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43)
246. 용과 함께(3)
#246
전투가 재개되었다. 지면을 박찬 오르세가 적진을 향해 도약했다.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등뼈처럼 솟아나며 적진을 가로질렀다.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흐아아악!”
“어, 얼음?!”
겨울의 마녀에게 전수받은 얼음은 반룡의 비늘 따위는 두부처럼 꿰뚫어 버렸다. 애초에 이타르간드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간 적이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꼬치가 된 병사들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커어어엉!”
“이봐, 진정해, 진정···끄악!”
몸집이 큰 드레이크들은 더욱 큰 피해를 보았다. 발이나 복부를 꿰뚫려 넘어지거나, 가시를 피하려다가 근처에 있던 병사들을 짓밟아 죽였다. 용의 불과 가장 근접한 화염 숨결은 피아를 식별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분사되고 있었다.
“죽이는군.”
그 난장판을 지켜보던 로난이 감탄을 흘렸다. 역시 난전을 개시하는 데 있어서 마법사의 광역 공격만큼 좋은 건 없었다. 살인 기계라는 별명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히, 히이익! 미안, 미안해요! 무서웟···!”
막상 죽음의 협주곡을 연주 중인 본인이 저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는 것은 조금 우스웠지만. 아셀을 돌아본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얌마. 여기서 니가 제일 무섭거든.”
“흐야아악! 또 온다!”
아셀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상대를 떨쳐내듯이 휘두른 손짓에 달려오던 반룡 셋이 날아가 버렸다. 어쨌거나 맡은 소임을 잘 해내고 있었으니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네놈들이-감히!】
그때 적진 한복판에서 노기 어린 외침이 울려 퍼졌다. 로난이 고개를 돌리자, 물 먹은 해면처럼 팽창해 가고 있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치렁치렁한 비단옷이 찢어진 자리 아래로 푸르스름한 비늘이 드러나고 있었다.
“시발.”
잠시 잊고 있었다. 폴리모프를 해제한 드래곤 여인이 본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잘려나간 왼팔이 꾸무럭거리며 재생되고 있었다. 몸에서 배어 나오는 기운에 관절이 저릿거리는 것이, 제법 강력한 블루 드래곤이었다.
‘꽤 걸리겠는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솔직히 원 상태의 드래곤은 보통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저런 건 오르세가 단번에 치워 버리면 좋을 텐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이 새끼는 또 어디 갔어?”
“커어억!”
로난은 병사들을 썰면서 전장을 휘저었다. 더운 피가 얼굴을 적시고, 잘려나간 팔다리가 농익은 나무 열매처럼 떨어졌다. 이미 후각은 마비된 지 오래였다.
그렇게 헤매던 로난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오르세는 적진의 가장 뒤편에서 창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는 그의 주변을 하얀 옷을 입은 사람 두 명이 에워싸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
로난의 미간이 구겨졌다. 생각해 보니 저것들도 한 패였다. 둘 다 지부장급으로 보였는데, 모두 별의 가호를 두른 채 싸우고 있었다.
‘저건 별로 상성이 안 좋은데.’
별의 가호를 찢는 것은 강한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그때 빈틈을 포착한 오르세가 창을 내질렀다. 카아아앙! 요란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하지만 이번에도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오르세가 이를 악물었다. 기괴한 색채로 일렁이는 장막에는 생채기조차 없었다.
장막 너머에 있는 노파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르세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얄미운 조소를 머금었다.
“부질없는 짓이다. 마룡.”
【감히!】
오르세가 노성을 터트렸다. 공격이 막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직 나바르도제에게 닿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됐다. 한순간 몸을 뒤로 물린 그가 창대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한층 거세진 검은 기운이 장창을 휘감으며 올라왔다.
【사라져라!】
오르세는 검은 선풍이 되어 달려들었다. 어지간한 드래곤의 머리도 단 번에 부숴 버릴 강공이 두 광신도를 덮쳤다. 콰아아앙! 충돌과 동시에 아까보다 배는 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말도 안 되는···.】
허나 장막은 여전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의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오르세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이 깃들었다.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죽어라.”
“모든 것은 별의 이름 아래 사라지리니.”
역으로 빈틈을 포착한 신도들이 공격에 나섰다. 노파는 수상쩍은 주문을 외웠고, 다른 한 명은 검을 휘둘렀다.
충격을 받은 오르세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새하얗게 벼려진 칼날이 그의 몸을 가르려는 찰나였다. 촤악! 사각에서 날아온 붉은 초승달이 두 신도의 몸을 가르며 지나갔다.
“어···?”
“크억.”
오르세의 눈이 커졌다. 무슨 짓을 해도 부서지지 않던 별의 가호가 바스러지고 있었다. 철퍽. 허리를 기준으로 분리된 상반신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검기가 날아온 방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 이 개새끼들에게는 공격이 잘 통하지 않으니까.”
오르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로난이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다른 네뷸라 클라지에 신도들의 시체가 열댓 구씩 널브러져 있었다.
아셀과 오르세가 날뛸 수 있도록 미리 썰어 둔 것이었다. 다행히도 주교급이나 뤼코포스가 없어서 일을 빨리 마칠 수 있었다. 벙쪄 있던 오르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나중에. 설명하자면 길어서.”
로난은 답변하는 대신 등을 돌렸다. 설명이나 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네뷸라 클라지에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계단 위로 뛰어갔다.
“치우고 와라.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이봐, 기다···】
오르세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이미 그는 계단 위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때 저 구석에서 물기 섞인 비명이 울려 퍼졌다.
“히에에엑! 사, 살려줫!”
아셀은 얼음 방어막 속에 웅크린 채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완전한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한 여인이 주먹으로 방벽을 내리치고 있었다.
【썩 나와서 목을 내밀어라, 이 미물아-!】
“흐야아아악!”
잘 버티고 있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많이 죽였다고는 해도 아직 적은 수두룩하게 남아 있었다.
쿵! 쿵! 거대한 주먹이 방벽과 충돌할 때마다 거미집 같은 균열이 커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르세의 머릿속에 불현듯 극심한 분노와 모멸감이 차올랐다.
내가 지금 무시당한 건가? 그것도 적과 로난이라는 애송이 양쪽에게?
【···죽여 버리겠다.】
오르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중의적인 의미를 내포한 선언이었다. 그가 창을 움켜쥐자 하늘을 향해 휘어진 뿔 한 쌍이 그의 머리 위로 자라났다.
콰앙! 날아오르듯 도약한 오르세의 그림자가 적들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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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신음하던 슐리펜이 눈을 떴다. 이전의 일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몰려오던 적과 파괴되는 탑, 거센 바람 소리만이 기억 속에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살았나.’
몸 군데군데가 피멍이 든 것처럼 아팠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물로 뒤덮인 넓은 방, 하지만 용왕의 알현실에 비하면 훨씬 좁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몸을 움직이려던 슐리펜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팔다리를 비롯한 신체 전반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슐리펜은 자신이 거대한 철제 의자에 옴짝달싹도 못하게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힘을 줘 봐도 단단히 채워진 구속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뒤쪽에서 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일어났나? 정말 대단한 놈이군.】
낯익은 목소리였다.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슐리펜은 고개를 돌릴 수 없었기에, 그가 자신의 앞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머지않아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기억나느냐? 라다반스카다.】
라다반스카라는 신사는 뒷짐을 진 채 자기소개를 했다. 슐리펜은 그를 알고 있었다. 로난과 아셀을 도망치게 한 층에 있던 드래곤 중 한 명이었다.
【추잡한 짓거리를 하기에 앞서, 네놈의 저력에 찬사를 보내마. 나는 살아생전 너만큼 훌륭한 검사를 본 적이 없다. 모든 종족을 불문하고 말이지.】
라다반스카는 슐리펜이 행한 활약을 줄줄이 읊어 주었다. 종류를 불문하고 베어낸 적만 최소 세 자릿수였다.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나로 근력을 강화해 봐도 구속구는 풀리지 않았다. 라다반스카가 말을 이었다.
【내 동생도 결국 죽었다. 왼팔에 이어 목을 그인 것이 치명적이었지. 형제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는 건 썩 기분이 좋지가 않더군.】
한순간 슐리펜이 흠칫거렸다. 그러고 보니 거의 비슷하게 생긴 드래곤이 한 마리 있었는데, 새로 개발한 기술에 팔을 잘렸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가. 무아지경으로 싸워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놈의 목을 벤 건가.
드래곤을 베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뿌듯해졌다. 다른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검을 용의 피로 적시는 것을 꿈꾸던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슐리펜의 입에 옅은 미소가 드리우는 찰나였다. 푹! 불현듯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 격렬한 통증이 일어났다.
“크으···!”
【뭐가 즐겁다고 웃는 거냐. 버러지 같은 놈이.】
슐리펜이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자신의 앞에 쭈그려 앉은 라다반스카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검지가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슐리펜의 허벅지를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손을 한 번 휘적거린 라다반스카가 검지를 뽑아냈다. 비수처럼 길고 뾰족한 손톱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피를 핥으며 말했다.
【네 동료가 찾아올 때까지 너는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다. 고문 같은 졸렬한 짓거리는 영 탐탁치 않지만, 동생의 원수에게는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군.】
슐리펜은 이번에도 침묵을 유지했다. 사로잡힌 투사에게 허락되는 말은 시간 끌지 말고 얼른 죽이라는 호통뿐이었다.
동료들을 구하는 뜻을 이루었다면 더욱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슐리펜은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 남는 미련이 그를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뭐라도 해볼 걸 그랬군.’
이릴의 얼굴이 눈앞을 아른거리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의 심장을 움켜쥔 여인이었지만, 오히려 너무 애정이 깊은 탓에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불현듯 로난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 이릴 양이 다치지 말라 했다고 했었는데.
“···미안하오.”
슐리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라다반스카가 들었다면 퍽이나 좋아했을 말이었으나 목소리가 워낙에 작아서 전해지지 않았다. 검지를 촛불에 달구던 라다반스카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먼저 눈부터 뽑고 시작해 볼까.】
그가 슐리펜의 눈가에 손을 가져가던 차였다. 콰아아앙!! 갑자기 출입구 쪽에서 층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라다반스카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제기랄!】
계단과 이어진 대문이 부서져 있었다. 통로에서 몰려온 흙먼지가 레어를 침식하고 있었다. 워낙에 자욱해서 안쪽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뭐야?】
라다반스카가 막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입구를 뒤덮던 흙먼지 위로 둥그런 공백이 발생했다. 퍼억-! 고기를 식칼로 내리찍을 때나 들을 수 있는 파열음이 울려 파졌다.
【컥!】
동시에 라다반스카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시선을 내리자 새하얀 장검 한 자루가 배를 뚫고 자라나 있는 것이 보였다.
찰나 흙먼지 위에 공백이 하나 더 발생하며 웬 붉은 덩어리가 튀어 나왔다. 형형한 안광이 동선을 따라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덩어리와 마주친 슐리펜의 눈이 튀어나올듯 커졌다.
“로난?”
“이 씹새끼. 여기 처박혀 있었네.”
로난이었다. 그는 토마토 스튜에 한번 담궜다 뺀 것처럼 온몸에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피를 뱉어낸 라다반스카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은 또 뭐···!】
정확히는 외치려고 했다. 직선으로 쇄도해온 로난은 이미 그의 턱밑까지 접근해 있었다. 박혀 있는 칼자루를 움켜잡은 로난이 그대로 팔을 들어 올렸다. 스각! 붉은 호가 그려짐과 동시에 그어진 수직선이 라다반스카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아.】
반으로 갈라진 입술 사이로 단말마가 새나왔다. 촤아아악! 선이 좌우로 벌어지며 드러난 절단면에서 피와 뇌수가 쏟아졌다. 그대로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수평으로 참격을 날렸다. 몸통과 분리된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툭. 데굴데굴 굴러온 머리통은 슐리펜의 발치에서 멈춰섰다. 로난은 즉시 검을 휘둘러 그를 묶고 있는 구속구를 잘라냈다.
“여긴 어떻게···음.”
비틀거리며 일어난 슐리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로난이 무언가를 가볍게 던졌다.
슐리펜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아직 떨려오는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피 묻은 회중시계가 째깍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분명 자신이 로난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이릴 양에게 전해 달라는 유언과 함께. 라다반스카의 머리를 걷어찬 로난이 툭 내뱉었다.
“니가 직접 전해. 박박 닦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