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60)
263. 수습(3)
#263
“로난. 내가 마무리를 짓게 해 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셀을 붙잡으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 정지했다.
“너···.”
“부탁이야.”
아셀은 평소처럼 울먹거리거나 호소하지 않았다. 그의 작은 콧망울 아래로 멎었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도 알잖아 로난. 아드렌은 중요한 거점이야···저렇게 무서운 힘을 다루는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용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해. 그리고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을 구할 수 있는데 구하지 않는다면···나는 평생 후회 속에 살아가게 될 거야.”
로난은 저것이 조금 있으면 입이나 귀, 눈에서도 흘러내릴 것을 알고 있었다. 비단 출혈을 제외하더라도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가쁜 호흡은 옅다 못해 희미하게 느껴질 지경이었고, 하얗게 질린 얼굴과 경련하는 몸뚱어리는 꼭 지독한 열병에 걸린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로난은 그 이상 손을 뻗지 못했다. 당장 머리를 쥐어박아 기절시키고 어깨에 들쳐 메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충혈되었음에도 아름다운 아셀의 눈동자는 결연한 의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또 막아서는 안 되는 눈빛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아셀이 말을 이었다.
“···로난. 네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기억나?”
“뭐?”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어보면···언제나 똑같이 대답했잖아. 그냥, ‘해야 해서’ 했다고···나는, 그게 너무 멋있어 보였어···.”
아셀이 배시시 웃었다. 휘어진 눈가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로난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야 로난. 지금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때야. 연극에서 배역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사람의 인생에도 저마다의 배역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
“아셀.”
“지난 삼 년은 내 생애 최고의 나날이었어. 매일매일 꿈을 꾸는 것 같았어.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한스 패거리에게 끌려다니면서 마법으로 소매치기나 하고 살았겠지. 그 기적 같던 시간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 존재했던 거야.”
그리 말하는 아셀은 한 번도 더듬거리지 않았다. 그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주위를 떠다니던 반짝거리던 마나가 본격적으로 소용돌이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셀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웃어 보인 그가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나는, 후회하지 않아.”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아셀이 정신을 집중함과 동시에 정체되어 있던 마나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점멸하던 마법진과 쇠사슬의 형태가 선명해지고, 바위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카가가각! 다시금 추락하던 아드렌에 제동이 걸렸다.
“이 쥐콩만한 새끼가···.”
진동이 빠르게 잦아들고 있었다. 로난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눈앞이 부옇게 물들었다. 땀방울인가? 아니면 비가 딱 한 방울 내 얼굴에 떨어졌나?
【당장 말리지 않고 뭘 하는 거냐!】
그때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오르세가 로난의 앞에 멈춰 섰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그가 아셀에게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촤아악! 칼을 뽑아든 로난이 오르세의 목을 겨누며 말했다.
“건드리지 마.”
【···미쳐버린 건가?】
오르세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갑자기 이 인간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로 휘어진 뿔 한 쌍이 솟아 올랐다. 숨조차 쉬기 힘든 살기가 오르세를 중심으로 번져 나왔다.
【비켜라.】
“두 번 안 말해. 내 친구한테 손 대지 마.”
하지만 로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르세의 목울대를 겨냥하고 있는 칼날은 달걀을 올려도 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네놈이 감히···!】
오르세가 이를 악물었다. 평소 같았다면 대번에 갈가리 찢어버렸을 테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의 로난에게서는 과거 자신을 패퇴시킨 초대 황제와 버금가는 압력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섵불리 달려들었다가는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두아루를 단칼에 베어 버리던 로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르세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아셀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고마워.”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뜻을 존중해주는 로난이나, 걱정해주는 오르세나 모두 몸둘 바 없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슬슬 먼젓번에 당겨 온 힘이 고갈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 가야 할 때였다.
안녕. 얘들아.
머릿속으로 읊조린 아셀이 눈을 감았다. 그의 의식이 다시 머나먼 저편으로 여정을 떠나려는 찰나였다.
화아아아악-!! 갑자기 세상의 종말을 연상케 하는 적색광이 머리 위에서 터져 나왔다.
“뭐야?!”
【뭣이···!】
한낮의 사막을 연상케 하는 열기가 쏟아져 내렸다. 아셀을 제외한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로난과 오르세의 눈이 튀어나올듯이 커졌다. 저 멀리 하늘 위에 화염의 바다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
“······고옥!”
빛 거인들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화염에 휩쓸렸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다.
하늘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저런 색이었나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화염은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고 대류하며 타올랐다. 눈조차 뜨기 힘든 빛과 열의 향연 속에서, 거인들의 흔적은 남김없이 소멸했다.
“아윽!”
그때 공중에 떠 있던 아셀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어마어마한 빛과 열기는 아셀의 집중까지 완전히 깨뜨려 놓았다. 반짝거리는 마나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이, 이러면 아드렌이···!”
간발의 차로 의식을 잃지 않은 아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너무 놀라는 탓에 기존에 걸어 놨던 마법마저 모조리 해제되고 말았다. 거대한 마법진과 쇠사슬이 재가 흩날리듯 사라지고 있었다.
“···어?”
헌데 뭔가 이상했다. 모든 마법이 해제됐음에도 아드렌이 추락하지 않았다. 되려 잔잔한 호수 위의 조각배처럼 평온하게 공중에 떠 있었다.
“젠장···뭐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혼란에 빠진 생존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당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벙찐 채 하늘을 바라보던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시발, 저거 왜 계속 내려와.”
거인들을 불사른 화염의 바다가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불이 대기를 삼키는 소리가 사납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거의 지평선 근처까지 닿는 범위인지라 절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
【모, 모두 침착해!】
【폐, 폐하는 어디 가셨지?!】
【시민들을 등에 태워라!】
곳곳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몇몇 드래곤이 급한 대로 하늘을 향해 브레스를 쏘아 봤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염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하강을 이어나갔다.
이건 답이 없었다. 화염을 좆나게 베어내서 파훼하거나 땅을 파고 숨어야 했다. 칼자루를 움켜쥔 로난이 반대편 팔로 아셀을 들쳐멨다.
“니미. 꽉 잡아라.”
“아윽!”
아셀이 혀를 빼물며 신음했다. 그들이 막 행동에 나서려는 차였다. 스팟! 갑자기 눈앞의 공간이 뒤집히며 웬 소년 한 명이 튀어 나왔다.
고작 열댓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나이에 맞지 않는 요란한 로브를 입고 있었다. 앙증맞은 이목구비가 어딘가 익숙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로난과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당신은···!”
“다들 오랜만이에요.”
소년이 웃었다. 순수함과 관록이 동시에 느껴지는 미소는 틀림없이 예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어렵잖게 과거를 떠올려낸 로난이 입을 열었다.
“로르혼?”
“늦어서 미안해요. 뒷수습이 너무 오래 걸려서···이제 안심하세요.”
소년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전생에 거인 니르바나를 봉인한 대마법사이자 황혼 마탑의 탑주인 로르혼이었다.
근황은 종종 전해 들었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로돌란에서의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얼어 있던 아셀이 입을 뗐다.
“대, 대마법사님이 여기는 어떻게···?”
“하늘 너머에서 큰일이 났거든요. 여러 가지로. 일단 저거부터 막고 보죠.”
별안간 로르혼이 하늘을 향해 팔을 쳐들었다. 공간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로 막대한 마나가 그의 주변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생성된 방어막 수십 겹이 아드렌을 뒤덮었다. 파아아-! 반투명한 역장은 부서지고 녹아 가며 무시무시한 화염을 대부분 막아 냈다.
가끔씩 뚫려서 불이 새어드는 부분에는 온갖 얼음 마법이 퍼부어졌다. 하나하나가 못해도 7서클을 넘는 최고위 마법들이었다. 하늘을 불사르던 열기는 무차별적인 냉기 폭격을 당하고 나서야 길항하며 사그라졌다.
“대, 대단해···!”
아셀이 입을 쩍 벌린 채 감탄했다. 저번에도 보았지만, 대마법사라는 이명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때 아셀을 돌아본 로르혼이 싱긋 미소지었다.
“활약은 잘 봤어요. 아셀.”
“화, 활약이라뇨···결국 제대로 해내지도 못했는데···.”
“아뇨. 크라티르에게는 미안하지만 역시 저 다음에는 당신인 것 같군요. 아무래도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서 큰 역할을 맡아줘야 할 것 같아요.”
“크, 큰 역할을 맡긴다니요?”
그리 묻는 아셀은 다시 말더듬이로 돌아와 있었다. 로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대머리들과 접촉한 나머지 아셀이 자기 자신을 잃게 될까 봐 굉장히 걱정하던 차였다.
쿠구구구구···문득 아드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만 이번에는 추락이 아니라 상승으로 인한 진동이었다.
아드렌은 거대한 무언가 손으로 집어서 들어 올리는 것처럼 급격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 위로 새벽하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난이 질문했다.
“이것도 당신이 한 거에요?”
“아뇨. 아무리 저라도 이걸 들어 올리기에는 힘이 달리죠.”
“그럼 누가?”
“그쪽도 잘 아는 분이죠. 이거 참, 아드렌이 오랜만에 선대 왕을 맞이하는군요.”
로르혼이 애늙은이처럼 웃었다. 선대 왕이라는 말을 들은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왜 진즉에 떠올리지 못했을까. 저런 불을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한 명 뿐인데. 불현듯 사람들의 머리 위로 웬 여인의 목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아이들아.】
【이 목소리는···!】
오르세의 비늘이 곤두섰다. 나란소니아를 비롯한 다른 드래곤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드렌에 살아가는 모든 용은 그녀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화아악! 찰나 급격한 속도로 치솟던 아드렌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슬아슬하게 구했습니다.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로르혼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로난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야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제자리에서 날갯짓하며 아드렌을 굽어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덩치가 좋다 생각했던 용왕도 어린아이처럼 보일 수준이었다. 왜 크기가 비슷하다 생각했던 걸까. 한 번 날개가 퍼덕일 때마다 로르혼이 설치한 방어막이 뜯겨나갈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거체는 여명을 받아 환한 주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주변에는 그보다 훨씬 작은, 허나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거대한 레드 드래곤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녀와 눈을 맞춘 로난이 입을 뗐다.
“나바르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