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72)
275. 이릴(1)
#275
땅거미가 어스름했다. 초여름의 석양이 수해(樹海)위로 녹아들고 있었다. 비행 중인 발자크의 머릿속에 별안간 아데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4 야전 지휘관입니다. 발자크, 상황 보고 부탁드립니다.] [변함없다. 서쪽으로 비행 중이야.]전음을 들은 발자크가 답변했다. 그는 익폭이 4m에 이르는 거대한 박쥐로 변한 채 비행하고 있었다. 딱히 이변이 없어서 보고할 거리가 없었다.
[확인했습니다. 이변이 있다면 바로 연락 바랍니다.] [그러지.]발자크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어졌다. 날개 아래로 펼쳐진 풍경을 쳐다본 그가 툴툴거렸다.
“제기랄, 도대체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건지.”
나무의 바다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지와 이파리로 이루어진 수면은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치고 있었다. 대륙에서 제일 가는 규모의 삼림으로 알려진 낙원숲이었다.
눅진한 초목의 내음이 코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발자크의 주변에는 박쥐나 갈가마귀, 흑로처럼 우중충한 날짐승들이 서른 마리 정도 동행하고 있었다. 전부 그와 같은 흡혈귀였다.
빠른 비행이 가능하고 기척을 감출 수 있는 아벨을 뒤쫓는 선발 추격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바로 옆에서 날던 부하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방향은 제대로 잡혀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먼 거리까지 범위를 늘리다니, 대단하십니다.”
“흥. 못 하는게 이상한 거지.”
발자크가 코웃음 쳤다. 슬쩍 시선을 내려 목에 걸린 혈계침을 쳐다보았다. 아벨의 피가 묻은 바늘은 여전히 서쪽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다행히도 수 시간에 걸친 추격 끝에 목표물을 혈계침의 범위 내에 들일 수 있었다. 발자크의 뛰어난 피 다루는 실력은 혈계침의 탐지 범위를 기존의 몇 배로 늘려 놓았다. 그들이 한 시간 정도를 더 비행하던 중이었다.
“모두 멈춰라.”
별안간 발자크가 멈춰섰다. 당황한 부하들이 날갯짓하며 제동을 걸었다. 방금 전에 말을 걸었던 부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바늘이 맴돌기 시작했다. 놓쳤어.”
“예?”
질문한 부하의 눈이 커졌다. 바늘이 맴돈다는 것은 추격 대상이 죽었거나, 범위를 벗어났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죽을 리가 없었으니 이런 경우에는 후자로 보는 것이 옳았다.
“그럴 수가. 공간 이동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합니다.”
“내가 봐도 이상하군. 기다려 봐라.”
발자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상황이 부자연스러웠다. 그가 범위를 증폭시킨 혈계침은 목표물이 대륙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효력을 잃지 않았다.
무언가 속임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별 차이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해는 여전히 푸르렀고, 녹색 지평선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음?”
문득 발자크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호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아래쪽에 있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잔잔한 수면에는 반사된 하늘의 모습이 훤히 비치고 있었다. 불현듯 호수를 바라보던 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저건···.”
뭔가 이상했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머리 위의 하늘과는 달리 물 위에 반사된 하늘에는 회백색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나침반은 여전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위대한 피를 이어받은 흡혈귀는 머지않아 결론을 도출해 냈다. 그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호수로 진입한다.”
“네?”
“혹시 모르니 물에 닿기 직전 주의를 기울여라. 먼저 가겠다.”
“기, 기다리십시오!”
발자크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갑자기 날개를 접은 그가 급강하를 시작했다. 허둥거리던 부하들이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뒤를 따랐다.
풍덩! 발자크의 몸뚱어리가 호수에 완전히 잠겨드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세상이 위아래로 뒤집히며 그의 머리가 수면을 부수고 나왔다.
촤아아악! 발자크는 물보라를 흩뿌리며 비상했다. 머리 위로는 황혼녘의 하늘이, 발아래로는 들어올 때 봤던 것과 같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건조해진 공기에서는 풀 냄새가 나지 않았다. 머지않아 자신을 따라 진입한 흡혈귀들이 수면을 찢으며 솟아올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목도한 그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 이건 도대체?”
낙원숲은 황량한 들판으로 변해 있었다. 강인하고 빽빽하던 수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파리부터 줄기까지 모조리 새하얗게 변색된 나무 몇 그루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짧은 풀이나 버적거리는 흙모래, 바닥에 널브러진 나뭇가지 등,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이 유령처럼 희멀건 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오오오···귀곡성을 연상케 하는 바람 소리와 지면을 타고 흐르는 안개가 음산함을 더하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저, 저길 보십시오!”
발자크는 부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들녘 저 멀리 거대한 성 하나가 솟아 있었다.
수십 개의 첨탑을 가시처럼 달고 있는 성채의 외벽은 주변의 풍경과 별다를 것이 없는 백색을 띠고 있었다. 부연설명이 없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연합군이 전쟁 내내 찾아 헤매던 것이 눈앞에 있었다.
“···총본산.”
발자크가 중얼거렸다. 어느새 회전을 멈춘 혈계침은 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교주와 이릴은 저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발견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공략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창백한 성은 지금껏 발자크가 보아온 어떤 구조물보다 견고해 보였다. 부하가 질문했다.
“진입합니까?”
“···아니. 기척을 감추고 수색만 진행한다.”
발자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추격 중에 괜한 전투를 벌이지 말라는 아데샨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첫 번째 목표는 인질의 위치 확보였다.
[추적대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총본산을 발견했다.]발자크는 곧바로 아데샨에게 전음을 보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호수를 넘어오면서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된 것 같았다.
직접 전해야 하는 건가. 그가 전령 노릇을 할 부하를 지정하려는 차였다. 발아래에서 웬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어코 여기까지 왔군.”
“음···!”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발자크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웬 중년인이 뒷짐을 진 채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간만에 정원을 산책하기를 잘 했어. 그래, 경치는 좀 마음에 드시나?”
“네놈은···!”
발자크의 눈이 커졌다. 인상착의가 특이하면서도 익숙한 사내였다. 머리카락은 별빛처럼 창백한 백색을, 눈동자는 노을을 연상케 하는 주홍색을 띠고 있었다.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얼굴은 로난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발자크는 서둘러 혈계침을 확인했다. 창백한 성채를 가리키고 있던 바늘은 미세하게 위치를 바꿔 중년인을 겨냥하고 있었다.
의미하는 바가 명확한 현상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발자크가 입을 열었다.
“교주.”
“오, 거기까지 알고 있나?”
아벨이 눈썹을 으쓱였다. 식은땀 한 방울이 발자크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모두 퇴각해라.]발자크가 부하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들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침착해야 했다. 심호흡한 발자크가 입을 뗐다.
“···인질은 어디에 있나.”
“인질? 아아, 이릴 그 아이를 말하는 거라면 저 성 안에서 쉬고 있지.”
아벨이 엄지를 뒤로 들어 성채를 가리켰다. 발자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이제 무사히 돌아가기만 한다면 완벽한 마무리였다. 부하들은 차마 발자크를 두고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얼간이들이. 발자크가 다시금 퇴각 명령을 전달하려던 차였다. 짝! 줄곧 침묵하던 아벨이 손뼉을 쳤다.
“자, 궁금증이 해결됐으면 이제 죽을 시간이다. 오랜만의 손님인데, 아깝군.”
“뭐?”
발자크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아벨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촤아아악! 거대한 반구형의 역장이 그들을 뒤덮었다.
“이, 이게 무슨!”
“별의 가호입니다!”
흡혈귀들이 당혹성을 터트렸다. 날짐승으로의 변신이 하나둘씩 풀리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몇몇 이들이 뒤늦게 호수로 들어가려 했지만, 역장은 이미 수면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퇴, 퇴로가 막혔다!”
“워, 원액으로도 손상이 가지 않아···!”
익히 보아온 별의 가호였다. 부하들은 미리 챙겨온 로난의 피를 무기에 바르거나 마신 뒤 공격을 퍼부었으나 역장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교주의 것이라 그런지 수준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젠장···.”
발자크가 입술을 비틀었다. 상황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정리하던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선택권이 없군. 싸운다.”
변신을 해제한 발자크가 몸에 그림자를 덧씌웠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야수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담이 심한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온 힘을 기울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동요하던 흡혈귀들의 눈빛이 일순 가라앉았다.
“그, 그러고 보니 너무 겁을 먹었군. 아직 해 보지도 않았는데.”
“빠르게 결판을 내면 잡을 수 있을지도···.”
그들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자신들 또한 발자크와 마찬가지로, 족히 수백 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온 밤의 귀족이었다.
사그라졌던 안광이 다시금 번득이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살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임전의 태세를 갖춘 흡혈귀들이 공격에 나서려던 차였다.
“애쓸 필요 없다. 모기 친구들.”
“뭐라?”
“이미 끝났으니까 말이지.”
아벨이 말했다. 문득 발자크는 그의 손에 검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언제 뽑은 거지?’
발도하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다. 철컥. 납도한 아벨이 말없이 등을 돌렸다.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흡혈귀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캬아아아악!”
“잠깐, 기다···”
발자크가 뭐라 외치려던 차였다. 그를 비롯한 흡혈귀들의 몸 위로 붉은 선 수백 가닥이 불규칙하게 그어졌다.
“아?”
발자크의 눈이 커졌다. 섬뜩한 기시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이지 않는 검격에 몸이 썰리는 기분은 이전에 로난과의 전투에서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아벨이 중얼거렸다. 뺨의 상처를 한 번 매만진 그가 다시 성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늦게 찾아온 통증에 흡혈귀들의 동작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몸 위로 그어진 선들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불현듯 어떤 사람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끝내 자웅을 가리지 못한 자로딘과 로난, 둘도 없는 형제이자 존경의 대상인 그림자 대공. 그리고···
“오필리아.”
발자크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퍼억-! 동시에 검격이 긋고 지나간 자리가 벌어지며 그와 흡혈귀들의 몸이 폭발하듯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더라도 몸이 수백 토막으로 분해된다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서른 명의 추적대는 뜨거운 피보라가 되어 황량한 정원을 적셨다.
“저런 것들한테 밀리다니···한 번 주의를 줄 필요가 있겠군.”
아벨이 혀를 끌끌 찼다. 어차피 다 끝난 판이라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자존심 때문에라도 전력을 보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적막이 내려앉았다. 별의 가호로 이루어진 장막은 한 시간 가량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살토막이 널브러진 자리에서 작은 박쥐 한 마리가 머리를 들었다.
‘전해야···한다···.’
어떤 흡혈귀처럼 눈 한 쪽에 흉터가 나 있는 박쥐였다. 가느다란 목에는 혈계침이 매달려 있었다. 퐁! 비틀거리며 기어간 박쥐가 호수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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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씨발, 여전히 더럽게 춥네.”
“뺘아아아···.”
로난이 중얼거렸다. 시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별 가득한 밤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다. 과거 아데샨과 둘이 왔을 때와 다름없는 맹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주름치마를 연상케 하는 극광이 저 머나먼 상공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공간 이동의 후유증 탓인지 속이 메슥거렸다. 주위를 둘러보자 엘시아의 연구실로 이어지는 입구가 빙판 한가운데 솟아난 것이 보였다.
“엘시아. 나 왔어요.”
쾅쾅쾅. 입구로 다가간 로난이 문을 두드렸다. 고대의 기술로 지어진 출입구는 몇 번을 봐도 같은 세상의 건물이 아닌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채 대기하던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시아?”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없는데 큰일이었다. 외출이라도 한 건가?
‘문을 썰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약 그리한다면 거처의 역할을 상실할 터였다. 머리를 긁적거리던 로난의 시선이 문득 대문 옆의 기계장치로 향했다. 유리처럼 반질반질한 철판 위에는 0부터 9까지의 숫자가 가지런히 빛나고 있었다.
“분명히···이렇게 했던가.”
로난은 엘시아가 숫자를 눌러서 문을 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기억을 더듬어낸 그가 숫자를 하나씩 입력했다. 한 번 본 것은 잘 잊어버리지 않았기에 어찌어찌 될 것 같았다.
얼어붙은 손가락이 24번째의 숫자를 입력하는 순간이었다. 철컹! 기계장치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괴물의 목구멍 같은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들어가요?”
로난이 말했다.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는 천천히 계단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