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38)
241. 알리브리헤(2)
#241
“돌아가면, 이릴 양에게 전해다오.”
“···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대사는 과거 징벌병 시절에 많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주로 사람이 픽픽 죽어나가는 처절한 전투에 투입됐을 때, 옆에 있던 놈들이 하는 말이었다. 머지않아 말뜻을 이해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너 이상한 생각하면 진짜로 죽여버린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너와 아셀이 살아남는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마.”
“니미, 시간을 끈다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얼간이는 자신의 희생으로 나머지를 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참담한 상황이라지만 인생의 반도 살지 않은 애송이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다.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시 선전할 가능성은 있지만 이걸 다 처치하는 것은 무리다. 그리고 아셀의 상태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그, 그건···!”
로난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실제로 그는 체내의 마나를 거의 소진한 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챙겨 온 마나 포션들은 나란소니아와 충돌할 때 모조리 깨지고 말았다.
물론 로난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바닥에 침을 뱉은 그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시건방지게 굴지 말고 네 살 궁리나 해. 한 번만 그딴 말을 지껄이면 땅콩을 까 버릴 테다.”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포위망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동료가 많이 죽어서 그런지 경계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탑 바깥에서 드래곤의 것으로 추정되는 포효가 들려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두 마리가 끝이 아닌 건가. 간격이 스무 걸음 정도로 좁혀졌을 무렵이었다.
【이제 슬슬 잡아라. 언제까지 미적지근하게 굴 생각이냐.】
【가급적이면 생포하도록.】
쌍둥이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주춤거리던 보초들의 얼굴에 또 다른 공포가 덧씌워졌다. 아무래도 무자비하게 부하를 굴리는 타입인 것 같았다. 보초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크, 크아아아악!!”
“그래. 한번 와 봐.”
쇳물처럼 뒤섞인 괴성이 울려 퍼졌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자 라만차의 검신이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쐐애액! 그가 횡으로 검을 휘두르는 순간 발사된 검기가 몰려오던 인파를 가로질렀다.
“크엑!”
“끄어억!”
촤아악! 토막난 몸뚱어리들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해당 동작이 반복될 때마다 피와 내장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어, 어명이다! 물러서지 말고 침입자들을 제압해라!”
하지만 한 번 달려들기 시작한 보초들은 동료의 죽음에 개의치 않았다. 선두 행렬이 쓰러지면 바로 뒤에 있던 놈들이 그 시체를 짓밟으며 돌진해 왔다. 이어지는 견제에도 불구하고 간격은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젠장.”
로난이 혀를 찼다. 덩치도 덩치였지만 머릿수가 너무 많았다. 아직 드래곤이나 뤼코포스는 나서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좆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큰일이군. 슬슬 몸도 무거워지고 있는데. 불현듯 옆에서 슐리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라.”
“뭐?”
그러고 보니 이 새끼가 통 조용했다. 마나의 격동을 감지한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슐리펜은 양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쥔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직 바람으로 화하지 않은 검신이 푸르스름한 빛무리에 휘감겨 있었다.
“너···.”
로난의 눈이 커졌다. 고오오오···태풍이 부는 날에나 들을 수 있는 소리가 검신 안쪽에서 맥동하고 있었다. 가늠할 수 없이 막대한 마나가 쇠붙이 안에 응축된 채 풀려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슈, 슐리펜···.”
“흐읍!”
아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찰나 슐리펜의 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콰아아아앙-!응축되어 있던 폭풍이 해방됨과 동시에 전방에서 몰려오던 적들이 소멸했다.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 바람이 반대편의 벽을 부수며 빠져나갔다.
“끄아아아아악!”
“이, 이게 무슨···!”
“허어억! 다, 다리가!”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던 공간 한가운데 널찍한 길이 나타났다. 재수없게 중간에 걸쳐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맙소사, 라다스카자!】
피해자 중에는 쌍둥이 드래곤 한 마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뜯겨나간 왼쪽 팔을 부여잡은 채 신음을 흘렸다. 아셀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드, 드래곤의 신체를 절단하다니!”
비기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슐리펜의 얼굴은 열흘 정도 사막에서 헤매다 온 사람처럼 초췌해져 있었다.
“···확실히 지치는군.”
슐리펜이 취한 듯이 비틀거렸다. 성능과 비례하는 기력을 소모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 등신아, 그렇게 무리해서 뭘 어쩌려고···”
로난이 뭐라고 외치려던 차였다. 갑자기 몸을 돌린 슐리펜이 그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다. 샌님 같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악력이 상당했다. 그가 얼굴을 바짝 붙인 채 입을 열었다.
“회중시계는 한 번 닦아라. 피가 묻었을 수도 있으니까.”
“너···!”
뭐라 할 새도 없었다. 후우웅! 슐리펜이 로난을 무너진 벽 쪽으로 던졌다. 비기의 위력에 위축되어 있던 보초와 광신도들은 날아가는 두 사람을 붙잡지 못했다. 로난에게 매달려 있던 아셀 또한 덩달아서 날아갔다.
“흐아아악!”
“아뿔싸!”
“노, 놓쳤다!”
보초들이 당혹성을 터트렸다. 그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두 사람은 이미 탑 바깥의 상공에 도달해 있었다.
“병신이 진짜···!”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있던 층이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밤바람이 귓가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우연히 시선이 닿은 하늘에는 드래곤 대여섯 마리가 원을 그리며 선회하고 있었다.
그 얼간이가 기어코 저지르고야 말았다. 다시 교전을 시작했는지, 그들이 떨어진 층 쪽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콰가각! 카각! 슐리펜의 상징인 바람의 참격이 대기를 찢으며 그어지는 것이 보였다.
‘침착해.’
로난이 심호흡했다. 터질 듯이 뜨거웠던 머리가 약간 식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냉철하게 답을 찾아야 했다.
슐리펜은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명색이 제국의 샛별이니 시간은 제법 끌겠지만 저 수를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죽는 걸까? 문득 쌍둥이 드래곤 중 한 명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생포한다고 했었어.’
가급적이면 생포해라.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말을 믿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가 됐던 이대로 넋을 놓고 있다가는 슐리펜은 헛짓거리를 한 게 되니까.
“후.”
해야 할 일을 정한 로난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흐려졌던 주변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목에 매달린 채 비명을 질러 대는 아셀이었다.
“흐아아악! 끄아아아악!!”
다음으로는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는 거대한 호수가 보였다. 탑과 밤하늘의 풍경을 그대로 담아낸 호수는 어지간한 마을만큼이나 거대했다. 로난이 말했다.
“아셀. 마법 쓸 수 있어?”
“끄아아으윽! 미, 미안해. 마나가 거의 없어서···!”
“거의라면 조금은 있다 이거네.”
무언가를 생각하던 로난이 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검기가 벽면과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가 위쪽에서 떨어지고 있는 파편들을 가리켰다.
“아셀, 다른 건 안 바래. 저 파편들이랑 우리 속도만 좀 맞춰 줘.”
“뭐, 뭐라고?”
“우리 위치를 숨겨야 할 거 아냐. 어서.”
로난이 재촉했다. 분명히 여기를 주시하고 있는 인원이 존재할 것이고, 물기둥이 하나만 솟았다가는 금새 들켜버릴 터였다.
“아···!”
말뜻을 깨달은 아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런 걸로 눈속임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뭐라도 해야 했다. 마지막 마나를 긁어낸 그가 쥐어짜내듯이 외쳤다.
“이, 인비저블 핸드!”
정겨운 주문이 울려 퍼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의 몸을 쥐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낙하 속도가 느려졌다. 퍼엉-! 로난이 아셀을 끌어안음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몸뚱이가 호수에 처박혔다.
퍼버퍼버벙! 거의 동시에 떨어진 파편들이 수면 위로 작렬했다. 크고 작은 물기둥 수백 개가 호수 위로 솟구쳤다. 다른 층에서 그들을 추격하던 보초들이 당황하며 멈춰섰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떨어진 것 같은데? 젠장, 이래서야 알아볼 수가 없잖아…!”
호수를 바라보던 보초들이 혀를 찼다. 마음만 같으면 전격 마법으로 싹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드래곤들이 재물을 보관하는 장소 중 하나라 그럴 수가 없었다.
“윽···!”
처박히듯 물속으로 가라앉던 로난이 눈을 떴다. 몸을 휘감은 물이 차가웠다. 멀어진 수면 주위로 일렁이는 빛무리가 보였다.
‘살았다.’
다행히도 속도가 줄어서 추락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깊고 넓은 호수는 마치 바다에 빠진 것과 같은 착각을 주었다. 그에게 안겨 있던 아셀이 물거품을 토했다.
“꼬로록!”
바동거리는 것을 보니 다행히도 건강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난이 헤엄치기 시작했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에 상륙하면 될 터였다. 그가 빠르게 부상하던 와중이었다. 아셀이 발작이라도 하듯 격하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으으으읍! 끄으읍!”
갑자기 왜 지랄이지? 이상함을 느낀 로난이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 시커멓고 텅 빈 물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뭔···!’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블랙 드래곤 한 마리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수면이 밤하늘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위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다.
‘씨발!’
위기를 감지한 로난이 속도를 높였다. 날개가 두 장인 걸로 봐서 오르세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 중요한 것은 그딴 것이 아니었지만.
‘왜 저런 게 호수 아래 있는 거야···!’
로난은 필사적으로 물장구를 쳤다. 하지만 드래곤의 유영 속도는 인간보다 훨씬 빨랐다. 간격이 거의 좁혀졌을 무렵이었다.
[안심하게. 나는 용왕의 편이 아니니까.]별안간 로난의 머릿속에 전음이 울려 퍼졌다. 멈칫거린 그가 고개를 돌렸다.
‘뭐?’
가뭄이 든 저수지처럼 메마른 목소리였다. 분명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금 전음이 들려왔다.
[내 입으로 들어오게. 일단 도망치게는 해 줄 테니.]영문 모를 말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따지고 싶었지만 물 속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잠시 수면 근처에서 주춤거리던 찰나였다. 텁! 갑자기 속도를 높인 블랙 드래곤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
“으윽···.”
로난이 눈을 떴다.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흐릿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가까웠다.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호수 아래에서 검은 드래곤을 마주친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 뒤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여기는?”
머지않아 시야가 선명해지자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동굴 같은 장소였는데 벽면이나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누운 자리 바로 옆에서는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치형의 천장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높았다. 문득 아셀의 존재를 떠올려낸 로난이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젠장, 아셀.”
다행히도 아셀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처럼 모닥불 근처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황급히 살펴 보니 다행히도 숨을 쉬고 있었다.
새끼가 사람 걱정시키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난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둘 다 옷이 어느 정도 말라 있는 걸로 봐서는 제법 오랜 시간을 기절해 있던 모양이었다.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벙찐 채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하수도일세.”
“뭣.”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웬 노인 한 명이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용의 도시 아드렌의 하수도지. 대륙 어디에서도 이런 건 찾아보지 못할 걸세.”
“당신은···!”
익숙한 얼굴을 본 로난의 눈이 커졌다. 오르세와 함께 술을 마셨던 주점의 주인장이었다. 그때와는 달리 소매를 걷고 있어서 금속으로 만든 의수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로난이 물었다.
“그쪽이 우리를 구한 거에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주점에서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거든. 용왕의 엄포를 듣고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역시 호수로 떨어지더군.”
“잠깐, 호수? 그렇다면 설마 당신이···.”
“그래. 드래곤이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새삼스레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담담한 말투였다. 그는 아까 자신들을 삼킨 블랙 드래곤이 본인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
적잖은 충격에 빠진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 오르세보다 기척을 잘 숨기다니.
“당황스럽네요.”
“놀라기는. 내가 블랙은 위장을 잘한다고 말했지 않았던가.”
뭐 하는 노친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별안간 가까이 다가온 그가 쭈그리고 앉았다. 가만히 로난의 얼굴을 뜯어 살피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역시 닮았군. 너무 닮았어.”
“닮다니, 누구를요?”
“한 명을 집어 말하기 어렵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자와 가장 혐오하는 자를 동시에 닮아서 말이지. 교단에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노인이 말꼬리를 끌었다. 교단이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찰나 어느 용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블랙 드래곤, 잘려나간 왼쪽 손을 대신하는 의수. 표류하던 정보들이 하나로 모여 결론을 도출했다. 로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알리브리헤?”
“역시 내 이름을 알고 있군.”
노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보니 그의 어깨 위로는 반짝거리는 마나가 미세하게 새나오고 있었다. 의수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들은 정체가 뭐지? 내 처음이자 마지막 휴가를 망치러 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