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13)
216. 북부의 왕(10)
#216
“갔어요. 완전히.”
맥을 짚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카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스로 숨을 참아서 질식사하다니, 쓰레기에게 어울리는 비루한 죽음이었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말 끝난 걸까.”
“정 불안하면 이렇게 해 버리죠. 잠깐만 고개 돌리고 있어요.”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머리와 몸뚱이만 남은 바르카의 시체 위로 수십 가닥의 선이 그어졌다. 퍼억-! 참격을 마친 로난이 납도함과 동시에 그의 몸뚱어리가 산산이 분해됐다.
“역겨운 놈.”
이 정도면 바르카의 할아버지가 와도 되살아나지 못할 터였다. 피 웅덩이 속을 뒹구는 육편과 내장 쪼가리의 어디에서도 사악한 웨어타이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맹렬한 추위는 벌써부터 피와 고깃조각을 딱딱하게 얼리고 있었다.
휘이이잉···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제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바르카라는 존재는 이 얼음 바다의 일부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일처리를 마친 로난이 등을 돌렸다. 아데샨은 눈을 돌리지 않고 그 끔찍한 염습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난이 머쓱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거 다른 곳 보고 있으라니까요. 뭐 좋은 거라고.”
“매듭이 지어지는 걸 보고 싶었어.”
며칠은 밥을 먹지 못할 장면을 감상했음에도 아데샨은 담담했다. 로난은 말없이 입술을 비틀었다.
‘매듭이라.’
하긴 바르카의 행적을 생각해 보면 그녀는 어머니와 오빠를 죽게 만든 원수를 처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녘의 끝까지 와서 피로 이루어진 마침표를 찍은 셈이었다. 문득 가만히 서 있던 아데샨의 몸이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뭐야, 괜찮아요?”
“으응. 그냥 좀 피곤하네···.”
아데샨이 어색하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색이 창백한 것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바르카를 정신 장악하기 위해 힘과 기력을 어마어마하게 소모했을 터였다. 그를 방증하듯 지금의 아데샨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아까의 2할도 되지 않았다.
당시 아데샨의 힘은 무언가에게 빌려 온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강력해져 있었다. 마치 로난이 성검의 힘으로 내재되어 있던 잠재력을 강제로 끌어왔을 때처럼.
저거 한 번 자빠질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다리에 힘이 풀린 아데샨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아.”
“내 이럴 줄 알았지.”
로난이 픽 웃었다. 그는 아데샨의 무릎이 바닥에 닿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받쳐 안는데 성공했다. 우물거리던 아데샨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고, 고마워···.”
“고생했어요. 좀 쉬어요.”
“최대한 빨리 일어나 볼게. 그런데···저 사람들은 어떡하지.”
아데샨은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얼음 평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얕게 파묻혀 있던 수인의 시체들이 얼음을 부수며 일어나고 있었다.
-그어어억···
-갸으으으으으으···
이미 깨어난 시체들은 정처없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영혼 없는 신음이 바람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바르카가 명령을 철회한 뒤 죽어서 그런지 딱히 목적이란 게 없어 보였다.
“안식을 줘야겠죠.”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시체란 움직이지 않기에 시체인 법이니까. 백골이나 잿가루가 되어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들을 관찰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른 일 먼저 하고 처리해도 될 것 같아요. 이리 업혀요.”
“미안해.”
아데샨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번 풀린 다리의 힘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말없이 그녀를 업은 로난이 연구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겁지.”
“매번 같은 대답 하는 것 같은데, 하나도 안 무거워요.”
“우으으으···거짓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아데샨이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로난이 픽 웃었다. 오히려 키를 생각하면 가벼운 편이었다. 이렇게 업은 채 걷고 있자니 예전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백수제 때도 이랬는데, 기억나요?”
“응···.”
“그때 알파 도플갱어가 왜 저로 변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 무렵의 저는 진짜로 저를 싫어했는데. 도플갱어도 실수를 하는 걸까요.”
밀렵꾼을 해치운 로난은 아데샨을 업고 복귀하던 중 도플갱어와 마주쳤다. 좋아하는 상대로 변하는 알파 도플갱어는 놀랍게도 로난 자신으로 변신했었다.
나중에는 대장군 시절의 아데샨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2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건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 그러게에···?”
아데샨이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그때 도플갱어가 사실은 로난이 아니라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는 건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변했었지.’
이야기가 이쪽으로 흘러가면 위험했다. 사계의 언덕에서의 추억, 불과 몇 시간 전에 이루어졌던 인공호흡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오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격해지는 심장 소리를 들킬 심산이 컸다. 뜨거워지는 체온도.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아데샨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 그나저나 그건 무슨 소리였을까?”
“뭐가요?”
“그, 용의 도시 이야기.”
“아. 맞네요. 그런 말을 했었지.”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정신을 장악당한 바르카는 네뷸라 클라지에와 관련된 정보도 술술 뱉어 냈다.
많은 정보 중에서도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회의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교주는 슬슬 용의 도시 아드렌과 접선을 해야겠다 말했다고 했다. 이는 불과 며칠 전의, 로난이 나바르도제와 함께 드리무어에 다녀온 지도 한참이나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분명 나바르도제와는 이야기가 끝났는데. 영 수상하군.’
로난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불의 어머니에게 네뷸라 클라지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데 성공했다.
아드렌을 통치하는 왕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결국 실세는 나바르도제일 텐데, 무슨 꿍꿍이가 따로 있는 듯했다. 무언가를 고민하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연락을 해봐야겠네요.”
“누구랑?”
“나바르도제 님이죠 뭐. 워낙 바쁘셔서 답장해 주실지는 모르겠는데.”
“···너 정말 발이 넓구나.”
아데샨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황제로 모자라 이제는 불의 어머니였다. 한순간 그녀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감돌았다.
‘내가 얘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붉어졌던 귀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본 로난은 언제나 대의만을 목표 삼아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사사로운 연정 때문에 그 길을 가로막게 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다.
어쨌든 두 사람은 연구실에 도착했다. 한층 더 강렬해진 악취가 코를 찔렀다. 실험도구나 표본 등이 깨지며 내용물이 흘러나온 탓이었다.
나름대로 정돈되어 있던 공간은 술 취한 오우거 가족이 하룻밤 묵어간 것처럼 변해 있었다. 아데샨이 말했다.
“딱히 기척은 안 느껴져.”
“저도요.”
“이제 걸을 수 있을 거 같아. 등 잘 썼어.”
다리에 힘이 돌아온 아데샨이 로난의 등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연구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찾던 것을 발견한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여기 있어요.”
“아, 찾았구나.”
다른 곳을 살피던 아데샨이 다가왔다. 그들은 나란히 선 채 아라단 터르겅의 시체를 내려보았다.
그는 얌전히 정자세로 누워 있었다. 얼마 전까지 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날뛰던 인물이라 믿어지지 않았다.
재생된 육체의 상태는 로난에게 잘게 썰리기 전보다 상태가 나아져 있었다.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죽었다기보다는 잠이 든 것 같았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거지?”
“우연히 재생되는 타이밍이 맞았나 봐. 신체가 복구되는 순간 바르카가 영혼을 놓아 준 거지.”
“···기적이네.”
로난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괴물처럼 늘어났던 오른팔도, 징그러운 촉수도 모두 사라지고 한때 아버지를 동경하던 웨어타이거 소년만이 남아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던 걸까.”
먹구름이 낀 것처럼 먹먹한 목소리였다.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모두 바르카라는 미치광이가 자아낸 불행의 피해자들이었다.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삶의 철칙이었기에, 로난은 그저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데샨을 조용히 안아 주었다. 잠시 어깨를 들썩이던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행히 그녀는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기운을 차리고 일어섰다. 감상에 젖어 있기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연구실을 수색했다. 바르카의 패악질을 증명할 만한 자료를 챙기고, 악용의 여지가 있는 마도구나 기물은 그 자리에서 파괴했다.
지하 뿐만 아니라 거대한 선박 또한 바르카의 은신처로 개조되어 있었기에 시간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자료를 배낭에 욱여넣던 로난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북부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거야. 자기들이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겠지.”
“그러면 좋겠네요.”
할 일을 마친 두 사람이 짐을 챙겼다. 아데샨은 자신과 로난의 배낭을 동시에 짊어졌고, 로난은 아라단의 시체를 들쳐 멨다. 죽어서도 전사로 싸운 이 소년은 볕이 내리쬐는 곳에 묻힐 자격이 충분했다.
이제 배회하는 시체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면 끝이었다. 들어왔던 통로를 지나온 그들이 석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후와아악! 느닷없는 열풍이 앞머리를 젖혔다.
“으윽?!”
“꺄악!”
뜨겁고 메마른 바람에는 불티가 뒤섞여 있었다. 화장터에서나 날 법한 타는 냄새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간신히 눈을 뜬 두 사람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염병, 이게 도대체 뭔 개짓거리야?”
“무, 무슨···!”
미치광이의 상상화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녹색 주름치마를 연상케 하는 극광이 어둑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지옥에서 길어 온 것 같은 화염의 파도가 얼음 평원을 불사르고 있었다.
-키에에엑!
-갸아악!
바르카가 모아 놓은 시체가 전부 타오르고 있었다. 되살아난 시체들은 불 속에서 헤매며 비명을 질러 대다가 재가 되었고, 되살아나지 못한 시체들은 가만히 누워 있다가 장작처럼 재가 되었다.
이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자는 없어 보였다. 사고가 정지한 로난이 화재 현장을 바라보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아데샨이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로, 로난. 저기!”
“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욱 커져 있었다. 로난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 시선이 닿은 그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오, 시발.”
거의 이타르간드만큼이나 큰 독수리 한 마리가 제자리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가 한 번 퍼덕일 때마다 불어닥치는 강풍이 불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몸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로난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영문 모를 기시감이 독수리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기억을 인양하는 데 성공한 그가 헛숨을 들이켰다.
“하이란···!”
틀림없었다. 폭풍의 황태자라 불리우는 최고위 바람 정령 하이란이었다. 로난은 2년간의 해주 여행 당시 그를 봤던 기억이 있었다.
‘하이란이 왔다는 건, 설마···.’
최고위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적어도 로난이 아는 사람 중에는 한 명밖에 없었다. 불현듯 아버지의 방에서 찾은 지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도의 목표 지점은 분명히 망령의 바다였다.
이윽고 망령의 바다를 뒤덮은 불길이 사그라졌다.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푹 파인 얼음 구덩이에서 시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데샨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나왔다.
“이, 이쪽으로 오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시선은 공중에서 날갯짓하고 있는 하이란에게 머물러 있었다. 폭풍의 황태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멀뚱히 내려보고 있었다. 일 분 정도가 지났을까, 로난을 응시하던 하이란이 갑자기 포효했다.
“퓌요오오오오!”
“히야아악!”
화들짝 놀란 아데샨이 로난을 끌어안았다. 하이란이 날개를 접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넓은 원을 그리며 선회하던 하이란은 마침내 어느 절벽 위에 착륙했다.
별로 멀지 않아서 육안으로 그 부근을 관찰할 수 있었다. 하이란의 주변을 살피던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건···!”
어느 엘프 여인 한 명이 하이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극광을 받은 은색 머리카락은 어스름한 녹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루비를 박아넣은 것 같은 적안은 여전히 퇴색되지 않았다. 구원자를 살리기 위해 분투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위대한 정령사. 그리고 구원자를 뒤따르던 네뷸라 클라지에의 창시자 중 한 명. 로난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엘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