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61)
264. 수습(4)
#264
“나바르도제.”
로난이 입을 뗐다. 시선을 내린 나바르도제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다시금 부드럽고 웅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갑구나. 아이야.】
“저도요. 엄청나게.”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본인은 늦었다고 했지만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아셀을 잃을 뻔 했으니까. 주변을 둘러보던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그 괴물은 어디로 갔지? 또다른 파괴를 일삼으러 간 것이냐?】
“아. 제가 죽였어요.”
【뭐라고?】
“말 그대로에요. 칼로 베서, 목을 잘랐어요.”
로난은 손날로 자신의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화르륵! 한순간 그녀의 몸이 불길에 휩싸이나 싶더니 연기처럼 흩어졌다.
거체에 가려져 있던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나바르도제가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매력적인 드래곤 유부녀는 필레온에서 봤을 때와는 다른 전투용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로난에게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자세하게 말해 보거라.”
“워···진정하세요.”
로난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발과 함께 다가오는 화염 주머니는 어지간한 맹수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닿으면 틀림없이 데일 거야. 구석까지 몰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어차피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니 상세하게 설명해도 될 것 같았다. 하늘에 못이 박힌 듯이 고정된 대지는 다시 추락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아드렌에 온 이유부터 시작해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로난이 운을 떼려던 차였다.
【나-바르도제-!!】
“음?”
별안간 옆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송곳으로 피부를 찌르는 듯한 살기가 폭발하듯 번져 나왔다.
“아. 시발.”
로난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번 여정 내내 지겹도록 보아온 검은 마나가 오르세의 어깨 위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오르세가 아드렌까지 온 궁극적인 목적을. 그는 어느새 나선창을 뽑아서 꼬나쥐고 있었다. 창을 몇 바퀴 돌려 잡은 오르세가 나바르도제를 겨누며 소리쳤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거다! 네년을 이 자리에서 죽이고 발론을 멸망시키겠다!】
“너는···그 마룡이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리군.”
오르세의 무시무시한 선고에도 나바르도제의 얼굴에는 긴장감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공을 선회하던 그녀의 혈족들이 비늘을 곤두세웠다.
【어머니! 위험합니다!】
“괜찮으니 가만히 있거라.”
자녀들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나바르도제 본인은 태연했다. 그녀는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불현듯 오르세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쉬이이익! 순식간에 눈앞까지 들이닥친 그가 창을 내질렀다.
【죽어라!!】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오르세의 마나와 살기를 함뿍 머금은 나선창은 병장기라기보다는 벼락의 일부를 잘라 온 것 같았다. 푸확! 쇄도해온 오르세의 나선창이 그녀의 가슴 한복판에 꽂혔다. 나바르도제가 미소지었다.
【무슨···!】
“인사가 거칠구나. 아이야.”
오르세의 눈이 튀어나올듯이 커졌다. 창이 꽂히기는 했지만 관통하지는 못했다. 여지껏 무수히 많은 이들의 목숨을 거둬 온 오르세의 창날은 나바르도제가 입은 옷조차 찢어내지 못한 채 가슴 깊숙이 ‘들어가만’ 있었다.
“맙소사.”
“우, 우와아···.”
로난과 아셀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감탄했다.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 중의적인 감탄이었다. 어떻게 저토록 살가죽이 질길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창이 살가죽을 뚫지 못했는데, 저 정도로 깊숙이 들어갈 수가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이 추잡스러운 상상을 하던 와중이었다. 시선을 내린 나바르도제가 나선창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이 콧소리를 냈다.
“흐응···그래도 이건 제법 쓸만하구나. 네 뼈로 만든 거니?”
【이, 이럴 리가 없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너는 특별히 선봉대에 기용해 주마. 이번 무례는 내 특별히 넘어갈 테니, 좀 쉬거라.”
【이런, 빌어먹···】
오르세가 뭐라 외치려는 차였다. 나바르도제가 허리를 축 삼아 상반신을 흔들었다. 퍼억! 보이지 않는 힘이 오르세를 강타했다.
【커억!】
뭐라 할 새도 없었다. 오르세는 거대한 코뿔소에 치인 것처럼 튕겨 나갔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그의 몸뚱어리가 하늘탑의 잔해더미에 처박혔다. 콰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폭발했다.
【마, 말도 안 되는···.】
“기절하지 않았나. 이름값은 하는구나.”
머지않아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잔해더미 깊숙이 쑤셔박힌 오르세는 괴상하게 생겨먹은 화석의 일종처럼 보였다. 풀썩. 바들거리던 그의 고개가 이내 떨구어졌다.
“오, 오르세 님···.”
아셀은 로난의 소매를 잡은 채 헛숨을 들이켰다. 참으로 추한 패배였다. 로난이 전에 농담 삼아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가슴에 맞아 쓰러진 것 같았다.
“···병신새끼.”
로난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의식을 완전히 잃은 오르세는 대답하지 못했다.
실력 차이가 아득하게 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르세가 여러 번의 전투를 치르며 체력을 소진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한 방에 뻗어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가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나바르도제가 다시 로난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이야기를 계속해보자꾸나.”
“···그러죠.”
로난이 주억거렸다. 그는 아드렌에 오게 된 경위와 과정, 두아루의 사망까지 벌어졌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 땅에 아직 돌이킬 수 있는 것이 남았는지 찾아보고 오지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하거라.”
로르혼은 인삿말과 함께 시가지 쪽으로 날아갔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와 손이 비는 드래곤들은 아드렌 전역으로 흩어져서 부상자를 구조하고 화재를 진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셀과 잔해더미에 처박힌 오르세만이 남아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다.
“···역시 그 광신도들과 관련된 일이었구나. 내 아지다하카에게 척결 명령을 내렸거늘, 되려 손을 잡았을 줄이야.”
“마지막에는 잘못을 깨닫고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요.”
한참이나 떠들어 대던 로난이 말을 맺었다. 이야기가 워낙 길었던 터라 아드렌에는 어느덧 완연한 아침이 밝아와 있었다.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일출이 아름다웠다. 발치 머나먼 곳에 펼쳐진 대양의 물비늘이 햇살과 같은 색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대화를 곱씹던 나바르도제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책임을 물어야겠다. 아지다하카는 어디 있지?”
“음? 그러고 보니···.”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생각해 보니 한참 전부터 용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숨을 몰아 쉬던 아셀이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저쪽이야. 저기서 기척이 느껴져.”
“오, 고맙다. 그나저나 다시 말더듬이가 되어 버렸네 아셀. 아까는 조금 멋있었는데.”
로난이 픽 웃었다. 그는 별의 마력을 끌어당기며 아드렌의 추락을 막던 아셀의 모습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같이 고블린 부락이나 털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큰 건지.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아셀이 히끅거리며 말했다.
“미, 미안해···정말 고쳐야 하는데···.”
“상관없어. 이건 이거대로 놀려먹는 맛이 있으니까.”
로난이 아셀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예전에는 얕보이지 말라는 의미에서 교정을 강요했지만, 이제는 딱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맨몸으로 추락하는 섬을 멈출 수 있는 마법사가 말 좀 더듬는다고 누가 얕잡아 보겠는가.
로난과 나바르도제는 아셀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세 사람은 두아루와 싸웠던 숲 속 한복판에 멈춰 섰다. 아지다하카를 발견한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아지다하카?”
【아아···왔는가.】
아지다하카의 왼쪽 머리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는 좌초당한 선박처럼 바닥에 거대한 몸을 뉘이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슐리펜과 나란소니아, 측근으로 보이는 드래곤들이 울상을 지은 채 늘어서 있었다.
“너도 여기 있었냐?”
“그래.”
로난의 질문에 슐리펜이 끄덕였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로난은 그들이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을 어렵잖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지다하카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들의 공을 치하해야 마땅하지만···보다시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늘탑이 무너진 자리를 뒤져 보면 짐이 모아 놨던 재보가 나올 테니 찾는 대로 가져가도록 하거라···.】
가뭄이 든 논밭을 쟁기로 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여성의 인격을 담당하는 오른쪽 머리는 이미 죽은 것처럼 눈을 감은 채 늘어져 있었다. 완전히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와 잘려나간 다리에서는 아직도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입술을 질겅거리던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고맙게 받아 주마. 그런데 네가 만나봐야 할 손님이 있어.”
【손님···?】
아지다하카가 힘겹게 머리를 들어 올렸다. 나바르도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침내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아지다하카가 석상처럼 굳었다. 잠시 침묵하던 나바르도제가 입을 뗐다.
“오래간만이구나. 아지다하카.”
【···그러게 말이오.】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느냐?”
【많지···아주 많소···으음.】
쿵! 위태롭게 비틀거리던 아지다하카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나바르도제의 바로 앞에 턱을 박으며 쓰러진 그가 유감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무례를···용서하시오. 태초의 불이여.】
“괜찮다. 사건의 전말은 대강 알고 있다. 굉장한 음모를 꾸몄더군.”
【···부정하지 않겠소. 질투가 눈을 가리고, 시기가 귀를 막았지. 찬란했던 용의 도시가 이 꼴이 된 것은 모두 내 탓이오.】
“그래. 인정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겠지?”
【실패한 혁명가는 반역자에 불과하오. 받아들이겠소.】
아지다하카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나바르도제가 부드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 광경을 본 측근들이 얼어붙었다.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전해지는 의미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폐하!】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손을 한 번 휘적이는 것만으로 벌일 수 있는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드래곤 한 마리는 흔적도 없이 태워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가만히 숨을 몰아 쉬던 아지다하카가 입을 열었다.
【움직이지 마라. 나란소니아···책임을 지는 것뿐이다.】
【하오나···!】
뒤에서 뛰쳐나오려던 나란소니아가 멈춰섰다. 꽉 쥐어진 그녀의 주먹 아래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른 부하들도 차마 나서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둘러본 나바르도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좋은 신하들을 두었구나.”
【내게는···과분했지.】
아지다하카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바르도제의 손이 그의 이마에 얹어졌다. 나란소니아를 비롯한 측근들이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눈을 감은 아지다하카가 호소하듯 말했다.
【불의 어머니시여···다른 이들···내 부하들에게는···죄가 없소. 부디 나 하나의 목으로 끝내 주기를 바라오.】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겠구나.”
【어떻게 해도···안 되겠소?】
“그래.”
나바르도제가 냉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다하카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지다하카에게 동조한 부하들에게도 책임을 물을 생각인 것 같았다.
이마에 얹어진 그녀의 손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이제 태초의 불이 그의 몸을 남김없이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터였다. 끝내 부하들을 지켜주지 못한 아지다하카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별안간 나바르도제가 싱긋 미소지었다.
“너는 머리가 두 개잖니.”
동시에 나바르도제의 손에서 피어나던 빛이 확 강해졌다. 불사르기 위한 화염은 아니었다. 감겨 오던 아지다하카의 눈이 떠졌다.
【무슨···.】
그의 몸은 따스한 빛무리에 휩싸여 있었다. 차가웠던 피가 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 옆구리와 잘려나간 뒷다리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사, 상처가···!”
주변에 있던 드래곤들이 당혹성을 터트렸다. 로난 일행도 홀린 것처럼 그의 회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오른쪽 머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초의 불이여. 나를-】
【어째서 살려 주는 것이오?】
【나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는데···.】
다시금 남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들어 가던 비늘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으로만 책임을 질 수 있는 건 아니란다. 게다가 네게는 시킬 일이 남아 있거든. 고된 일이지만, 죄를 씻어낸다 생각하고 임하면 별로 억울하지는 않을 게야.”
【시킬 일이라니, 그게-】
【무엇이오?】
아지다하카가 갸웃거렸다. 손을 치켜든 나바르도제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보낸 편지를 읽어 봤겠지. 저 하늘 높은 곳에는 드리무어라는 요새가 있다. 너를 포함한 아드렌의 드래곤 대부분은 거기로 가 줘야겠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내 부재를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뭐라구요?”
이야기를 듣던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나바르도제가 드리무어에서 떠나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를 돌아본 나바르도제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총공세에 들어갈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