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07)
210. 북부의 왕(4)
#210
“헤이란에 주둔하는 병사들에게서 답이 오지 않는다고? 제대로 연락한 거 맞나?”
“그, 그렇습니다···.”
웨어폭스 참모가 고개를 숙였다. 침대에 반쯤 기댄 채 누워 있던 제이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수백 명은 될 텐데 그 많은 인원이 다들 어디를 갔단 말이냐. 얼음 바다에서 온 망령들에게 끌려가기라도 한 건가?”
“죄, 죄송합니다. 현재로서는 도무지···즉시 정찰대를 구성해서 보냈으니 조만간 답이 올 겁니다.”
참모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굽실거렸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틀 전에 크게 다쳤다가 돌아온 제이거에게서는 한층 강화된 위엄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품격이라고 해야 할까. 죽음의 위기를 넘어서 그런가. 훨씬 진중하고 무게가 있어진 것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제이거가 입을 열었다.
“흐으음···일단 알았다. 물러가라.”
“넵.”
참모가 물러갔다. 드넓은 방 안에는 제이거와 그의 곁을 지키는 친위대 여섯 명이 남아 있었다. 혹시 모를 기습이 두려워 배치해 놓은 최정예 부하들이었다.
‘별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제이거가 턱수염을 쓸어넘겼다. 난처한 상황이었다. 내일모레즈음이면 로난 일행이 헤이란에 도착할 텐데. 이대로라면 병력을 철수시키겠다는 약속이 지켜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곰곰이 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별동대를 꾸려라. 아무래도 직접 가봐야겠다.”
“아직은 휴식을 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느낌이 영 좋지 않아서 말이지.”
제이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 직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무언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막 옷매무새를 다듬던 와중이었다. 집무실의 문이 천천히 벌어졌다.
-끼이익···
“음?”
들어가도 되겠냐는 소리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제이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앞으로는 볼 일이 없기를 바란 인물이 문간 앞에 서 있었다.
“바르카···!”
“반갑소. 제이거.”
바르카는 언제나처럼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의 걸음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제이거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뒤늦게 기척을 눈치챈 호위병들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잠깐, 거기 멈춰라!”
“크게 다쳤다지? 무사한 것 같아 다행이군.”
하지만 바르카는 호위병의 경고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바르카가 오면 즉시 처리하라고 성내의 병사 전원에게 전파했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설마 그 많은 인원이 당한 건가? 아니야. 불가능해. 몰래 숨어들어 왔을 거다.’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제이거는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이거를 응시하던 바르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요. 내가 무슨 짓이라도 했소?”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온 거요. 그때 혼자서 도망친 주제에.”
“그건 미안하게 됐소. 상대를 얕잡아본 탓에 판을 짤 시간이 필요했거든.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더군.”
뻔뻔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덧 호위병들이 바르카를 완전히 포위했다.
여섯 개의 날붙이에 둘러싸인 그가 마침내 멈춰 섰다. 제이거가 암살자를 보낸 건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차였다. 바르카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보상의 차원으로 준비한 게 있소. 아마 거부하지 못할 제안일 것이오.”
“거부하지 못할 제안···?”
“그래. 정말로···거부하지 못할 제안이지.”
의미심장한 말투에 제이거가 눈썹을 으쓱였다. 별안간 바르카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의 로브가 꿈틀거리더니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튀어 나왔다.
“어?”
형태를 갖춘 그림자는 호위병들의 몸을 스치며 지나갔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제이거를 비롯한 일곱 명은 그림자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림자가 다시 로브 안쪽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여섯 호위의 팔다리가 절단되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크아아아악! 파, 팔이!”
“어? 어어억?!”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절단된 팔다리와 병신이 된 몸뚱어리들이 무너져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제이거는 옆의 협탁을 짚음으로써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무, 무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브가 꿈틀거리는 것밖에 보지 못했다. 흩날리는 피보라 속에서도 바르카는 굳어 버린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살아남을 권리를 줄 테니 협조해라 제이거. 이게 내 제안이다.”
“크윽!”
“한번 배신한 것은 잊어 주지. 네놈은 원래 그런 쓰레기였으니까. 내 말만 잘 들으면 네놈은 몇 년 내에 북부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을 거다.”
바르카가 고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역시 정보를 분 것을 들킨 모양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그의 로브 안쪽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젠장···.”
지금까지와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그래도 이틀 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터라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역시 나는 이 괴물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허수아비였나.
‘여기서 거절하면···모든 걸 잃어버리겠지.’
제이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잠시 웨어울프 기형아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줍잖은 정의감과 죄책감에 취해서 정보를 술술 불어버린 기억도.
내가 잠시 미쳤었나 보군.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뜬 제이거가 입을 열었다.
“그래···협조하겠다.”
“잘 생각했소. 헤이란에서 그대가 해줘야 할 일이 있으니 따라오시오.”
협조 의사를 밝히자 바르카의 말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가슴을 쓸어내린 제이거가 협탁에서 손을 뗐다.
“그러지. 잠깐 출발하기 전에 뭐 하나만 챙겨도 될까? 책상 서랍 속에 있는데.”
“알아서 하시오. 삼 분 뒤에 출발하겠소.”
그리 말한 바르카가 몸을 돌렸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호위들이 고통스레 신음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팔다리만 베인 것이 아니라 몸 군데군데에도 끔찍한 자상이 남아 있었다.
“제, 제이거 님···!”
“쿨럭, 허어억···.”
제이거는 반응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책상까지 다가간 그가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가장 깊숙한 곳에 화려한 단검 한 자루가 똬리를 튼 독사처럼 놓여 있었다.
‘이놈···.’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준비한 물건이었다. 칼날을 타고 흐르는 독액이 번지르르한 윤기를 흘리고 있었다. 오우거도 한 방에 보내는 극독이었다.
이건 아니었다. 북부의 왕이 되든 황제가 되든 이건 정말 아니었다. 정확히 바르카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놈은 앞으로도 끔찍한 일을 자행할 터였다.
이성과 직감이 굴복하라 외치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심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삼십 년을 살아오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 방. 한 방이면 된다.’
심호흡한 제이거가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조심스레 칼자루를 쥔 제이거가 입을 열었다.
“이봐, 바르카.”
****
하늘이 맑았다. 뼈가 동파될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그래도 눈발이 섞여 있지 않아서 나름 견딜 만했다. 아데샨이 시타의 입에 육포 한 조각을 물려주며 말했다.
“자. 너도 먹어.”
“뺘!”
헤이란으로 향하는 여정도 어느덧 사흘차에 접어들었다. 로난과 아데샨, 그리고 시타는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없는 거대한 언덕이 북풍을 막아주고 있어서 그들은 보다 편안하게 여독을 녹일 수 있었다.
아데샨과 시타는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고, 로난은 평평한 바위에 종이와 연필을 대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육포를 오물거리던 아데샨이 그에게 질문했다.
“로난. 누구한테 쓰는 편지야?”
“음···뭐라고 써야 하지···.”
허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게 끙끙거리는 모습이 영 수상했다. 아데샨이 재차 질문했다.
“로난?”
“아아, 미안해요. 황제 폐하한테요.”
“아하. 그렇···뭐라고?”
아데샨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때마침 편지를 다 쓴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시타의 발목에 편지를 묶어 주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요. 조금 빡센 부탁이기는 한데···그래도 나름대로 공을 세웠으니 받아들여 주시지 않을까 해서.”
“···대단하네. 여러 가지로.”
아데샨이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용은 비밀로 싶어하고 하는 것 같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편지를 단단히 묶은 로난이 시타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시타. 부탁하마.”
“뺫!”
시타가 네 장의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눈 깜짝할새에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꼭 검은 혜성을 연상케 했다. 이제 늦어도 이틀 뒤에는 답장이 올 터였다. 아데샨이 말했다.
“잘 되면 좋겠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게요. 슬슬 출발할까요?”
“응.”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이 옷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북쪽 언덕을 다 오르는 데는 거진 삼십 분이 소요되었다.
마침내 정상에 도착한 로난과 아데샨이 동시에 멈춰섰다. 극지 헤이란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얼음과 바위로 뒤덮인 드넓은 대지의 모습에, 아데샨이 입을 살짝 벌리며 감탄했다.
“우와아···.”
“드디어 도착했네요. 빌어먹을.”
로난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짧았지만 고된 여정이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수인과 몬스터의 위협 탓에 두 사람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푸른 얼음이 거무튀튀한 땅 군데군데 솟아나 있었다. 여기가 대륙의 끝자락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수평선이 저 멀리 북쪽에 드리워 있었다.
저 너머에 이번 여정의 종착점인 망령의 바다가 드리워 있었다. 일 년 내내 얼어붙은 바다에서는 덧없이 죽은 뱃사람들의 귀곡성이 들려온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버지, 혹은 엘시아는 왜 저런 곳으로 나를 부른 걸까. 담뱃대를 꺼내 문 로난이 아데샨에게 질문했다.
“혈계침은 어때요?”
“여전히 고정된 상태야. 다쳐서 누워 있기라도 한 걸까?”
“그러면 좋겠지만···뭐, 일단 가 보면 알겠죠.”
제이거에게서 받은 혈계침은 어젯밤에 방향을 튼 채로 고정되었다. 뭔가 수상쩍었지만 제이거의 말마따나 헤이란에 뭔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것은 바르카를 때려잡는 일이었다. 대장간도, 아버지도 그 다음이었다.
두 사람은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자칫하면 미끄러질 수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호···제이거 녀석이 약속을 지켰네요. 솔직히 조금 불안했는데.”
“나도 안 느껴져. 확실히 철수시킨 것 같아.”
아데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둔 중이던 병사를 물려 달라는 약속은 착실하게 이행된 것 같았다. 딱히 몬스터나 맹수도 없는 것 같았기에 두 사람은 순탄하게 혈계침의 바늘을 따라 걸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석궁은 얼지 않게 관리해 놔요. 언제 쏴야 할 지 모르니까.”
“응. 그럴게.”
로난의 조언을 들은 아데샨이 등에 멘 석궁을 만지작거렸다. 신 수인 연합의 본성에 잠입했을 때와는 달리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태였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얼음 파편과 화산석이 비적 거리며 중독성 있는 소리를 냈다. 한참을 걷던 두 사람은 결국 해안가 부근까지 이르렀다.
풍화된 기암괴석과 곳곳에 자라난 얼음덩이를 제외하면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파도치는 소리가 한층 격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혈계침을 들고 있던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이제 뭐가 나와야 하는데.”
“그러게요···잠깐, 저게 뭐죠?”
“응?”
불현듯 로난이 검지를 뻗어 전방을 가리켰다. 언덕이라 해도 믿을 만큼 거대한 얼음덩이가 바다와 땅 사이에 걸친 채 솟아나 있었다.
푸르스름한 빙벽의 한복판에서 이질적인 마나의 기류가 맴도는 것이 보였다. 아데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저건!”
“확실히 수상하죠.”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과도 일치했다. 로난과 아데샨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빙벽 앞에 다다른 로난이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둘렀다.
스각! 종이를 자르는 듯한 감촉과 함께 빙벽을 감싸고 있던 환각이 바스라졌다. 감춰져 있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가 4m에 이르는 나무 문짝은 인간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끼이익···문을 열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교적 탁한 공기 안에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미세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바늘은 정확히 통로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시에 서로를 쳐다본 두 사람이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옷깃을 한번 여민 로난이 입을 열었다.
“찾은 것 같네요.”
.
.
.
통로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깊었다. 구불구불하게 뻗은 굴 안에서는 숨을 쉬는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로난의 손에 쥐어진 횃불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기름을 먹인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길게 늘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춤을 추듯 일렁였다.
그들은 최고의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로난의 반대편 손은 칼자루 위에 놓여 있었고, 아데샨은 아예 석궁에 쇠뇌까지 걸어둔 채였다. 뭐가 나오든 간에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한 상태였다.
“하, 얼음 속에 이런 걸 만들다니.”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작게 감탄했다. 높이가 4m에 육박하는 거대한 통로의 벽과 천장은 모두 반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돌이나 금속보다 단단할 텐데 이걸 깎아낸 것이 용할 따름이었다. 유일하게 바닥에는 짚단이 깔려 있었는데, 바르카 본인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짚단 위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스튜를 흘린 것처럼 보이는 혈흔은 통로 깊숙한 곳까지 불규칙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다.
“상처가 큰가 본데요. 어디서 또 다쳐온 건가.”
“···그런 것 같아.”
아데샨이 담담하게 주억거렸다. 음색이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로난은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원흉이 저 앞에 있었으니.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양보해 줄게요.”
“···응?”
“바르카 놈 있잖아요, 선배가 죽일 수 있게 양보해 줄게요.”
뜬금없는 소리에 침묵이 찾아왔다. 잠시 벙쪄 있던 아데샨이 피식 웃었다.
“고마워. 그런데, 사실 바르카를 죽이는 게 내 목적은 아니야.”
“목적이 뭔데요?”
“그냥 물어보고 싶어. 왜 그런 짓을 했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지.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을 짜내 가며 북부를 지배하려 하는지. 물론 그와 별개로 죗값은 치뤄야 하겠지만···일단 내 목적은 그것 뿐이야.”
목소리는 떨리는 기색 없이 차분했다. 로난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녀의 어른스러운 태도에 나름의 경의를 표했다. 그들이 십 분 정도를 더 걸어 들어가던 와중이었다. 살짝 앞에서 걷던 아데샨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로난. 모퉁이 너머에 뭐가 있어.”
“네?”
그들의 눈앞에는 오른쪽으로 휘어진 모퉁이 하나가 나 있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마나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바르카 같아.”
아데샨이 쇠뇌를 쳐들었다. 그녀의 왼손에 쥐어진 혈계침도 해당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갈게요.”
그리 대답한 로난이 앞장서서 모퉁이를 돌았다. 소리 없이 뽑혀 나온 칼날은 당장에라도 적의 사지를 끊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횃불이 모퉁이 너머를 비추는 순간이었다. 로난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건···!”
모퉁이 너머는 3m정도 앞에서 빙벽으로 틀어막혀 있었다. 의식에나 쓰일 법한 석조 제단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수인의 머리통 일곱 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정체를 모를 가죽 푸대가 일곱 개의 머리 위에서 갈고리에 꿰인 채 흔들리고 있었다. 한발 늦게 그 모습을 본 아데샨이 혈계침을 떨어뜨렸다.
“세, 세상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굴 안에 울려 퍼졌다. 일렬로 늘어선 면면들은 하나같이 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견딜 수 없이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문득 가운데 머리통에 시선이 닿은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제이거.”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백호의 머리는 틀림없는 제이거였다. 그는 일곱 개의 머리 중에서 유일하게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귀를 바짝 뒤로 젖힌 채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격노에 차 포효하던 와중 그대로 머리를 잘린 것 같았다. 아데샨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 어쩌다가 이런···! 그럼 이 혈계침은···?”
“···좆같은 새끼가.”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금세 혈계침과 반짝이는 마나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제단의 위쪽에 대롱대롱 매달린 가죽 푸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바르카 본인의 혈액이 들어 있을 터였다. 교란을 위해 어떤 추가적인 조치도 한 것 같았다.
“하하···.”
하도 기가 막힌 나머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심장이 빠르게 맥박치는 것이 느껴졌다. 불현듯 발치에서 기계장치가 끼릭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뭐야?”
긴장하고 있던 로난과 아데샨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혈계침 위에서 겹쳤다. 붉은 바늘은 동굴의 입구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낮게 진동하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반갑다. 내 모든 것을 망쳐 놓은 버러지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