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5)
26. 연회
#26
배웅을 마친 로난은 시타와 함께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갈레리온 성의 메인 홀은 파티를 위한 완벽한 장소로 탈바꿈해 있었다.
“왁자지껄하구만.”
“빠야~”
실기시험을 치를 때 방문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연회장을 둘러본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칼잡이 노릇은 때려치우고 마법이나 배울까···.”
빛으로 이루어진 새들이 날아다니며 지저귀고 있었다. 마법이 걸린 천장은 지붕 너머의 푸른 하늘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거진 오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긴 테이블 열 개가 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는 각 지방의 요리와 음료가 수놓아져 있었다.
로난은 버터를 발라 구운 대게 다리를 하나 집어들었다. 마지막 남은 다리였는데, 접시가 비는 순간 다시 온전한 대게 한 마리가 접시 위에 나타났다.
심지어는 맛도 끝내줬다.
“유령이 젖꼭지를 잡아 비트는 것 같군.”
교복 차림의 학생들은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직 학생의 신분인지라 술잔 부딪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마치 취한 것처럼 들떠 있었다.
“이렇게 필레온 아카데미에 들어오게 돼서 꿈만 같아요.”
“정말 그렇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정말 끝이라는 심정으로 지원했는데···크흑!”
심지어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학생도 있었다.
로난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입시를 준비하며 처음 해 본 노력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로난.”
“하···오늘은 또 뭐냐.”
로난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교복 차림의 슐리펜이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서 있었다.
몸에서 배어 나오는 기품은 여전했으나 왠지 모르게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로난이 대게를 한 입 물어뜯으며 말했다.
“표정이 왜 그래? 똥이라도 마렵냐?”
“이릴 양은 집에 돌아간 건가.”
“엉. 방금 바래다주고 왔지.”
“사는 곳이 어디지? 무엇을 타고 돌아가는 건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니가 그걸 알아서 뭐 하게 인마.”
“설마 호위도 없이 보낸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네놈은 인간이 아니다.”
“호위?”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슐리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평정을 유지하려는 듯 오른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말을 이었다.
“···노파심에 물어봤는데 사실인가 보군. 귀족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로난, 사고가 왜 사고인 줄 알고 있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일어나서 사고인 거다.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해라. 마차가 떠난 지는 얼마나 됐지? 가장 가까운 용병 길드는 서부 대로에 있다. 아니, 그냥 내 말을 빌려 주지. 네놈은 당장···!”
슐리펜은 아주 빠르고 정확한 발음으로 로난이 취해야 할 조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서커스보다 흥미로운 광경에 로난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릴과 만났을 때와는 정반대라 해도 좋을 모습이었다.
물론 로난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제도에서 가장 신용이 높은 마차 길드의 마차를 고용했고, 끄는 마부는 퇴역한 소드 익스퍼트 등급의 검사였다. 당연히 한 번의 사고 경력도 없었다.
“아니, 와이번이라도 와서 마차를 낚아채지 않는 이상 괜찮다니까?”
“와이번이 오면 당한다는 소리군.”
그러나 슐리펜은 무슨 상단을 호위할 병력을 때려 박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기존의 조치와 인근의 치안을 생각하면 명백한 과보호였다.
하지만 슐리펜은 귀에 밀랍이라도 처박은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듣다 못 한 로난이 시타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시타, 누나 냄새 기억해?”
“뺘아!”
“집까지 따라갔다가 내일 와.”
시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개를 펼쳤다. 로난의 어깨를 떠난 시타는 순식간에 검은 잔상이 되어 연회장의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슐리펜은 아직도 일장의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이제 진정해 인마. 방금 호위병을 보냈으니까.”
“···호위병? 설마 아까 네 어깨에 앉아 있던 새 말인가? 지금 장난···”
“그냥 새가 아니라 환상종이야. 어지간한 용병단보다 든든하니까 걱정 마.”
로난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 미심쩍은 눈빛으로 로난을 노려보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어지간한 용병단까지 있으면 더 좋겠지. 필요하다면 꼭 말하도록 해라. 어쭙잖은 자존심 부리지 말고.”
“그런데 너는 우리 누나의 뭐가 된다고 이 오지랖을 떠는 거냐?”
“······”
슐리펜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하여튼 귀찮은 놈. 그리 중얼거린 로난이 음식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차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으하하! 저기 오늘의 주인공이 납셨군! 이쪽이다! 후배님!!”
“야, 로난! 여기야!!”
참으로 요란한 이중창이었다.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 같았다.
“이런 젠장, 나도 밥 좀 먹자.”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마르야와 브라움의 모습이 보였다. 족히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학생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도란도란 모여 있었다.
“그래서 마르야 후배님, 그 말이 사실인가? 로난 후배와는 원래 알던 사이였다고?”
“네 브라움 선배님! 마르바스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 이후로 계속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오옷! 운명적인 만남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브라움이 호쾌한 인간이라고는 해도 벌써 친해지다니.
하여튼 친화력 하나는 경지에 이른 계집애다. 저런 재능이 있으니 훗날 대륙 최고의 거상이 되는 거겠지.
로난은 모인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대부분은 아까의 경합에 출전했던 선배들이었다.
“안녕 잘생긴 후배. 한 방에 박살 나서 기억 못 할 수도 있지만, 너와 겨뤘던 이리스라고 해.”
“왜 기억을 못 하겠어요. 단창 두 자루 쓰셨죠? 왼쪽은 역수로 쥐셨고.”
“어? 마···맞아.”
“맙소사! 그걸 다 기억해?! 나, 나도 기억 나 혹시?”
“거럼요. 메이스를 휘두를 때는 조금 더 무게 중심을 뒤로 두는 게 좋아요.”
로난은 선배들의 얼굴은 물론 사용하던 무기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경험을 기반으로 조언까지 해 주니 2학년생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
“세상에, 같은 천재인데 어쩜 이렇게 다를까.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봐!”
“도서관에 비밀 통로 있는 거 알고 있어? 스물두 번째 서가에서···”
“호수 밑바닥에 환상종 한 마리가 살아. 친해지면 연금술에 필요한 수초를 물어다 주니까 참고해.”
선배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꿀 같은 정보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개중 몇 개는 정말로 학교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만한 것이었다.
‘또 누나에게 신세를 졌군.’
로난이 미소 지었다. 단순히 이릴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짓이 이런 행운으로 돌아올 줄이야.
“저, 저기! 아까 엄청 멋있었어요···!”
“로난 님 맞죠? 혹시 사인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래그래. 동기인데 어색하게 굴지 말고 말 놔.”
눈치를 보던 동기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이었다.
“혹시, 로난 님?”
“엉?”
시선을 끄는 허스키한 고음이었다.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검보랏빛 머리의 소녀가 팔짱을 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로브 형식의 교복을 보니 마법과였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에르제베트?”
“어머, 기억하고 계셨군요.”
순간 왁자지껄 떠들던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단지 그녀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르제베트 데 아칼루시아.
무예과에 슐리펜이 있다면 마법과에는 에르제베트가 있었다. 혼자서 세 속성을 다루는 천재의 이름은 마법과를 넘어 무예과까지 알려져 있었다. 브라움이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오오! 이번 마법과의 수석이군! 미안하지만 후배님! 로난 후배와 이야기를 하려면 줄을 서야한다고! 자, 이리 오시게!”
유쾌한 농담이었지만 에르제베트는 웃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브라움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그쪽에게 말한 게 아니랍니다.”
-쿵!
“어억?!”
그 순간 육중한 압력이 브라움의 어깨를 짓눌렀다. 순간적으로 다리를 마나로 강화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릎을 꿇을 뻔했다.
“어라, 버티시네요? 덩치를 허투루 키운 것은 아니군요.”
“으, 으으으음···!”
브라움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대한 손이 자신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실례.”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또각. 에르제베트가 발을 내딛자 무리가 좌우로 갈라졌다. 잠깐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아셀이 로난의 등 뒤로 숨었다.
“히, 히이이익···!”
아셀은 에르제베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볼 수 있었다. 어두운 보랏빛을 띠는 마나는 자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그녀만의 마나. 오러였다.
‘버, 벌써 오러 개화의 경지에···!’
경고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로난이 정색하며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미안해요. 귀한 만남을 방해받은 게 화가 나서 그만.”
“당장 풀어.”
“그러죠.”
에르제베트는 순순히 로난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가볍게 손짓하자 브라움을 움켜쥐고 있던 마법이 해제되었다.
“허어억···! 헉! 제기랄···오늘 폼 다 구기는군···.”
브라움이 계단에 쓰러지듯 걸터앉았다. 다른 학생들이 그를 부축하러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에르제베트가 쿡쿡 웃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 거지?”
“양 떼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언제나 우습기 마련이죠. 그렇지 않나요?”
그 말을 들은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때로는 한 마디로도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참 피곤한 하루다. 하여튼 천재라는 작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인지.
‘마침 속옷도 보라색인지 궁금했는데 잘 됐군.’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이 싹수없는 계집애를 스트리퍼 데어리안과 비슷한 꼴로 만들어주려는 차였다. 에르제베트가 말을 이었다.
“대련 인상 깊게 봤어요. 제가 찾아온 이유는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예요.”
“제안?”
“네. 당신이 양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었어요. 사자는 사자의 무리에서 거닐어야 하는 법이죠.”
“알아듣게 말해. 최대한 간결하게.”
“성급하시긴. 잠깐만 기다려 봐요.”
품을 뒤적이던 에르제베트가 무언가를 로난에게 내밀었다.
“자, 받아요.”
큼직한 흑수정이 박힌 브로치였다. 뒷면에는 달을 향해 포효하는 수사자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슐리펜이 있는 그랑시아 가문과 쌍벽을 이루는 대가문, 아칼루시아의 문장이었다.
한순간 로난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에르제베트가 옅게 미소지었다.
“이건···.”
“혹시 의미를 알고 계신가요?”
“···대충은.”
“그렇다면 설명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당장 이번 주말이라도 괜찮아요. 저와 함께 아칼루시아 영지에 방문하도록 해요.”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르제베트는 교태로운 눈웃음을 남긴 채 몸을 돌렸다.
“···뭐,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이만.”
로난은 끝내 칼자루를 잡아당기지 않았다. 그는 에르제베트가 주고 간 브로치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에르제베트의 구두 소리가 우아하게 울려 퍼졌다.
또각. 또각. 또각···
빠당탕!
“끼약!”
별안간 에르제베트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넘어졌다. 주위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양팔을 앞으로 쭉 펼치며 얼굴부터 떨어지는, 정말 추하고 고통스러운 넘어짐이었다.
“괘, 괜찮나?”
얼마나 아파 보였으면 브라움이 그런 말을 꺼냈다. 벌떡 일어난 에르제베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두 배 정도 빠른 속도로.
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
단발머리 사이로 드러난 귀가 달군 쇠처럼 익어 있었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순간 마르야가 아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잘했어 귀염둥이! 저런 못된 년은 혼쭐이 나 봐야 해.”
“내, 내가 한 거 아닌데···?”
“엑? 네가 마법으로 민 거 아니었어?”
마르야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주위에 에르제베트가 걸려 넘어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그냥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졌어···.”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은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로난은 그때까지도 브로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르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뚫어지겠다. 그게 뭔데 그래?”
“초대장.”
“뭐?”
“아니, 나침반이라 해야 하나.”
흑수정은 어슴푸레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나를 머금고 있다는 의미였다. 로난은 죽기 전에 아데샨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본래 평민이었다. 재능을 증명하고 아칼루시아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이지. 그 기묘한 성에서 겪은 일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구나.” [성이라뇨?] [음, 어차피 얼마 안 남았으니 이야기해 줄까. 그러니까, 내가 필레온 아카데미에 다닐 무렵···.]아데샨은 바위에 기댄 채 자신이 아데샨 데 아칼루시아가 될 수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와 문지기. 가주의 시험을 마치고 받은 보물과 대가문의 일원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틀림없이 검사로서 두각을 드러내고 몇 년이 지나서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칼루시아 가문의 사상은 순혈주의를 추구하는 여타 가문과는 달랐다. 그들은 인재 등용에 있어 종족과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잠재성이 높은 소년소녀를 양자로 들이기까지 했다.
에르제베트가 주고 간 브로치는 아칼루시아 영지로 진입할 수 있는 일종의 초대장이었다. 가주의 시험을 보고, 가문의 일원이 될 기회를 주겠다는.
[귀족이 되면 좋은 게 있나요?] [일단 사회적인 입지가 올라가지. 그랑시아와 황실을 제외하면 아무도 대항할 자가 없으니까. 아칼루시아 가문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로난은 솔직히 아칼루시아 가의 일원이 될 생각은 없었다. 설령 나중에 마음이 변한다 하더라도 훨씬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아칼루시아 성이 품고 있는 다른 비밀들이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가문의 성에서는 지위나 보물을 제외하고도 분명 얻을 것이 있을 터였다. 어쩌면 거인들을 상대할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앞으로의 계획을 어림잡은 로난이 턱을 매만졌다.
‘일단···그 대장간에서 칼부터 받아 와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