부끄럽지만 그 반대입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지?”
“오히려 이 필멸자가 저를 구해 주었습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제법이더군요.”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뻔뻔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의외의 모습이었다. 핏줄이 좋아서 그나마 양심이 있는 건가. 침음을 흘리던 브니하르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어머니, 이상한 게 있습니다.”
“이상한 거라니?”
“이 인간을···어디선가 본 것 같습니다. 아주 어릴 때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녀의 시선은 로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드래곤 특유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어째 비슷한 일이 연달아서 벌어지는 것 같았다.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제대로 본 게 맞단다. 이 아이는 ■■의 아들이니까.”
“네? ■■라면, 이 요새를 세웠다는 그···.”
“그래. 아니면 먼 후손이거나.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아.”
브니하르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혼자서만 이름을 듣지 못하는 로난은 열불이 터질 지경이었다. 별안간 나바르도제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약속대로 내가 아는 것을 전부 말해주마.”
“이제 더는 안 쳐들어 오는 거예요?”
“말했다시피 평소보다 많이 태우고 와서 몇 시간 정도는 괜찮을 거다. 자, 가자.”
로난은 그녀와 함께 요새로 돌아갔다. 막 왔을 때보다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드래곤, 엘프, 뱀파이어···나바르도제에게 예를 표하고 로난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이들은 모두 불멸의 생을 살아가는 종족이었다.
“이 피 냄새는···? 저거 설마 인간인가?”
“늘 고생이 많소. 태초의 불꽃이여.”
“다들 조심해. 방금 장난 좀 쳤다가 엄청 혼났다고.”
요새 내부는 단순해 보이면서도 은근히 숨겨진 샛길이 많았다. 나바르도제는 그런 수상쩍은 통로만 골라서 걸음을 옮겼다.
어디를 가는지는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로난은 묵묵히 그녀를 뒤따랐다. 폭이 좁은 나선 계단을 오 분 정도 내려가던 와중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혹시 아버지라는 사람의 인상착의가 정확히 어떻게 됐죠?”
“긴 말도 필요 없이 너와 꼭 닮았었단다. 머리만 하얗게 물들이면 되는 수준이었지.”
“아하···빌어먹을.”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자신이 아는 닮은 사람이라고는 로브쟁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다르만 그 개자식은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 내 아버지는···어째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정보를 알아갈수록 결론은 좆같고 모호한 방향으로 도출되었다.
‘그런데 그 새끼는 지금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 아닌가? 왜 나바르도제를 찾아온 거지? 저 괴물들을 막으라고 알려줘서 무슨 이득이 있나?’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무지 얽힌 실타래를 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계단은 십 분 정도를 더 내려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도착했다. 여기도 수백 년 만이군.”
“여기는···?”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큼직한 문짝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바르도제가 문을 뒤덮고 있는 먼지를 털어 내며 말했다.
“■■가 지내던 방이다. 이 독방에서 엘시아와 함께 여기서 3년 동안 연구에 매진했었지. 그 뒤로도 종종 나를 찾아오기는 했지만 여기에 들른 적은 없었다.”
“네? 누구요?”
로난의 눈이 커졌다. 분명 익숙한 이름이 귓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나바르도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음? ■■와 엘시아라고 했단다.”
“···혹시 그 엘시아라는 사람이 눈이 새빨간 엘프였나요? 귀는 더럽게 길고.”
“그래.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로난의 눈이 커졌다. 기억이 맞다면 엘시아는 분명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적안의 하이 엘프. 바람의 정령 하이란을 다루던 네뷸라 클라지에의 창립자 중 하나. 로난은 구원자에 빙의하여 그녀와 마을을 재건하던 나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기 굳어 버린 로난의 모습에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일단 들어가서 나머지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그녀가 문고리를 쥐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수백 년의 방치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문짝은 시냇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