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6)
27. 첫 수업
#27
아칼루시아 성이 품고 있는 다른 비밀들이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어림잡은 로난이 턱을 매만졌다.
‘일단···그 대장간에서 칼부터 받아 와야겠군.’
아칼루시아의 초대장은 정말이지 상상치도 못한 행운이었다. 만약에 받더라도 한참 뒤에나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로난은 아데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칼루시아 가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초대장과 실력 뿐이었다.
실력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험하게 굴리기는 했네.’
로난이 흑철검을 뽑았다. 전에 슐리펜을 만났을 때보다 심각해진 상태가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 연속 대련을 한 게 치명적이었다. 만약 말을 할 줄 알았더라면 당장 용광로에 처넣어 달라고 비명을 질렀을 터였다.
아무리 장비를 가리지 않는다고는 해도 이런 걸로 큰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로난은 안주머니에 잠들어 있는 금속패를 떠올렸다. 이릴에게 반한 슐리펜이 단발성 치매를 앓던 와중 준 것이었다.
‘그래도 그랑시아의 무기를 만들어 온 대장간이면 제법 튼튼한 걸 받아올 수 있겠지.’
로난은 그랑시아 가의 비밀 대장간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이 며칠동안 휴가를 냈다는 사실도.
‘오늘이 수요일이니까···어차피 주말까지는 기다려야겠군.’
어차피 필레온 아카데미의 규칙 상 평일에는 부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로난은 주말이 오기 전까지는 우선 아카데미의 생활을 영위해 보기로 했다.
연회는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신입생들은 각 기숙사 관리인들의 인솔을 따라 이동했다.
****
필레온 아카데미는 그 어떤 교육 기관보다 실력을 중시했다. 성적 우수자에게 주어지는 장학금과 각종 특혜가 그 증거였다.
상위 30%기준, 제국령에 속한다면 어디든지 무료 교통편이 제공되었다. 3등급 이하 금서를 학술연구 목적으로 열람할 수 있었다.
졸업 후 들어가고 싶은 마탑이나 기사단에 정식으로 초대장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혜택들이 재학 내내 제공되었다.
하지만 당근이 싱싱하다면 채찍도 매서운 법. 세 개의 계층으로 나뉘어진 기숙사 제도가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입학 첫날 밤. 열등생들의 기숙사에서는 어김없이 신입생 귀족들의 절규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닥이나 천장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었다.
“이, 이런 곳에서 지내라는 말이냐? 발브루스 백작가의 차남인 내가···?”
“여기가 내 숙소라면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
하위 10%들에게 제공되는 크라티르 관(본인이 제안했다)은 일반적인 백성들의 농가를 모티브 삼아 지어진 건물이었다.
검소한 목조 건물 내에서, 네 명의 귀족 소년들은 서로의 얼굴을 유령이라도 보는 것처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안내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크라티르 관은 네 명이 한 방을 씁니다.”
“그, 그럼 시종은 어디있는가. 짐을 정리하고 가사를 해 줄 시종은···!”
“크라티르 관에는 메이드나 관리인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활 수칙과 알아두시면 좋을 만한 정보가 적혀 있으니 확인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기, 기다려라!”
안내인은 귀족 소년들의 말을 무시한 채 방을 나섰다. 해당 조치에 학생들의 신분 따위는 고려되지 않았다.
아무리 부유하고 위세 높은 가문의 자제라 하더라도 성적이 낮으면 꼼짝없이 서민의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필레온을 운영하는 주체가 황실이기에 가능한 조치였다.
반면 상위권들의 기숙사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화려했다. 상위 10%가 지내는 기숙사 나바르도제 관은 황궁의 부속 건물이라 해도 믿길 수준의 우아함을 자랑했다.
“···아가씨는 뭐요?”
로난은 자신의 방문 앞에 서 있는 메이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묶음머리를 한 메이드가 다소곳이 손을 모으며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로난 님.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뭐냐니깐.”
“저는 로난 님의 가사를 담당하게 된 전속 메이드입니다. 요리나 빨래, 청소 등의 가사행위는 모두 제게 맡겨 주시면 됩니다.”
순간 메이드와 관련된 천박한 농담 수십 가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가까스로 욕구를 억누른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냥 밥만 잘 차려주면 안 돼요? 나 팔다리 다 붙어 있는데.”
“교칙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내가 벽에 똥칠을 해도 그쪽이 다 치운다 이거죠? 오줌을 변기가 아닌 세면대에 갈겨도.”
“그렇습니다.”
“쉽지 않은 아가씨군. 잘 지내 봅시다.”
메이드와 악수를 나눈 로난이 방문을 열었다. 님버튼의 집보다 두 배 정도 넓은 방은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침대는 세 사람이 뒹굴어도 될 정도로 넓었고, 공룡 같은 책장에는 값비싼 저서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죽이는데.”
아셀도 아마 이런 방을 배정받았을 터였다. 저능아처럼 입을 벌리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방을 천천히 둘러보던 와중, 책상 위에 놓인 책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뭐야?”
책자의 첫 번째 장에는 ‘수강 신청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배들이 말해준 기억이 났다. 필레온의 학생들은 듣고 싶은 수업을 골라서 들을 수 있었다.
로난은 종이에 적힌 글씨를 천천히 따라 읽었다.
[재학생들은 원하는 강의를 자유롭게 수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신입생의 경우는 첫 학기 간 필수적으로 수강해야 하는 과목들이 존재하니, 이 점 고려하셔서 수강 신청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수 수강 과목: 체력 단련 / 마나 연공 / 기본 격투술 / 제국 검술]“드디어.”
마나 연공이라는 글자를 본 로난이 주먹을 콱 쥐었다. 아무리 독학을 해 보려 해도 안 되는 것이 마나 감응과 연공이었다.
최근들어 마나를 다룰 필요성이 더욱 극심하게 느껴졌다. 아셀처럼 마나에 예민한 작자들 앞에서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도 맹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니미, 내가 더러워서라도 배운다.’
제국 검술 또한 흥미로웠다. 검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던 로난으로써는 제대로 된 검술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장 회전검만 봐도 쓸만하지 않았는가.
배워서 강해진다. 로난은 그리 각오를 다지며 다음 장을 넘겼다. 흥미로운 이름의 과목들이 빽빽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약초학, 마상 전투술, 궁술 기본···젠장, 왜 다 재밌어 보이냐.”
못 배운게 한이 되서 그런가 어째 전부 재미있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기초 정령학]과 [환상종의 교감과 이해]였다.
정령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궁금하던 개념이었고, 후자는 웨어라이온 바렌 교수가 담당하는 과목이었다. 로난은 자신과 아셀의 자리만큼은 반드시 만들어 주겠다는 바렌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렌을 만나면 시타가 뭐 하는 놈인지도 알 수 있겠지.”
시타는 이릴의 호위 임무 때문에 부재중이었다. 모레 아침 즈음에야 돌아올 터였다.
미스릴보다 단단한 알껍집을 깨부수고 나온, 피를 마시는 괴물. 귀엽고 유능하니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정체가 궁금해지는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재밌어 보이는데?”
공백 시간표에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기입하는 형식이었다. 로난은 금요일 오후에 ‘실전- 야전 요리’라는 과목을 추가로 기입했다.
그는 무예를 다루는 대부분의 강의와, 조금이라도 흥미가 생기는 강의들을 꾸역꾸역 쑤셔 담았다.
“음, 훌륭하군.”
머지않아 작성을 마친 로난이 수강 신청서를 들고 로비로 향했다. 우연히 마주친 마르야가 인사를 건넸다.
“오, 너도 여기구나. 하긴 차석이니까 당연한 건가.”
“엉.”
“수강 신청서 내러 왔어? 어디 한번 봐봐.”
로난이 신청서를 내밀었다. 신청서를 읽던 마르야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무슨 세계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도 읽은 것처럼 외쳤다.
“야, 너 미쳤어?! 이렇게 들으면 죽어!”
“···하고 싶은 걸 하는데 왜 죽는다는 거지?”
마르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신청서와 로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난의 신청서에는 일출부터 일몰까지.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백이 없었다.
“아니,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해? 대부분이 몸 쓰는 과목이잖아···그리고 너 필레온 부지가 얼마나 넓은지는 알지?”
“시끄러워 인마, 비켜.”
“네가 이 시간에 맞춰서 강의실을 옮기려면 날개가 달려 있거나 네발로 달릴 줄 알아야 할걸? 지금이라도···”
로난은 밀봉한 수강 신청서를 접수함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마르야가 머리를 쥐어싸며 소리를 질렀다. 로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못 배운 놈 소리좀 그만 듣고 싶다. 배울 수 있는 건 죄다 배울 거야.”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필레온에서의 첫 수업은 제국 검술이었다.
“반갑다 신입생 제군들. 나는 격투술과 제국 검술 과목을 담당하는 교관 아바르다.”
아바르는 키가 크고 가무잡잡한 사내였다. 일전에 제국 기사단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던 이력이 있었다.과연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로난이 중얼거렸다. 기대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 그의 눈가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제국 검술이라. 제대로 배우는 것은 처음이군.”
제국 검술은 총 아홉 초식으로 구성된, 말 그대로 제국군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기초 검술이었다. 동작 자체는 단순하지만 제대로 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몇 년을 꾸준히 단련해야 했다.
징벌병이던 로난 역시 제국 검술은 질리도록 접해 왔지만, 배울 생각도 의지도 없던 당시에는 원숭이가 콩 까는 소리보다 흥미가 없었다. 애초에 초식이 나뉘어져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으니. 그는 언제나 제멋대로 검을 휘둘렀다.
아바르가 말을 이었다.
“워낙 보편적인 검술이다 보니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기본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쉬이 여기지 말고 훈련에 임해주기 바란다.”
“넵!”
훈련장에는 무예과의 신입생이 대부분 모여 있었다. 슐리펜만 제외하고. 진작에 경지를 넘어 버린 탓에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로난이 혀를 찼다.
“에잉, 싹수 없는 놈. 지는 다 아는 거라고 쏙 빠졌네. 이런 건 원래 꾸준히 해야 되거늘.”
“먼저 본 교관의 시범을 보도록 해라.”
아바르는 제국 검술의 초식을 차례대로 시연했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동작이었다.
신입생들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초식을 세 번 반복해서 보여준 아바르가 목검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외쳤다.
“그럼 실시하겠다. 먼저 1초식! 상단 내려 베기!”
모두가 훈련용 목검을 집어 들었다. 신입생들은 눈앞의 허수아비를 대상으로 제국 검술을 차례대로 시전했다.
아바르는 신입생 사이를 거닐며 엉성한 자세를 교정해 주고 있었다. 신입생들을 둘러본 아바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만약 아홉 초식을 완벽하게 선보인다면 언제라도 조기 이수증을 써 주마.”
“와아아!”
“성적은 당연히 최고점이다.”
“우아아아아아!”
신입생들이 환호했다. 제국 검술은 매일 세 시간씩을 잡아먹는 긴 수업이었다. 조기 이수 처리가 된다는 것은 그 긴 시간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열의에 찬 신입생들이 검을 신명나게 휘둘렀다. 허수아비 때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아바르가 만족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슐리펜을 제외하면 몇 년간 그런 수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때, 훈련장의 한 구석에서 로난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어, 음. 교관님.”
“무슨 일이지?”
“제가···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9초식까지.”
로난이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아바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아직 오 분도 지나지 않은 터였다.
“···기존에 제국 검술을 배운 적이 있나?”
“아뇨. 제대로는 한 번도.”
“···차석이라고 너무 자만하는 것 아닌가. 물론 나도 네 입학식 대련을 보았다.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경우야.”
아바르가 목소리를 낮게 깐 채 말했다. 그 역시 입학식 때 로난이 나비로제의 회전검을 사용하던 모습을 보았다.
검로 자체는 정확했으나 속도가 부족했다. 물론 검로를 흉내낸 것 만으로도 천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수많은 파생 검술의 기본이 되는 제국 검술을 무시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슐리펜은 다섯 살 때부터 검을 잡았다. 십 년 가까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제국 검술을 수련했지. 그래서 내 수업을 듣지 않을 수 있는 거다. 너는 제국의 샛별조차 존중하는 기본을 무시하는 건가?”
“아니, 저도 알죠. 아는데···젠장. 일단 한 번 봐 줘요.”
로난이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싹수 없는 놈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한숨을 내쉰 아바르가 끄덕거렸다.
“후···어쩔 수 없군. 그래, 한번 해 봐라. 하지만 실패한다면 각오해야 할 거다. 훈련 강도를 몇 배로 늘릴 테니까.”
“네.”
로난이 자세를 잡았다. 아바르가 눈을 부릅떴다. 마나가 그의 눈가로 몰려들며 동체시력을 강화했다. 검로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가차없이 쳐낼 생각이었다.
“그럼 제 1초식. 실시!”
로난이 목검을 휘둘렀다. 완벽한 검로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아바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2초식. 실시!”
로난이 다시 목검을 휘둘렀다. 아바르가 헛웃음쳤다.
“허허, 나 이거 참. 제 3초식. 실시!”
언제부터인가 허수아비 때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모든 신입생들이 그대로 굳은 채 로난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9초식을 선보인 로난이 목검을 내렸다. 한참을 침묵하던 아바르가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잘 봤다.”
“예, 뭐.”
아바르는 말없이 안주머니에서 은색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조기 이수증이었다. 로난은 그것이 코 묻은 휴지라도 되는 것처럼 떫떠름하게 받아 들었다.
“자네는 남은 일 년간 해당 수업을 듣지 않아도 좋다. 성적은 만점 처리를 해 놓도록 하지.”
“어···감사합니다.”
“그래. 부디 자만하지 말고 남은 시간을 유의미하게 쓰도록 해라.”
이수증을 받은 로난이 훈련장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바르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대를 넘어서 무서울 지경이군.”
로난의 초식은 완벽했다. 슐리펜은 물론, 이십 년이 넘게 검을 휘둘러온 자신과 비교해도 거의 다를 것이 없었다.
제국 검술을 배운 적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설령 배웠다 하더라도 가늠조차 가지 않는 재능이었다.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던 아바르가 신입생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하나 병아리들!! 너희도 빨랑빨랑 휘두르지 못할까!”
“네, 넵!!”
“그렇게 해서는 팔꿈치에 이끼가 끼겠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아바르의 말투는 악마 같던 군 조교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기겁한 신입생들이 다시 허수아비를 때리기 시작했다.
딱! 딱! 허수아비 때리는 소리가 유달리 길게 이어졌다.
****
‘시발···뭐지?’
로난은 호수 앞 벤치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일정이 비어버린 탓에 할 일이 없었다.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던 로난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아까전에 배운 제국 검술을 차례대로 허공에 대고 시연해 보았다. 총 아홉 초식이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왜 이렇게 쉬워···?”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비로제의 회전검과는 달리 여러 번 휘두르며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검로나 자세에 다소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한 번 보고 흉내내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하니 확실히 동선과 검로가 효율적으로 변한 것이 느껴졌다.
제국 검술만을 사용하는 검사와는 싸워도 절대로 안 질 것 같다는 확신도 들었다. 다만, 생각보다 허무할 뿐이었다.
“으으음···내가 생각하던 수업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로난이 담뱃대를 빼물었다. 보람차게 땀을 흘려야 할 시간이 텅텅 비어 버렸다.
체력 단련이라도 해야 하나? 벤치에 양 팔을 걸친 채 하늘을 바라보던 차에,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엉?”
“분명 아바르의 제국 검술 수업 시간일 텐데. 신입생 필수 과목 아니었나?”
드세면서도 위엄있는, 분명히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로난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상급 교관들이 입는 암녹색 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로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나비로제?”
“교관님을 붙여라. 그리고 교내에서는 금연이다.”
구릿빛 피부와 연회색 머리카락. 전대 검성 나비로제가 그곳에 서 있었다. 담뱃대를 털어낸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