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70)
273. 강탈(2)
#273
“이게 뭐야 시발.”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이루 말할 수 없는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말끔하던 집 안은 태풍이 휩쓸고 간 것 같은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 없는 시체들이 온 집구석을 나뒹굴고 있었다. 모두 황제가 파견한 호위병이었다.
온 집안에 마구잡이로 뿌려진 혈흔은 끈적하게 응고되어 가는 중이었다. 이릴과 슐리펜이 하나하나 고른 가구들은 엉망으로 토막이 나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닥과 벽면, 천장을 가리지 않고 메운 상흔이었다. 거칠면서도 예리한 흔적들은 거대한 짐승 두 마리가 날뛴 현장을 연상케 했다.
“이게…도대체···.”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가슴을 바위로 눌린 것처럼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악몽인가 싶어서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강하게 쥐어 봤지만, 바라보고 있는 풍경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로난이 마른 세수로 최대한 평정을 되찾으려고 시도하던 와중이었다. 불현듯 그의 시선이 집 한구석에 닿았다. 어디서 많이 본 옷감이 찢어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안 돼.”
로난이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새하얀 옷자락은 틀림없이 누이가 즐겨 입던 원피스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필레온에 입학하기 전날 제도에 초대했을 때, 옷가게에서 그가 직접 사 준 것이었다.
“안 돼. 안 돼.”
평생 입고 다닐 거라며 해맑게 웃던 이릴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로난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철벅. 그의 손에서 떨어진 수선화가 피 웅덩이 위로 떨어졌다.
“누나!!”
숨을 몰아쉬던 로난이 소리치며 달려갔다. 그는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집에 있는 모든 방을 뒤졌다. 하지만 지하의 대피소까지 살펴봐도 이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발견했다. 워낙에 미약해서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상징인 반짝거리는 마나가 집안 곳곳에 미세하게 묻어나 있었다.
분진이 점멸하는 듯한 마나를 보는 순간 로난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졌다. 고오오오···. 그의 어깨 위로 강렬한 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네뷸라···클라지에.”
두 번의 삶을 살면서 이토록 강렬한 살의를 느낀 적이 없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누이가 사라진 것은 역시 놈들의 소행이었다.
납치당한 걸까? 상상도 하기 싫지만 설마 이미 살해당한 걸까? 절망의 늪 위로 피어오른 분노가 사고를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모든 포로의 팔다리를 자를 것이다. 눈알과 손톱을 뽑아서 유족에게 보낼 것이다. 그중에서 한 명 정도는 누이의 행방에 관해 뱉을 놈이 있겠지.
지옥을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주는 수밖에. 그리 다짐한 로난이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차였다. 무언가 뒤에서 자신의 옷깃을 쿡쿡 잡아당겼다.
“뺘.”
“···시타.”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민 시타가 그의 옷자락을 물고 있었다. 크고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뺘아아···.”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시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삼 년 전부터 함께해온 동반자는 지금 네가 해야 하는 일이 뭐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이 자식.’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생각해 보면 고통스러운 것은 시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필레온에 온 이후부터는 오히려 자신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릴과 함께 보낸 것이 시타였다.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거의 엄마처럼 따르고는 했었는데.
“빌어먹을···.”
콧잔등이 시큰했다. 불현듯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부끄러움이 들이닥쳤다. 말 못하는 동물도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데.
분노로 흐려졌던 로난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기도 모르게 흘린 눈물을 닦아낸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뺘아!”
시타가 웃었다. 로난은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인정했다. 하마터면 멍청하게 일을 그르칠 뻔했다.
“···침착하자.”
로난이 심호흡했다. 시타의 충고처럼 아직 절망하기에는 일렀다. 네뷸라 클라지에와 싸운 흔적이 남아 있고, 누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체가 없으니 죽이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커. 인질극이 목적인 걸까?’
우선 단서를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이릴의 행방을 알아내야 했다. 가능하면 범인도. 그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신음하던 차였다. 문득 어떤 도구의 존재가 머릿속을 스쳤다.
“혈계침.”
로난이 읊조렸다. 바늘에 묻힌 피의 주인을 가리키는 귀중한 마도구. 북부에서 바르카 터르겅을 뒤쫓을 때 사용했던 물건이었다.
아데샨이 하나 가지고 있는 혈계침을 사용한다면 누이를 추적할 수 있었다. 물론 현장에 이릴의 피가 있고,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정 하에.
할 일이 정해졌다면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로난은 먼저 통신용 마도구를 꺼내들었다. 조개 껍데기에 마나를 불어넣은지 머지않아 아데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로난? 무슨 일이야?”
“아데샨. 누나가 실종됐어요. 아무래도 네뷸라 클라지에한테 납치당한 거 같아요.”
“뭐?! 가, 갑자기 그게···”
“바쁜데 미안하지만 지원 병력좀 보내 줘요. 슐리펜 그 자식한테는 알리지 말고. 드래곤이랑 싸우다가도 달려올 놈이니까.”
로난은 그렇게 말을 맺은 뒤 통신을 끊었다. 아데샨에게는 미안하지만 시시콜콜한 것까지 설명할 틈이 없었다. 로난이 시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시타. 부탁 좀 하자.”
“뺘?”
“여기 있는 사람들의 피를 분류해 줘. 한 명도 빼놓지 말고.”
로난은 손가락을 뻗어 실내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가리켰다. 시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아아아···! 붉은 눈동자가 환하게 빛났다. 현장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혈흔이 방울의 형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로난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안 섞이게 조심하고.”
“뺘밧.”
시타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콧소리를 냈다. 다시 한 번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뒤엉켜 있던 핏물이 수십 갈래로 나뉘며 분리되기 시작했다.
“···잘 하네.”
로난이 작게 탄성했다.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었는지 의문이었다. 적어도 수십 명 분은 되었지만, 시타는 정교하게 분리 작업을 해냈다. 머지않아 혈흔은 모두 사라지고 스물네 개의 구체가 거실 위로 떠올랐다.
피로 이루어진 구체는 제각각 크기가 달랐다. 심호흡한 로난이 구체를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제발 누이의 피가 있기를. 하지만 많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오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젠장.”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릴의 피가 보이지 않았다. 존재한다면 마나의 형질로 눈치챌 수 있을 터인데, 몇 번이고 다시 살펴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시타에게 물었다.
“···역시 없지?”
“뺘우우웅···.”
시타가 고개를 떨구며 신음했다. 누나를 보필했던 시타라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일단 첫 번째 작전은 실패였다. 혼잣말을 웅얼거리던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냐 씨발. 그래도 아직 포기하기는 일러.”
“뺘아앗!”
시타가 동의하듯 날개를 퍼덕거렸다. 행인들의 비명이 거센 바람 소리와 더불어 울려 퍼졌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로난은 다시 눈을 부릅뜨고 피의 구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 중 하나는 범인의 피다.’
이렇게 지랄 맞게 싸웠는데 피 한 번 안 흘렸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칩입자가 호위병을 압도적인 격차로 썰어 버렸다면 결코 남지 않을 상흔이었으니. 다시 몇 분이 흐른 뒤였다.
“어?”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너무 작아서 보지 못한 구체가 하나 더 있었다. 그가 눈짓하자 시타는 구체를 로난의 눈높이까지 올려 주었다.
“이건···분명···.”
로난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식칼에 묻어 있던 피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엄지손톱만한 핏방울은 다른 구체들과는 조금 다른 색채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걸 어디서 봤던가?’
로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아까는 흥분해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있던 와중이었다.
“설마···!”
한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과거의 기억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눈앞에서 번들거리는 피의 형질은 분명히 구원자의 기억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완전한 적색이 아닌, 약간은 보랏빛이 도는 혈액에는 반짝거리는 마나가 함유되어 있었다. 겨우 호흡을 추스른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아벨.”
그토록 찾아 헤매던 교주 아벨의 피였다. 로난이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만지작거렸다. 비록 심상세계에서의 일이었지만 그의 검에 목이 베이던 감각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직접 왔다고? 누나를 납치하러?’
그러고 보니 실내를 뒤덮은 칼자국도 낯이 익었다. 획마다 악의가 묻어나는 것이 틀림없는 아벨의 검흔이었다. 문득 의문 하나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저건 누가 한 거야?”
로난의 시선은 아벨과 맞서 싸운 이의 검흔에 집중되었다. 자신의 까다로운 관점에서 봐도 굉장한 칼솜씨였다.
아벨. 그러니까 구원자의 검법처럼 설계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변칙적이고 예리한 것이 아벨의 검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
황제에게는 미안하지만 호위요원 중에 이런 검법을 구사할 만한 위인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제 3의 인물이 난입했다는 소리인데, 이러면 또 머리가 아파졌다. 도대체 누구지? 어떻게 아벨을 상대로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수 있는 거지?
“뺘아아아!”
“엉?”
로난이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찰나였다. 별안간 시타가 저기 좀 보라는 듯한 느낌으로 울음소리를 냈다. 시타는 머리를 쭉 뺀 채 문이 열린 이릴의 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래? 저기는 아까 뒤졌어.”
“뺘하악!”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시타는 그의 소매까지 물어 가면서 이릴의 방으로 가라고 의사를 표명했다. 영문 모를 행동이었지만 로난은 일단 그렇게 했다.
“···제기랄.”
방에 들어선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정리된 방에서는 이릴의 머리카락에서 나던 냄새가 났다. 다시 코가 시큰해졌지만 로난은 애써 애수를 떨쳐냈다. 그가 방을 둘러보던 차였다.
“음?”
불현듯 그의 시야에 부자연스러운 흔적이 포착되었다. 침대 앞의 바닥에만 빵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었다. 미묘하게 반질거리는 것이 꼭 저 자리에 엎드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혹시.’
로난은 혹시나 하는 심정에 침대를 밀었다. 그러자 웬 작은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돌을 깎아 만들어진 표면에는 알아보지 못할 문자들이 잔뜩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건···.”
분위기가 기묘한 것이 여러모로 이릴과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딸깍. 상자를 집어든 로난이 손가락에 힘을 주자 상자는 별다른 저항 없이 열렸다. 내부를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혈계침?”
상자 안쪽에는 나침반을 닮은 기계장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피를 추적하는 혈계침이었다. 바르카를 쫓을 때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웠지만 근본적인 설계는 동일했다.
하지만 로난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혈계침의 존재가 아니었다. 상자의 안쪽 면에는 공용어로 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로난은 그것을 눈으로 천천히 따라 읽었다.
[내 아들. 로난의 성인식을 축하하며.]-카인.
조금 뭉그러져 있기는 했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게 아버지가 남긴 거라고?
혈계침의 붉은 바늘은 망령의 바다가 있는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인식.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는 누이의 장담. 머릿속에서 떠다니던 정보의 조각이 하나둘씩 맞춰지고 있었다.
그가 시타에게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콰아앙! 갑자기 현관문이 부서질 듯이 열리며 웬 사내가 뛰어들어왔다. 검푸른 제복을 입은 사내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왔냐. 슐리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