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71)
274. 강탈(3)
#274
“왔냐. 슐리펜.”
로난이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어떻게 듣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예상했던 바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실내를 둘러보던 슐리펜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었다.
“무슨···!”
혈흔은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끔찍한 광경이었다. 머리 없는 시체들과 사방에 즐비한 칼자국은 여기가 이릴과 시간을 보내던 집과 동일한 장소라는 것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슐리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릴 양.”
허공을 보며 읊조리는 그의 모습은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붉어진 눈시울이 더 잘 보였다. 기본적으로 깔려 있던 냉철한 면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로난.”
슐리펜이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그가 로난의 앞에 서는 찰나였다. 쾅! 반동으로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며 아데샨이 모습을 드러냈다.
“슈, 슐리펜! 갑자기 전장을 이탈하면···아?!”
그리고 그녀의 얼굴 또한 굳어 버렸다.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통신할 때 둘이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아데샨이 로난을 돌아보았다.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나왔다.
“로, 로난···이건···.”
“말한 그대로에요. 빨리 와 줘서 고마워요.”
로난이 어색하게 웃었다. 현관 밖에서는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로난의 지원 요청에 따라서 추격대를 데려온 듯했다. 크라티르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걸 보니 공간 마법으로 온 것 같았다.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데샨은 전음으로 웅성거리는 추격대 사람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슐리펜이었다.
“···상황을 설명해라.”
“심정은 알겠는데 진정해 인마. 털이 자꾸 곤두서잖아.”
로난이 입매를 뒤틀었다. 정상적인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슐리펜의 어깨 위로는 자이파나 오르세의 것과 버금가는 살기가 일렁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느리지만 묵직한 바람이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를 그리고 있었다.
‘거의 그때랑 비슷한데.’
바람은 당장에라도 폭풍으로 돌변하여 제도를 휩쓸어 버릴 것 같았다. 아데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기세만으로는 전생에 만났던 대륙제일검 시절의 슐리펜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런 게 차가운 분노라는 걸까. 로난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그 말을 들은 슐리펜이 이를 악물었다. 으득.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머지않아 살기가 누그러지며 준동하던 바람이 가라앉았다.
여전히 소름끼치기는 했지만 로난은 저것이 그의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제대로 배운 집 자식이라 그런지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자신보다 능숙했다. 로난이 말했다.
“상황이고 자시고 설명할 것도 없어. 방금 말한 그대로니까. 다만 알려주지 못한 게 있다면, 누나를 끌고 간 놈이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라는 거야.”
“교, 교주라고?!”
아데샨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슐리펜의 얼굴이 다시금 경직되었다. 불안증 환자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로난에게 물었다.
“···생사는?”
“확실하지 않아. 그런데 아마 살아 있을 거야.”
로난은 자신이 먼저 와서 알아낸 정보를 공유했다. 이릴의 혈흔이 현장에 없었다는 말을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아주 약간 누그러졌다.
물론 그 정보가 이릴의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했기에 서둘러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설명을 마친 로난이 아데샨을 돌아보며 말했다.
“맞다. 지금 혈계침 가지고 있어요? 북부에서 바르카 잡을 때 쓰던 거.”
“응? 그야 있기는 한데···왜 그래?”
“주세요. 필요해요.”
로난이 손을 내밀었다. 착 가라앉은 표정이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품을 뒤적거리던 아데샨이 금세 혈계침을 찾아 그에게 건네주었다.
“여, 여기···.”
“고마워요.”
로난이 감사를 표했다. 바르카가 죽은 뒤, 목표물이 사라진 혈계침은 제자리에서만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철컥. 뚜겅을 연 그가 기존에 묻어 있던 바르카의 피를 지워 버렸다. 바늘의 회전이 멈췄다.
로난은 그대로 아벨의 피를 뭉쳐 만든 구체에 바늘을 가져다댔다. 스아아아···. 다시금 붉게 물든 바늘이 움직이며 서쪽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
“이건···?”
“교주의 피를 묻혔어요. 다행히도 아직 범위 내에 있는 거 같네요.”
“뭐, 뭐라고?”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무미건조한 말투에 비해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설마 교주의 피를 미리 구해 놨을 줄이야. 혈계침을 다시 아데샨에게 건넨 로난이 엄중한 투로 말했다.
“서둘러 쫓아가면 육안으로 추격이 가능할지도 몰라요. 운이 좋으면 놈들의 총본산을 찾아낼 수도 있겠죠. 대신 무슨 일이 있어도 교주랑은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마세요. 지금까지 싸웠던 상대와는 격이 다르니까.”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던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단신으로 엘시아와 알리브리헤를 제압하던 아벨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별의 가호를 제 손발처럼 다루고, 고위 바람 정령 하이란을 단칼에 베어 버리는 신들린 칼솜씨는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이후로 천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니 훨씬 강해져 있을 터였다. 무수히 많은 지식 또한 축적하고 있을 테니 어떤 면에서는 거인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으응, 알았어···그런데 로난 너는 안 가는 거야?”
문득 이상함을 느낀 아데샨이 질문했다. 로난의 말투는 마치 첫 심부름을 가는 아이에게 주의 사항을 말해 주는 부모 같았다. 로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저는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요. 누나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에요.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에요.”
로난이 말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만약에 아벨이 이릴을 납치해서 데리고 있을 심산이라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구하기 어려울 터였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했다. 시타가 가르쳐준 것처럼 섵부르게 굴다가는 모든 것을 그르칠 터였다.
로난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구원자가 남긴 또 하나의 혈계침을 만지작거렸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갑자기 슐리펜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슐리펜.”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만 물끄러미 옮겨 로난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 년 전에 나랑 약속했었지. 누나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그래.”
“그거 아직 유효하다. 니가 싫어도 지키게 해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슐리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걱거리며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로난은 뭐라 말하려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아데샨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해 볼게요. 교주랑은 싸우지 말라는 내 말 명심해요.”
“으, 으응.”
“그럼, 다녀올게요.”
아데샨이 주억거렸다.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로난이 작은 곽 하나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돌돌 말린 스크롤 십여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은 그 중에서 하나를 꺼내 풀었다. 예전에 엘시아가 선물해준 스크롤은 머나먼 망령의 바다까지 시전자를 데려다 주는 능력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는 이게 맞았다. 로난은 작은 공병에 아벨의 피를 담았다. 그리고 창문으로 나가 시타의 목 위에 올라탔다. 구원자의 얼굴을 떠올린 그가 작게 읊조렸다.
“투병 생활이 길어서 뇌에 곰팡이가 피지는 않았겠지.”
“뺘아.”
시타가 회답하듯 울었다. 동시에 로난이 스크롤을 펼쳤다.
종이에 각인되어 있던 마법진이 빛을 뿜으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파아아···! 빛무리가 나타났다 사라진 자리에서 더는 로난과 시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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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뷸라 클라지에의 총본산.
“참담하군. 결국 펠그란드까지 넘어갔나.”
“이제 한계오. 교주님은 어디 가신 건지···.”
대회의실이 시끄러웠다. 일곱 대주교는 날이 갈수록 수세에 몰리는 교단에 대해 열띈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비어버린 나머지 여섯 자리의 존재감이 오늘따라 더 절실하게 와닿았다.
“나는 정말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정말로 교단을 저버리신 거 아닌가?”
“불경한 말은 삼가시오, 대주교 아나퀴엘.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잖소.”
“제발 내 말이 실언으로 치부됐으면 좋겠군. 나는 그래도 판타시온이 죽었을 때는 얼굴을 비추실 줄 알았단 말이지···.”
아나퀴엘이 중얼거렸다. 교주의 얼굴을 본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매일매일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무지몽매한 이들은 별의 가호를 파훼할 수 있게 되었다.권능을 다루는 데 능숙한 이들이 나선다면 우위를 점할 수 있었지만, 그런 실력자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나바르도제와 제국을 필두로 모인 연합군은 순식간에 교단을 절벽 끄트머리까지 몰아세웠다. 연달은 패배와 조직원들의 죽음은 압도적인 강함을 지닌 대주교들의 정신도 갉아 먹고 있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그들이 회의를 재개하려던 차였다. 쾅! 갑자기 대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반갑군. 다들 잘 지냈나?”
“교, 교주님!”
대주교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쾅! 대주교 르탄시에가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다른 대주교들이 뒤를 따랐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한 달 만에 돌아온 아벨은 웬 인간 여인을 업고 있었다.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요즘 얼굴을 비추지 못해 미안하군. 바쁘게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서.”
“지금이라도 돌아오셨으니 괜찮습니다 교주님. 헌데 얼굴의 그건···설마 상처입니까?”
교주의 얼굴을 살피던 르탄시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의 왼쪽 뺨에는 칼자국으로 보이는 상처 하나가 비스듬히 그어져 있었다. 피식 웃은 아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 거 아니다. 그냥 교훈을 얻은 값이지.”
“교훈?”
“그래. 맹수의 자식은 아무리 순해 보여도 맹수라는 교훈. 매섭더군.”
제도에서 벌어졌던 일을 상기한 아벨이 큭큭거렸다. 식칼을 든 이릴과의 싸움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상처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백 번도 넘게 합을 겨루었다는 점, 그리고 끝내 상처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아벨이 물었다.
“알리브리헤는? 여전히 답이 없나?”
“그, 그렇습니다. 아드렌에서부터 연락이 완전히 끊겨서···혹시 그때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럴 리는 없고···아마 교단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군. 어리석은 늙은이 같으니.”
아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하기는 했지만, 막상 실제로 벌어지니 조금은 안타까웠다. 마음이 완전히 꺾인 줄 알았는데,아니었나? 대주교들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알리시아가 안 보이는군. 임무 중인가?”
“···알리시아는 나흘 전에 죽었습니다. 카일라시스와 함께요. 로난이라는 자와, 나바르도제의 혈족들에게 당했습니다.”
그녀는 펠그란드 산맥과 판시아 요새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해 설명했다. 아벨의 부재 동안 무려 네 명의 대주교가 목숨을 잃었다.
판타시온까지 전사했다는 말을 들은 아벨이 눈썹을 으쓱였다. 설마 그 사슴까지 당하다니. 제국의 샛별인지 뭔지 하는 애송이도 제법이군.
손이 근질근질해지고 있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릴을 힐긋 돌아본 아벨이 침음을 흘렸다.
“안됐군. 이거 큰일이야. 대주교 중에서는 알리시아가 그나마 가장 섬세해서 맡기려고 했는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르탄시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불현듯 그녀에게 시선을 옮긴 아벨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 수 없지. 준비를 마칠 때까지만 자네가 맡아 주게.”
“네?
“받게. 조심해서.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해.”
아벨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업고 있던 이릴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귀금속을 다루는 것처럼 손동작이 세심했다. 정신을 잃은 이릴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 분은···?”
이릴을 본 르탄시에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자신이 살면서 보아온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백색 머리카락은 자신이 숭배하는 교주의 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아벨이 말했다.
“잘 돌봐 주게. 우리의 성녀가 될 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