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24)
227. 늦여름은 가을로(3)
#227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로난이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 일단 이거부터 뜯고 이야기할까?”
“이, 이게 뭐야?”
“북부에서 온 내 장비. 뭔지는 나도 아직 몰라.”
오로라 스칼에서 온 상자는 생각보다 작았다. 기껏해야 수박 반 통이 들어갈까 말까 한 크기인지라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손도끼 같은 거라도 들었나?’
로난이 상자를 열었다. 웬 시커먼 장갑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기사들이 착용하는 것처럼 손목까지 올라오는 장갑은 이름 모를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갑?”
“이건 또 예상 밖이군.”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틀림없이 단검이나 표창 같은 게 들어 있을 줄 알았다. 헌데 무기조차 아닐 줄이야.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의뢰할 때도 말했지만, 번잡하게 여러 무기를 다루기보다는 라만차 한 자루만 사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으니까.
“잘 만들기는 했네.”
장갑을 살펴보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많은 정성이 들어간 물건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은 금속 조각 수천 개가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런데 왜 한 쪽이지? 재료가 부족했나?”
“로난, 여기 무슨 종이가 있어.”
“엉?”
아셀이 그를 불렀다. 상자 안에는 두꺼운 양피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장갑 아래에 깔려 있어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로난은 양피지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따라 읽었다.
“원래 한 쪽에만 끼는 장갑이니 떼먹었다고 오해하지 말 것···손에 마나를 불어넣어 볼 것. 이게 무슨 소리야?”
“아마도 장갑에 마법이 각인되어 있나봐.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져.”
“마법?”
로난이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과연 눈을 가늘게 떠보니 손등 부분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카락으로 아로새긴 듯 정교한 마법진은 각 손가락의 말단까지 이어져 있었다. 슬쩍 착용해본 장갑은 로난의 손에 꼭 맞았다. 적당히 쫀쫀한 것이 착용감이 썩 마음에 들었다.
‘마나를 불어넣어 보라 했었지.’
로난은 종이에 적힌 대로 마나를 움직였다. 한순간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나더니 장갑의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갈고리 같은 손톱이 자라났다.
철컥! 검은 칼날로 이루어진 손톱은 자라나는 힘만으로 양피지를 꿰뚫었다. 아셀이 어깨를 움츠리며 기겁했다.
“히익!”
“오, 시발.”
로난의 눈이 커졌다. 로난은 이 손톱이 라만차의 부서진 파편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재량껏 활용해보라 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활용할 줄이야. 게다가 각 손가락마다 따로따로 손톱을 뽑을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마나의 흐름을 끊자 손톱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거 좋은데.”
어째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로난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다양한 활용성을 충족시키는 장비였다. 튼튼한 것이 방어용으로 쓰기에도 적합해 보였다. 그가 아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렇게 잘 만들 줄 알았으면 네 것도 하나 만들어 달라 할걸 그랬네. 미안하게시리.”
“나, 나는 괜찮아. 지금도 충분해, 응.”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그럼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볼···”
“같이 갈게.”
말을 맺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왔다.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어느새 평온을 되찾은 아셀의 얼굴은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진지했다. 가만히 그를 마주 보던 로난이 재차 질문했다.
“괜찮겠어? 이번만큼은 장난이 아니야.”
“응. 오히려 도울 수 있어서 기뻐. 너는 내 첫 번째 친구인걸.”
그리 대답하는 아셀은 말을 더듬지 않았다. 문득 필레온에 입학하기 전 아셀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사람 한 명도 제대로 들지 못해 낑낑거리고, 루나 고블린한테 눈물 콧물 쏟으며 도망치던 소년은 어느새 당당한 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시간 한 번 빠르군.’
로난이 입매를 비틀었다. 무언가 벅차오르는 이 심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고맙다.”
“그, 그런데 갈 수는 있는 거지? 인간의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곳 아니었어? 요, 용의 불을 정통으로 맞는다면···!”
그리고 아셀은 귀신같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의 감동이 모래처럼 날아가 버렸다. 저도 모르게 실소한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이미 준비해 놨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우리 둘만 가는게 아니라 한명 더 있어.”
“한명 더? 누, 누군데?”
“그건···”
로난이 막 대답하려던 차였다. 똑똑. 빠른 노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익숙한 청년의 모습을 본 아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슈, 슐리펜?”
“다른 한 명으로 누구를 데려가나 싶었는데 역시 아셀이었군. 예상하고 있었다.”
슐리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억거렸다. 그의 왼쪽 손등 위에는 붉은 용 형상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타르간드의 종복임을 상징하는 각인이었다.
“그래. 각인은 받을 만 하디?”
“아프지는 않았지만 영 불쾌하더군. 이거 확실히 없앨 수 있는 거겠지.”
“속고만 살았냐? 뭣하면 지금 없애줄 수도 있어.”
“됐으니까 서둘러 끝내지. 이릴 양 곁에서 오래 떠나 있는 것이 영 탐탁치 않으니.”
슐리펜이 말했다. 참 한결 같은 놈이었다. 로난은 아드렌에 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이 자식을 영입할 생각이 있었다.
어찌 보면 아셀과 슐리펜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도와줄 수 있냐는 말을 들은 슐리펜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러겠다고 승낙했다.
이릴이나 기타 보상에 관련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음에도. 그래도 괜찮겠냐 물어봤을 때 돌아온 답변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네가 도와달라 하지 않았나.
재수 없는 놈. 그리 중얼거린 로난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기구한 팔자를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 복은 있는 것 같았다. 각인과 관련된 사항을 아셀에게 공지해 준 그가 말을 이었다.
“출발은 사흘 뒤야. 공간 이동 스크롤로 대륙 최남단의 탄드레이 항구까지 이동할 거고, 거기서부터 아드렌까지는 이타르간드가 빌려준 배를 타고 갈 거야. 더 질문 있는 사람?”
“시,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수틀리면 화난 드래곤이나 네뷸라 클라지에랑 싸워야 하는데, 우리가 죽거나 저쪽이 죽거나 결판은 금방 날 테니까.”
로난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후의 질문은 없었기에 로난은 해산을 선언했다.
“그럼 그렇게 알아 둬. 아셀 너는 이르한테 들러서 각인 꼭 받고.”
“으, 응. 알았어.”
두 사람이 떠나갔다. 이제 작별인사를 제외하고 남은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로난은 미리 작성해 놓은 서류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바렌이 집무실에 없어서 한참을 찾아 헤매야 했다. 그를 발견한 곳은 단풍이 만발한 사계의 언덕 근처였다.
“얼씨구.”
오랜만에 보는 바렌은 자이파의 부관이었던 네메아 소령과 함께 있었다. 나란히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아주 사이가 좋아 보였다.
잘 어울리는군. 웨어라이온 커플이라. 기척을 감추고 다가간 로난이 그의 등을 쿡쿡 찔렀다.
“오랜만이에요. 바렌.”
“허어어억! 로, 로난?!”
로난과 눈이 마주친 바렌이 펄쩍 뛰어올랐다. 고양잇과라 그런지 도약력이 남달랐다. 로난은 미리 준비해 놓은 종이를 내밀었다.
“뭘 그렇게 놀래요. 데이트 중에 미안한데, 이것 좀 확인해 줘요.”
“데, 데이트라니, 그런 거 아닙니다. 네메아 양과는 그냥···!”
바렌이 횡설수설 헛소리를 내뱉었다. 덩치값을 저렇게 못 하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네메아가 미간을 좁혔다.
“저는 데이트인 줄 알았습니다만.”
“허어억! 무,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바렌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네메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에서 자이파와 기 싸움을 펼치던 남자와 동일인물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보다 못한 로난이 바렌의 코트 주머니에 서류를 꽂아 넣었다.
“전 갈게요. 나중에 읽어 봐요.”
“자, 잠깐만요! 제가 금방···!”
“데이트 잘 해요. 안녕!”
로난은 술에 취한 것처럼 주절거리는 바렌을 뒤로 한 채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네뷸라 클라지에를 찾아 용의 도시를 들쑤시고 다니겠다는 내용이 적힌 동아리 활동 계획서는 그의 콩알만한 심장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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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저마다의 채비를 마친 로난과 아셀, 슐리펜은 사흘 뒤 새벽에 기숙사 앞 공터에 모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교정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몰래 배웅을 나온 아데샨이 걱정스레 물었다.
“북부에서 오자마자 떠나네. 제발 조심해서 다녀와.”
“별일 없을 거에요.”
“이타르간드는?”
“배를 준비하는 것 때문에 미리 남부에 가 있어요.”
작별 인사는 어제도 했지만, 로난의 계획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데샨이 물었다.
“정말 같이 안 가도 되겠어?”
“걱정하지 말고 학생회 일에 집중해요. 어차피 용들한테는 정신 장악도 안 통할거고.”
“그건 그렇지만···뭔가 불안해서.”
“이제 가야 해요. 진짜로 괜찮으니까 들어가서 마저 자요.”
로난이 아데샨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경직되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저, 정말. 다들 보는데···!”
“뭐 어때요.”
로난이 낄낄거렸다. 어릴 때부터 이릴과 인사처럼 하던 행동이라 사귀게 된 이후로는 거의 습관적으로 하고 있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부럽다.”
“더럽군.”
퉷. 보다 못한 슐리펜이 침을 뱉었다. 설마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에게 이런 기만을 당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시선을 내린 그가 엄중하게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은 네가 책임자다. 이릴 양을 지켜라.”
“뺘잇!”
시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날개를 펼쳤다. 이릴의 집에 살다시피 하는 둘은 어느새 제법 막역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지독하리만치 깔끔을 떠는 것과 이릴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그들에게 유대감을 심어 주었다.
“자. 받아.”
염장질을 마친 로난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스크롤이 무더기로 들려 있었다. 탄드레이 항구까지 가기 위한 공간 이동 스크롤이었다. 가능하면 크라티르에게 부탁하고 싶었지만, 어딘가로 출장을 가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제도에서 남부를 세로로 횡단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당 일곱 장의 스크롤이 필요했다. 유령마 대여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이 소모되었지만, 로난과 아셀에게는 이전에 그랑시아 가에게 받은 어음패가 있었다. 슐리펜을 돌아본 로난이 다소 미안함이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이건 좀 무리한 거 아니냐. 물론 그랑시아가 엄청 잘 사는 건 아는데.”
“상관없다. 시간을 절약하는 게 중요하니까.”
“고맙다. 어젯밤에 들었는데, 누나가 너 걱정 많이 하더라.”
“이릴 양이···?”
“그래. 다치지 말고 오라고 했어.”
별안간 슐리펜이 얼굴을 돌렸다. 옆으로 삐져 나온 입꼬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조금 기분 나쁜데 말해 주지 말 걸 그랬나. 배신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아셀이 고개를 숙였다.
“우우···.”
“맞다. 아셀.”
그때 아데샨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셀에게 다가온 그녀가 손바닥만 한 나무곽을 내밀었다.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뒤로 젖혀야 했다. 아셀이 더듬거리며 질문했다.
“이, 이게 뭐에요?”
“어젯밤에 마르야가 이걸 전해 주랬어.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네.”
“저, 저한테요?”
“응. 이건 너한테만. 무사히 다녀오라면서.”
아셀은 떨리는 손으로 함을 열었다. 아주 작은 유리병 열댓 개가 죽 늘어서 있었다. 그것이 마법사를 위한 초소형 특제 포션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아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이건···!”
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세 사람 모두에게 마련해 준 포션과는 별개의 선물이었다. 똥 같던 기분이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피식거리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진짜 출발하자.”
“조심해서 다녀와.”
아데샨은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스크롤을 펼쳤다.
우웅! 마나의 파장과 함께 일그러진 공간이 그들의 형체를 집어삼켰다. 아데샨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셋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