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05)
208. 북부의 왕(2)
#208
투칸 고원의 또 다른 이름은 생명의 땅이었다. 비교적 일정한 평균 기온과 여름이면 드러나는 녹색 대지, 고원 곳곳에 흐르는 크고 작은 물줄기는 룬달리안의 주민들을 제외하고도 무수히 많은 생명이 신세를 지고 살아가는 터전이 되어 주었다.
특히나 신세를 많이 지는 것은 작은 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수인 원주민들이었다. 어렵잖게 식량을 구할 수 있는 투칸 고원은 그들이 원시적인 집단의 형태를 이루면서도 자급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 게 도와 주었다. 웨어울프 사냥꾼 포챠 또한 그런 축복을 누리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내가 살다살다 제이거 님을 만나게 될 줄이야.”
사냥을 떠나는 포챠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날씨는 구리구리한 것이 영 별로였지만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그의 우상인 제이거를 직접 만난 덕이었다.
제이거는 두 명의 인간 남녀와 함께 그의 부족에 찾아왔다. 인간들은 제이거의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 잠시 마을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포챠는 휴식 중인 제이거와 인사는 물론 짧은 대화까지 나눌 수 있었다.
‘안색이 안 좋으시던데, 얼른 나으시면 좋으련만···.’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대화 내내 좋지 않던 제이거의 안색이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포챠는 잠시 눈을 감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
“부디 평안을.”
기도를 하니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인간은 질색하는 그였지만 어쩐지 그 두 명이 제이거에게 해코지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큼직한 그레이트 디어를 잡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시 일어나서 걸음을 옮기려던 포챠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으어어···.”
“음?”
포챠가 고개를 돌렸다. 웬 웨어울프 소년 한 명이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기껏해야 다섯 여섯 살이 되어 보이는 어린애였다.
“꼬마야, 어디 가니?”
“아으아.”’
소년은 대답하는 대신 기괴한 음성을 흘렸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벌어진 주둥이 아래로는 끈적한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생전 다듬은 적이 없어 보이는 기다란 손톱도 눈에 띄었다. 그 순간 포챠는 이 소년이 최근 들어 많아진 기형아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런···쯧쯧.”
기형아의 출산빈도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인 듯했다. 잠시 주민들이 눈을 뗀 사이 부족을 벗어난 것 같았다. 그래도 다리를 끌거나 침을 흘리는 것 정도야 양호한 증상이었다.
“옷차림을 보니 이끼바위 부족 같은데···같이 가자 꼬마야. 데려다 줄게.”
포챠는 소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자신 부족에도 저런 기형아가 많아서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다. 웨어울프 소년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안 되겠군. 안아서 옮겨야지. 포챠가 소년의 어깨에 손을 대는 찰나였다. 서걱! 무언가 빠르고 날카로운 것이 자신의 목울대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어?”
포챠가 바라보는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허공에서 회전하던 그의 반면이 차가운 눈 속에 처박혔다. 빠르게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포챠가 본 것은 흐리멍텅한 하늘과 피분수를 뿌리며 쓰러지는 자신의 몸뚱어리였다.
이윽고 그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길게 자란 소년의 발톱은 붉은 선혈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일격에 포챠의 머리를 잘라낸 소년이 기괴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으아···제···이거.”
소년은 포챠가 걸어온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평원 저 멀리 횃불이 만들어낸 빛무리가 아롱이고 있었다. 어둑한 하늘 아래로 나부끼는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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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이름은 바르카. 자이파 님의 형제이자···송곳니의 밤을 계획한 실질적인 주모자다.”
제이거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새나왔다. 로난과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잠시 침묵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형제라고? 자이파에게 형제가 있었어?”
“그래.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원체 남들 앞에 보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니까. 아마 북부의 동포 중에서도 놈의 정체를 아는 것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을 거다.”
이건 정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설마 자이파에게 형제가 있었을 줄이야. 성큼성큼 다가간 로난이 다시 제이거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세히 말해 봐. 실질적인 주모자라는 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다. 사람들을 모으고 구심점이 된 것은 자이파 님이었지만, 뒤에서 계략을 세운 것은 전부 놈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우리가 바르사 변경백령을 사흘 만에 함락시킨 것도 반쯤은 놈이 세운 작전 덕이었지.”
고향의 이름을 들은 아데샨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제이거는 그간 바르카가 주도해온 일을 하나둘씩 나열하기 시작했다.
“자이파 님과는 달리 음험하고 영악한 놈이지만 머리 굴리는 것 하나는 타고났지. 송곳니의 밤이 벌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을 기억하고 있나?”
“제국의 성지 주베 점령.”
“잘 아는군···그건 일부러 넘겨준 거다. 바르카가 몰래 보낸 전령이 북부 방어군을 칠 수 있는 샛길을 제국군에게 알려줬지. 결과적으로 우리는 성지라는 상징적인 땅을 빼앗겼지만 분노를 구심점 삼아서 일만 명의 동포를 모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증언의 연속이었다. 북부 수인의 성지인 주베를 제국군에 양도한 것도, 변경백령의 병사들을 쳐부순 것도 전부 바르카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제이거가 말을 이었다.
“놈은 다짜고짜 나를 찾아와서 북부의 왕이 될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다. 과거와는 달리 존대를 하더군. 나는 별 생각 없이 시켜만 준다면 하겠다고 대답했지. 그 뒤의 일은 너희가 아는 대로다.”
바르카가 제이거를 찾아온 것은 그가 한창 산적 노릇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부터 바르카는 제이거의 참모 노릇을 하면서 북부를 다시 한 번 규합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알려 주었다고 했다.
왜 자신이 아닌 제이거를 왕으로 내세우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멍청해도 카리스마와 선동력 하나는 타고난 제이거는 불과 2년 만에 신 북부 연합이라는 거대 세력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야기를 듣던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위험한 놈이군. 전생에는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왜 그런 거물이 전생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거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까지 북부에는 딱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었다. 나바르도제가 처리한 두아루라는 거인이 투칸 고원을 증발시켰다는 소식만을 어렴풋이 들었을 뿐. 문득 의문 하나가 로난의 머릿속을 스쳤다.
“잠깐만. 그럼 자이파가 제국에 투항한 것도 그 바르카라는 놈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나? 뭔가 설명만 들으면 전혀 궤가 다른 행동처럼 느껴지는데.”
“예리하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네가 생각한 대로 북부 연합의 항복은 자이파 님의 독자적인 판단이었지. 그분은 지금까지 얻은 것을 챙기고자 했고, 바르카는 제도 발론까지 밀고 나갈 것을 주장했거든. 그 일을 계기로 터르겅 형제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이로 돌아서게 되었다.”
제이거는 다소 씁쓸함이 느껴지는 투로 말했다. 과연 로난의 예상대로 자이파의 항복과 충성 서약은 그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다.
자이파는 자신을 볼모 삼은 교섭으로 북부 수인의 권리와 영토를 지켜내고자 했지만 바르카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싶어했다. 자이파가 그런 판단을 내리고 시행하기까지 두 사람 간에 엄청난 마찰이 있던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전쟁이라는 것도 결국은 싸움의 일환이었기에 해 봐야 아는 것이었지만 로난은 자이파의 선택이 옳다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북부 연합의 기세가 아무리 맹렬했다 할 지라도 종국에는 제국이라는 거인을 꺾지 못하고 패배했을 터였다.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로난이 결론을 내렸다.
‘바르카···잠깐 돌아서 가더라도 제거해야겠어.’
이미 대장간만 바라보고 가기에는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더군다나 바르카는 네뷸라 클라지에에 속해 있었으니 여명이라는 자신의 직무와도 관련이 된 일이었다. 로난이 물었다.
“좋아. 어디로 도망쳤는지는 알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헤이란으로 갔을 거다. 놈의 근거지가 거기에 있으니까. 언젠가 부하들에게 미행을 시켜서 알아봤었지.”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이건 또 예상 못한 일이었다. 헤이란이라면 여정이 틀어지기 전에 원래 가려고 한 목적지였다. 문득 대장간의 상황을 떠올린 로난이 입을 열었다.
“맞다, 생각난 김에 말하는데 헤이란을 점거한 네 부하들을 치워줘. 억류하고 있는 대장장이들도 풀어 주고.”
“이봐,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네 뜻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한다면···”
제이거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주에 걸린 동포들을 보고 양심의 가책이 생기기는 했지만 완전히 로난 측으로 전향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자포자기식으로 말해 버리기는 했다만은 그는 아직도 바르카가 두려웠다. 뭐라 말하려던 제이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렇게 하지. 네게는 신세를 졌으니.”
“잘 생각했어.”
“다만 조건이 있다. 놈을 만나게 되더라도 여기서 있던 일은 말하지 마라. 나는 네놈들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간 거고, 팔다리가 잘린 고통으로 헛소리를 주절거린 거다. 알아들었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면모를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이야기를 다 해놓고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행여나 비밀을 누설한 죄로 바르카에게 입막음을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북부에서 인간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아무리 동포를 뭉치게 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지만···이건 아니다.”
제이거가 인형을 움켜쥐었다. 머리는 나쁘지만 최후의 양심은 남아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바르카처럼 음험한 것 보다는 차라리 이런 게 나았다.
“네놈들이 바르카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 그놈은 자이파 님과는 다른 의미로 괴물이니까. 틀림없이 너희를 말살해 버릴 전략을 갖고 있을 거다.”
“설마 그 자식도 검성의 자질이 있고 이런 거냐? 그건 좀 빡센데.”
“그건 제대로 싸우는 걸 본 적 없어서 모르겠군. 전사보다는 참모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터르겅의 핏줄이 어디 갈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로난은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장 제이거의 방에서 얻어맞은 발차기만으로도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덩치만 봐도 자이파와 거의 비슷한 것이 뭐가 됐든 방심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별안간 제이거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참. 이걸 주지. 놈을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엉?”
“대신 절대로 놈에게 이 물건의 존재를 들키면 안된다. 내가 줬다는 것을 무조건 알아차릴 테니까. 이 망할 것이 어디를 간 건지···.”
제이거는 궁시렁거리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뭔가 건네주려는 모양새였다. 대부분의 주머니를 뒤져본 그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이었다. 허벅지 부근에서 찌릿한 통증을 느낀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음···?”
“로난? 왜 그래?”
아데샨이 그에게 다가왔다. 말없이 통증이 일어난 쪽의 바지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로난이 짧고 굵은 막대기 하나를 빼냈다. 부족에 저주를 내릴 때 사용하던 말뚝이었다.
“뭐야?”
“젠장, 이건···!”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표면을 타고 올라오는 사악한 기운이 더욱 강해져 있었다. 저주의 고유한 보랏빛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찢어지는 비명이 천막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