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3)
24. 누이를 위하여(3)
#24
크라티르가 허공을 잡아당겼다. 배경을 이루던 공간이 커튼처럼 뜯겨 나갔다.
텅 비어 있던 풍경이 사라지며 사람으로 가득 찬 대광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신입생과 대면한 군중이 하늘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반가워요! 후배님들!”
“혹시 하늘 연금술에 관심 있는 사람 있나요···?”
“무예과면 제발 마상시합 동아리에 들어오자!”
그들은 모두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필레온 786기. 로난의 기수보다 한 해 앞서 입학한 필레온 아카데미의 2학년 선배들이었다.
바글바글한 학생들을 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인간들이 다 우리 선배야?”
“많다아아···.”
아셀이 입을 벌린 채 감탄했다. 고작 한 기수라고 들었는데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확실히 마법사의 수가 적어서 그런지 대부분은 무예과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혹시 모르는 분이 계실까봐 설명드리지요. 대면식은 앞으로 학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보게 될 바로 윗기수의 선배들과 인사하고, 통성명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크라티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른바 선후배간 친목의 장이라는 소리였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는 우수자 시상, 연회 등의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그때 2학년 진영 쪽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하하! 이번 기수에 제국의 샛별을 제친 놈이 있다면서? 한 판 붙자!!”
2학년 무리가 양 옆으로 갈라지며 곰을 연상케 하는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현재 순위 2위. 저번 기수 무예과의 수석, 브라움 비오단이었다.
“브라움! 브라움! 브라움! 브라움!”
무예과 학생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맨 앞에 나온 브라움이 팔뚝을 굽히며 포즈를 취했다. 나무줄기를 연상케 하는 근육은 당장이라도 교복을 찢고 나올 것 같았다.
크라티르가 수염을 만지며 웃었다.
“하하, 브라움 군은 여전하군요. 검의 무게는 잘 늘리고 있나요?”
“네!! 모두의 덕분에!! 120kg로 증량 성공했습니다!!”
“잘 됐군요. 그럼 가벼운 인사를 위한 무대를 마련해 볼까요?”
크라티르가 다시 허공에 손짓했다. 이번에는 무언가를 움켜쥐고 누르는 듯한 동작이었다.
-쿠구구구구!
별안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광장이 진동하더니 크라티르를 중심으로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교수들 역시 침식에 휘말렸지만 그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머지않아 반경이 200m 정도 되는 거대한 원형의 공간이 생성되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투기장의 모습에 지켜보던 신입생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이, 이게 뭐야?”
“굉장하다···!”
반면 2학년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작년에 이미 본 광경이기도 하거니와, 필레온에서 지내다 보면 더한 장면들도 훨씬 많이 보게 되기 마련이었다.
“으흐흐. 작년에는 우리도 저랬는데.”
“너무 놀라지는 말라고, 친구들!”
오히려 그들에게는 눈이 동그래진 신입생들이 훨씬 더 재밌는 구경거리였다. 크라티르가 외쳤다.
“그렇다면 무예과의 인사 먼저 진행하겠습니다. 상위 10인을 호명할 테니 투기장으로 내려와 주세요. 먼저 신입생 무예과 수석! 슐리펜 시니반 데 그랑시아!”
“와아아아아!”
신입생의 인파가 갈라지며 슐리펜이 걸어 나왔다. 기수를 가리지 않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과연 제국의 샛별 다운 인기였다. 로난의 이름은 바로 다음 순서에 불렸다.
“다음으로는! 신입생 무예과 차석! 로난!”
“와아아아아아!!”
“에이 씨벌, 놀래라.”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란 로난이 혀를 깨물었다 . 그는 얼떨떨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투기장에 올라섰다.
“···니미, 가벼운 인사라며?”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학생들, 특히 2학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혜성처럼 등장해서 실기에서 1등을 차지한 소년의 이야기를 모르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얘, 얘, 쟤 턱선 좀 봐. 사과도 깎겠다.”
“우와···잘생겼다. 슐리펜 님 옆에 서도 안 꿇리는데?”
“평민 출신인가? 성이 없네.”
크라티르는 양측 무예과의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호명했다. 총 20명의 학생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로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맨 앞좌석에 앉아 양손을 흔들고 있는 이릴의 모습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때 저기 옆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오랜만이다!”
“마르야.”
“머리를 잘랐으면 잘랐다고 얘기를 했어야지. 보면서도 긴가민가 했네.”
호명된 학생 중에서는 9등을 한 마르야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활기 넘치는 말총머리를 하고 있었다. 마르야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 돌아 보이며 말했다.
“교복 어때? 어울려?”
“응.”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우월한 체형 덕에 옷맵시가 잘 살아났다. 마르야는 쾌활한 웃음을 터뜨리며 로난의 팔뚝을 탁탁 쳤다.
“너도 머리 엄청 잘 어울려! 진작 그러고 다닐 것이지!”
“어색해서 싫어.”
“못 보는 동안 뭐 했어? 갑자기 꾸미게 된 계기라도 있으신가?”
마르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로난은 지난 보름간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밀렵꾼 조직의 지부 하나를 사실상 궤멸시키고, 알에서는 뭔지 짐작도 안 가는 괴생물체 시타가 깨어났다. 겸사겸사 데려온 누나에게 슐리펜이 푹 빠졌고, 그랑시아 가의 비밀 대장간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로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 별 일 없었어.”
“흐으음? 더 수상한데···?”
마르야가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난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냐? 갑자기 불려 나와서 싸우라 하고.”
“뭐야, 대면식 단골 행사 중 하나잖아. ‘가벼운 인사’에 대해서 모르는 거야?”
“전혀 가볍지 않은데.”
마르야가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난의 무지에는 이제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손짓을 해 가며 ‘가벼운 인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요컨대 신고식이라 이거군.”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신입생이 2학년을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
가벼운 인사는 입학식의 주요 행사였다. 신입생과 바로 윗기수의 성적 우수자들이 대련을 펼치고, 서로의 기량을 뽐내는 자리.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원래 칼을 맞대야 친해지는 법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나저나 정말···머리는 그냥 잘라야 될 때가 되서 자른 거지?”
“그렇다니까.”
마르야가 침음을 흘렸다. 그녀는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은 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1학년과 2학년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섰다. 크라티르가 말했다.
“자, 그럼 1학년 학생들은 지명을 시작해 주세요! 슐리펜 군 부터!”
슐리펜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뻗어 자기 앞의 청년을 가리켰다. 현재 2학년의 1등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나스도였다.
나스도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난이 지명할 차례가 돌아왔다. 그의 앞에 서 있던 곰 한 마리가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으하하! 네가 그 소문의 차석이구나! 반갑다 로난!!”
2학년 무예과의 2등. 브라움 비오단이었다. 로난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으쓱였다. 브라움의 등에는 거의 로난만한 대검 한 자루가 비껴서 채워져 있었다.
“칼 죽이는데요.”
“오오! 이 놈의 근사함을 한 눈에 알아보는 건가! 역시 너와는 말이 통할 줄 알았다!! 자아, 나를 지명해라!”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움이 괴성을 지르며 양 팔을 들어 보였다. 객석에서 또다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 친구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안타깝게 됐군.’
흥분에 찬 브라움의 얼굴을 본 로난이 쓰게 웃었다. 어차피 누가 상대던 승부는 몇 초 안에 끝날 터였다. 샥 하면 툭. 그것이 브라움의 미래였다.
로난이 돌아서려는 차였다.
“저, 저렇게 체격 차이가 많이 나는데···괜찮을까?”
“음?”
객석의 맨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릴에게 자신의 칼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음. 걱정할 만도 하지.’
이릴은 오늘이면 다시 님버튼으로 돌아간다. 정 많은 누이의 성격 상 틀림없이 걱정을 달고 살 터였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로난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교장님. 건의 사항이 하나 있는데요.”
“음? 뭔가, 로난 군?”
“저 혼자 2학년 모두를 상대해도 될까요?”
어조는 차분했으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끔찍한 침묵이 대광장에 내려앉았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난의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크라티르는 교수들과 짧은 토론을 나누었다. 그를 비롯하여 당시 로난의 면접을 담당했던 심사위원들은 ‘뭐, 당사자들만 괜찮다면 별 상관 없지 않을까요? 재밌을 거 같은데.’ 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도 마침 로난 군의 기량을 더 알고 싶었다네.”
동기와 선배를 포함해서 19명의 대전자를 설득하는 것도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로난이 실기시험에서 그 슐리펜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다 상대해도 되냐? 싫으면 말해.”
“아, 아냐…! 어차피 신고식인데. 너가 이기면 우리야 통쾌하고 좋지.”
“나도. 그런데 괜찮겠어…?”
동기들은 도대체 로난이 무슨 기술을 보여주었길래 그러한 결과를 낼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상관없다. 알아서 해라.”
슐리펜 역시 로난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가벼운 인사라는 행사 자체를 시간낭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호의를 표하는 동기들과는 달리 2학년의 반응은 달랐다.
“어이 후배님. 무슨 생각으로 이딴 일을 저지른 거지?”
“크하하하! 완전 미친놈이었군 그래!”
“차석이라고 띄워 주니까 우리가 만만해 보이냐? 으깨버려, 브라움!”
로난의 발언은 선배들의 자존심을 짓밟기에 차고 넘치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시건방진 후배를 손봐주겠다는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브라움이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로난!! 내 열정을! 이렇게 기만해! 가만두지 않을테다!!”
물론 그따위 자존심은 로난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이릴을 확실하게 안심시켜 줄 생각이었다. 백날 걱정하지 말라고 입 아프게 떠드는 것 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럼, ‘간단한 인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전원 위치로!”
크라티르가 말했다. 로난과 열 명의 2학년생이 50m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섰다. 파란 넥타이를 맨 학생들은 모두 살기등등하게 로난을 노려보고 있었다.
“로···로난! 어쩌자고 그런 짓을···!”
이릴은 사색이 되어 로난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생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 본 그녀였지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았다.
-펑!
그때 시작을 알리는 마법 폭죽이 격발되었다. 열 명의 소년소녀가 로난을 향해 쇄도했다. 우직한 브라움이 쿵쿵거리며 선두를 달리고, 1등인 나스도가 그 뒤를 따랐다.
‘으음···좀 화려한 기술 없나?’
고작 몇 초면 좁혀질 간극이었지만 로난이 고민을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문득 실기시험 면접 당시 나비로제가 보여준 검술이 떠올랐다.
‘그래, 그거 좀 괜찮았지.’
칼과 함께 몸 전체를 회전시키며 시전하는 검술. 그 기이한 검로에 흥미가 생겨 잠시 따라해본 적도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정했다.”
“받아라!!!”
그때 눈앞에 당도한 브라움이 대검을 휘둘렀다. 금빛으로 번득이는 검신이 횡으로 날아왔다.
후우웅! 앞서 밀려온 풍압이 로난의 앞머리를 젖혔다. 제자리에서 두 바퀴를 회전한 로난이 그대로 대검을 받아쳤다.
쾅!
“어어억?!”
브라움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조금만 힘을 빼고 있었더라면 검을 놓칠 뻔 했다. 작은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익숙한 검로를 본 브라움의 눈동자가 커졌다.
“네, 네가 어떻게 나비로제 교관님의 검술을···!”
“오, 알아요?”
“어디서 그걸 배운 거냐!”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브라움의 대검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는 수직으로 세 바퀴를 돌며 검을 휘둘렀다.
“윽!”
브라움이 황급히 대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마나로 강화한 120kg의 대검은 대형 방패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로난이 노리고 있던 것은 정면 승부가 아니었다. 흑철검의 궤도가 미세하게 틀어졌다.
서걱! 대검의 자루가 잘려 나가며 육중한 검신이 바닥에 떨어졌다.
-쿵!
“허억!”
잘린 단면이 깨끗했다. 브라움이 다리 잘린 대검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로난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냥, 한 번 보고 베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