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48)
251. 격돌(4)
#251
“대주교 알론 몬드레이라네. 자네들의 방종도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자신을 대주교라 소개한 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암청색으로 흘러내리는 수염과 머리카락은 꼭 심해에서 퍼올린 물 같았다. 매서우면서도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눈매는 세월의 풍파를 맞았음에도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두 사람을 노려보는 알론의 모습에서는 태생적인 고귀함이 느껴졌다. 가지런히 다듬어진 눈썹도 그렇고, 어쩐지 슐리펜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인간이었다.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댁은 좀 세 보이네.”
“내가 생각해도 약하지는 않은 것 같다네.”
그리 말한 알론이 잠시 슐리펜을 돌아보았다. 옅은 한숨을 내쉰 그가 말을 이었다.
“요즘 젊은 것들과 비교해 보면 더더욱.”
“잠깐. 당신은···.”
불현듯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어지간해서는 미동도 하지 않는 눈동자가 둥그렇게 떠져 있었다. 그때 가장자리에 몰려 있던 신도들이 소란을 떨었다.
“대주교님! 직접 나설 필요 없습니다. 여긴 저희가···!”
“내가 나설 필요가 없어서 이 지경이 된 건가?”
알론이 주변에 즐비한 시체들을 가리켰다. 발언한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체면치례를 따지기에는 너무 많은 손실을 입은 뒤였다. 하얀 로브와 대조되는 붉은 피는 한층 더 강렬하게 보였다. 알론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들은 걸리적거리니 썩 내려가게나. 오늘은 첫 번째 별을 맞이하는 날일 뿐, 중요한 날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네, 넵! 알겠습니다!”
탑 가장자리에 몰려 있던 신도들이 하나둘씩 도망치기 시작했다. 눈치를 슬슬 보는 꼬낙서니가 꼭 피난 가는 쥐새끼들 같았다. 로난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누가 보내준대?”
보자 보자 하니까 이건 사람을 길가의 벤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칼자루를 잡아당긴 로난이 횡으로 넓은 참격을 날렸다. 촤아악!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분해되며 수백 발의 산탄이 쏘아졌다.
“허, 허어억!”
급소를 겨냥하고 날아오는 산탄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 팔을 쳐들었다. 기괴하게 일렁이는 별의 가호가 벽처럼 솟아났다.
허나 발악이 무색하게도 로난의 검기는 장막을 찢어발기며 들어왔다. 죽음과 직면한 신도들이 유언이 될 비명을 내지르려는 차였다. 한순간 사라졌던 알론의 형체가 두 사람과 신도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뭔···.”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의 양손에는 푸르스름한 장검이 각각 한 자루씩 쥐어져 있었다. 알론의 팔이 흐릿해지나 싶더니 어디선가 파도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촤아아악! 신도들을 향해 쏘아지던 검기가 모조리 공중에서 폭발했다.
“안 되지. 멋대로 남의 부하를 죽이면.”
“이런 시발.”
잠시 경직됐던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보았다. 슐리펜의 검을 빼앗은 것은 요술 따위가 아니었다.
인지를 초월하는 속도로 난입한 알론은 참격으로 자신의 검기를 모조리 썰어 버렸다. 접근하는 것을 못 본 것도, 기습을 당한 것도 그냥 저 노친네가 더럽게 빨라서였다.
‘저 검술···어디선가.’
헌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면 검기를 썰어내는 그의 검법에서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로난이 고민하던 차였다.
“정말로 별의 가호를 무시하는군. 보면서도 믿기가 어렵구먼.”
“···댁은 정체가 뭐야?”
로난이 물었다. 아무리 대주교라지만 저건 좀 너무했다. 설마 저 작자도 드래곤인가? 알론은 로난의 말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자네의 존재에 감사하고 있다네. 위대한 별에게 받은 권능을 과신하고 훈련을 게을리 하는 신도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으니까. 이미 여러가지로 늦어버린 감이 있지만.”
“정체가 뭐냐고 물었어.”
“뭐라고 해야 하나···별의 가호를 비롯한 권능들은 어디까지나 기호품이지. 귀찮은 일 없이 빠르게 일처리를 하기 위한. 서류를 정리하다가 종이 테두리에 손을 베이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것은 드무니까 말일세.”
“종이라고?”
“그래. 실제로도 뻣뻣한 종이와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쓸데없이 억세고, 처리하기 귀찮고, 아주 마음을 놓고 있다가는 베인다는 점에서 말이지.”
로난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정체가 뭔지 물어봤는데 좆같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걸 보면 일단 죽일 놈은 맞는 것 같았다.
그가 칼자루를 움켜쥐는 차였다. 팟! 불현듯 알론의 형체가 일그러졌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한 로난이 검을 쳐들었다.
“빌어먹을, 온다!”
소리 없이 쇄도해오는 그의 모습은 꼭 유령 들린 바람 같았다. 로난과 슐리펜이 방어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충돌이 일어났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탑의 정상에 울려 퍼졌다.
“큭!”
“그래도 아주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군.”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알론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으쓱였다. 네 개의 날붙이가 허공에서 교차된 채 비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두 자루의 검을 활용하여 로난과 슐리펜을 동시에 감당하고 있었다. 썅, 깔보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이 수염으로 똥이나 닦을 노친네가!”
로난이 외쳤다. 그의 칼날이 붉게 물들었다. 슐리펜의 검이 바람의 형태로 화하며 사라졌다.
한층 더 격렬해진 맹공이 알론을 향해 쏟아졌다. 카가가각! 검과 검이 부딫히는 소리, 바람이 대기를 베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작렬했다.
“확실히 매섭군. 날카로워.”
일찍이 합을 맞춰 온 두 사람의 공세에는 빈틈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알론은 문틈새를 통과하는 모기처럼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로난의 횡베기가 이마를 스치고, 슐리펜의 칼바람이 뺨을 핥고 지나가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고 응수에 나섰다. 거대 사마귀를 상대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두 자루의 장검은 신체의 일부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촤악! 수백 번의 검격을 주고받은 세 사람이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핏방울이 몇 개가 땅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모두 로난과 슐리펜의 것이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알론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너무 어려.”
“빌어먹을.”
그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퉷. 피 섞인 침을 뱉어낸 로난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칼솜씨도 칼솜씨였지만 아직까지 별의 가호나 광풍 같은 권능을 한번도 쓰지 않았다는 점이 그 괴물 같은 실력을 짐작케 했다.
‘자이파와는 또 달라. 속도로 승부하는 유형이다.’
팽배한 침묵이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줄곧 조용히 있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로난. 이번 승부는 끼어들지 마라.”
“엉?”
“내 손으로 매듭지어야 할 악연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별안간 슐리펜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알론은 그의 모습을 흥미와 흥미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을 치켜든 슐리펜이 알론을 겨누었다.
“당신은 죽은 게 아니었나.”
“눈치가 빠르구나. 못난 후손아.”
“후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슐리펜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저 남자의 옛 이름은 알론 시니반 데 그랑시아. 악마와 손을 잡은 죄로 가문에서 지워진, 명예를 잊은 남자다.”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필레온에 재학하면서 몇 번씩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랑시아 가문의 일원이자, 슐리펜이 태어나기 전까지 가장 빼어났던 천재.
그리고, 세상을 기준으로 다섯 손가락에 꼽히게 유명한 배신자 중 한 명.
‘동명 이인이 아니었다고?’
순간 소름이 쫙 올라왔다. 생김새나 칼 쓰는 법에서 슐리펜과 비슷한 인상을 받은 것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제국을 양분하는 대가문인 아칼루시아와 그랑시아가 대립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도 알론이라 들었다. 뭐라고 했더라. 연회에 초대해서 상대측 귀빈을 모조리 죽이려 들었다고 했다든가.
어쨌든 그 이야기를 하는 에르제베트는 언제나 주먹을 움켜쥔 채 분노로 바들거리고는 했었다. 알론이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말게. 자네도 나이가 들어 늙어가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내 죄는 막연한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밖에 없다네.”
“소망?”
“그래. 누구보다 강해지는 것. 칼을 딛고 일어선 그랑시아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품는 꿈 아니겠는가.”
알론이 담담하게 말했다. 추악한 과거를 모른다면 그럴싸하게 들리는 주장이었다. 슐리펜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형제나 다름없던 아칼루시아의 등에 검을 찔러넣은 건가?”
“그게 힘을 대가로 내게 부여된 조건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네. 그리고···”
슉. 별안간 말을 잇던 알론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동체시력을 강화한 그는 어느새 눈앞에 당도한 알론과, 자신을 향해 찔러드는 그의 검을 볼 수 있었다.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고도의 집중으로 인해 느려진 시간 속에서 검을 뻗어 봤지만, 알론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수지 맞는 장사 아닌가.”
“큭···!”
“이런 것이 그랑시아의 미래라니 참담하군. 잘 가게나.”
알론이 말을 맺었다. 슐리펜이 입술을 비틀었다. 푸른 검 끝이 그의 복부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파아아! 별안간 뒤쪽에서 낙조를 연상케 하는 적색광이 번쩍이더니 알론의 몸이 뒤로 끌려갔다.
“뭣···.”
“이건 몰랐지, 늙은이.”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알론이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열 걸음 이상 간격을 두고 있던 로난이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영문 모를 상황이었지만 지금 원인을 파악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다급하게 방향을 전환한 알론과 로난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촤악! 두 개의 칼날이 엇갈린 자리에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간발의 차로 앞서 나간 라만차가 알론의 가슴 위로 붉은 선 한 가닥을 그었다.
“커억!”
알론이 헛숨을 들이켰다. 기침처럼 튀어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빈틈을 포착한 로난이 곧바로 치고 들어갔으나, 그가 황급히 몸을 물리는 탓에 결정타를 먹이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적잖은 피해를 준 것은 확실했지만.
“종이에 베이는 느낌이 어때. 엉?”
“네가···!”
알론과 눈이 마주친 로난이 픽 웃었다. 잘려나간 수염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벌어진 상처에서 뜨거운 핏줄기가 울걱울걱 솟구치고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알론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방심하는 찰나를 대비해서 오러를 아끼고 있던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입가의 피를 닦아낸 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흐···불찰을 인정해야겠군.”
“허세는. 댁은 이제 끝났어.”
로난이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았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검사들의 승부는 말 그대로 한순간에 갈린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로난은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감촉을 통해서 라만차의 칼날이 알론의 내장과 뼈 몇 개를 베어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안 좋은 부위로.
문득 따가운 시선이 뺨을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로난이 말했다.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인마. 저건 네가 혼자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흥.”
슐리펜은 별다른 말 없이 자세를 다잡았다. 로난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도너츠와 비슷한 몰골이 되어 신도들의 시체더미 위에 쓰러져 있을 터였다.
그들은 천천히, 하지만 빈틈없이 기세를 곤두세우며 알론에게 다가갔다.
“얌전히 목을 내미시지.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오래 살았잖아.”
“···난감하군.”
알론이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의 몸 상태로는 로난과 슐리펜을 동시에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들이 자아내는 굉음과 섬광은 여전히 밤하늘을 뒤흔들고 있었다. 고조되던 긴장감이 극에 달하는 찰나였다.
“이런 수는 별로 쓰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지.”
별안간 두 사람을 노려보던 알론이 입맛을 다셨다. 동시에 뛰쳐나간 슐리펜이 검을 휘둘렀다. 예리하게 연마된 바람의 참격이 그를 향해 쏘아졌다.
로난이 보기에도 썩 괜찮은 일격이었다. 하지만 슐리펜의 바람은 알론에게 닿지 못했다. 카아아앙-! 익숙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그건···!”
로난과 슐리펜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기괴하게 일렁거리는 역장이 알론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지겹게도 보아온 별의 가호였다. 그것도 굉장히 촘촘한.
알론이 말했다.
“예의를 모르는 후손부터 먼저 처리해야겠군.”
“뭐?”
파아앙! 동시에 알론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로난이 서둘러 응수에 나섰지만 대주교의 목표는 그가 아니었다. 엄청난 속도로 들이닥친 알론, 정확히는 별의 가호가 슐리펜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