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76)
279. 구원자(5)
#279
[아데샨. 위험하다.]“허억!”
아데샨이 눈을 떴다. 황급히 고개를 든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책상과 전술 지도, 천막으로 둘러싸인 막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아데샨은 그제야 자신이 책상에 엎드린 채 깜빡 졸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지가 물에 불은 것처럼 나른해져 있었다. 잠깐 눈만 붙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천막 틈새로는 옅은 서광이 비쳐들고 있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보아 그새 날이 밝은 모양이었다. 이릴이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나 버린 것이었다.
“도대체가···.”
마른세수를 한 그녀가 침음을 흘렸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역시나였다. 정체 모를 여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로난과 북부에 다녀온 뒤부터는 하루에 한 번씩은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여인이 하는 말은 매번 비슷비슷했다. 위험하다며 주의를 시키거나 조금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는 조언 등이었다.
초기에는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조차 어려웠는데, 어째 갈수록 증세가 심해지고 있었다. 베개로 삼았던 팔은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녀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천막의 입구가 젖혀지며 익숙한 소년이 걸어 들어왔다.
“괘, 괜찮아요?”
아데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튤립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은 몽롱한 와중에도 눈에 확 들어왔다. 그녀가 말했다.
“아셀? 왜 여기에···.”
“이, 이릴 누나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왔어요. 도울 수 있는게 있나 해서···상황은 들었으니 설명은 굳이 안 해주셔도 돼요.”
아셀은 남부 전선에서 방금 돌아왔다고 했다. 요근래 네뷸라 클라지에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놓은 덕에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그와 로르혼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전장을 순회하며 전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요? 안색이···.”
불현듯 아셀이 걱정 섞인 투로 물었다. 아데샨의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지 않았다. 짙어진 눈그늘과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노고를 방증하고 있었다. 아데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이릴 누나는 괜찮을 거에요.”
아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묘하게 확신에 찬 말투에 아데샨이 질문했다.
“이번에도 뭔가 본 거야?”
“그건 아닌데···그냥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직 살아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네.”
“하하···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조금 안심이네.”
아데샨은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아셀이 직감을 근거 삼아 말하는 주장은 높은 확률로 들어맞고는 했다. 용의 도시에서 거인들의 세계를 엿보고 온 뒤로 생긴 능력이었다.
문득 로난과 함께 처음 이릴을 만나러 갔을 당시가 떠올랐다. 다정하게 미소 짓던 얼굴과 동생을 아이처럼 쓰다듬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정말 우애가 좋아 보였는데. 입술을 비틀던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제발 그러면 좋겠다.”
로난이 겪고 있을 심적 고통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하루가 넘는 부재 또한 염려를 증폭시키고 있었다. 물론 로난을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죽을 만큼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처져 있으면 안 돼.’
하지만 언제까지나 무기력하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늘 그렇듯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한 시간씩이나 잤으면 충분하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아데샨이 몸을 일으켰다.
“일단 나가자. 로난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나름 할 수 있는 걸···”
“이봐.”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별안간 뒤쪽에서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아셀이 고양이처럼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히에에엑!”
“바, 발자크?!”
뒤따라 고개를 돌린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그림자 대공의 동생인 발자크가 비틀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온몸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것이 상태가 매우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자상으로 보이는 기다랗고 붉은 선이 얼굴과 사지를 비롯한 전신에 그어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죠? 다, 당장 포션을···!”
“닥치고···받아라.”
아데샨이 응급약을 꺼내 들려 했지만 발자크가 고개를 저어 만류했다. 팔을 뻗은 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피가 덕지덕지 혈계침이 아데샨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이건···!”
“낙원숲의 한복판에···놈들의 총본산으로 가는 입구가 있다. 이름 없는 호수인데···보면 바로 알 거다.”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발자크는 자신이 정찰을 나가서 본 것을 그대로 설명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총본산과 교주와의 조우. 그리고 순식간에 학살당한 동포들.
“전부···그림자로 돌아갔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어···.”
발자크가 말꼬리를 끌었다. 마음만 같으면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털썩. 비틀거리던 발자크가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체내에 남아 있는 선혈의 정수로 연명하며 간신히 날아왔는데,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저, 정신 차려요! 발자크!”
아데샨이 그를 부축했다. 힘이 완전히 빠진 발자크의 머리는 그녀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인간에게 도움을 받느니 죽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였지만 이쯤 되면 아무것도 상관 없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쥐어짜내는듯한 목소리가 새나왔다.
“조심해라···교주라는 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괴물이야. 형님은 물론···나바르도제 그 여자도 이길 수 없다···.”
“피가 있으면 살 수 있죠? 어서 제 피를 마셔요!”
소매를 걷어붙인 아데샨이 팔을 내밀었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과 대화를 나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하지만 발자크는 포션에 이어 그 제의마저도 거절했다. 진작에 상실된 오감이 끝이 다가왔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흐흐···어둡구나.”
발자크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툭. 휘청거리던 머리가 떨구어졌다. 아데샨이 한번 더 그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아셀이 울먹거렸다. 빛이 완전히 사그라진 눈동자에서 회생의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흡혈귀 측의 2인자 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였다. 침묵하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진정해. 지금 바로 사람들을 모을게.”
아셀과 달리 그녀는 금세 침착을 되찾았다. 발자크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도 없었거니와, 야전 지휘관이란 그래야 하는 위치였다. 정신을 집중한 그녀가 모두에게 전음을 보내려는 찰나였다.
깡!
깡!
깡!
비상시에만 울리는 경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아데샨이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의 외침이 뒤따라 들려왔다.
“하, 하늘에 뭔가 있다!”
“비상! 비상! 아군의 마법이 아니다!”
발을 구르고 병장기를 챙기는 소리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마주 본 두 사람이 황급히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앞머리를 젖혔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과 앞다리를 들고 날뛰는 군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올려다본 아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 저건···!”
거대한 마법진 두 개가 막사 위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원 안에 배열된 기하학적인 문양과 이름 모를 문자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안 돼.”
어디서 많이 본 마법진이었다. 아셀이 절망 섞인 탄식을 흘렸다. 두 번째 강림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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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저주를, 없애 주고자 한다.”
“···저주를요?”
구원자의 말을 들은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보통은 저주를 걸었다면 풀 수도 있는 법이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른 그가 다시금 질문했다.
“남아 있는 거 전부요? 정말로?”
“그래. 다만 지금의 내 상태로는 무리다. 완벽한 해주를 위해서는 근원으로 가야 해.”
“근원···? 그건 또 뭔데요.”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지. 이제 거의 다 왔다.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조금만 더 속도를 높여라.”
구원자는 마부라도 된 것처럼 로난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솔직히 영문을 모르리만치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좆같은 저주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했다.
아, 그래. 빨리 가 드리지. 마나로 강화된 로난의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었다. 쾅!! 그가 얼음 바닥을 박차며 달려나감과 동시에 구원자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커어억!”
“꽉 잡으쇼!”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로난이 지면을 한 번 박찰 때마다 수십 미터의 간격이 좁혀졌다.
“이런···망아지···!”
“미안하지만 잘 안 들려요!”
구원자가 뒤에서 뭐라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 같았지만, 그의 미약한 목소리는 포효하는 바람 속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머지않아 막다른 곳에 다다른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후우, 여기에요?”
“허어···흐어어···그래···.”
구원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자신의 목이 풍압에 부러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눈치였다. 눈앞의 대문을 올려다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별로 느낌이 안 좋은데.”
거대한 석문은 드래곤도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높고 넓었다. 아드렌의 입국 심사대가 대충 이 정도 크기였던 것 같았다.
못해도 만 년은 묵은 듯한 문짝 위에는 신이나 천사, 동물 등 신성하게 여겨지는 온갖 존재가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각이 뭐 이리 많아?”
“···내부의 기운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억누르는 역할이란다. 현시대의 상식으로는 마도구와 비슷한 거지.”
구원자가 대답했다. 돌아본 그의 얼굴은 동상에라도 걸린 것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설마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던 구원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들어가자꾸나. 네 피를 문에 묻히렴.”
“피를요?”
“그래. 아마도 될 거란다. 너는 세상에서 둘뿐인 내 혈족이니까···.”
구원자가 주억거렸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난은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피 뽑는 거야 일도 아니지. 엄지를 송곳니로 꽉 깨물자 붉은 방울이 몽글몽글 맺혔다. 그가 핏방울을 돌로 된 표면에 문지르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석문이 그르렁거리며 벌어지기 시작했다. 형용할 수 없는 냄새를 품은 공기가 훅 몰려왔다. 동시에 로난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뭔, 씨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석문 안쪽으로 이어진 복도는 찬란하다는 표현이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지껏 보아왔던 것 중 가장 농도가 짙은 네뷸라 클라지에의 마나가 해묵은 공기 속에 떠다니고 있었다. 구원자가 말했다.
“진정하거라.”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벌써 놀라면 안 돼. 자, 앞으로 가자.”
로난은 천천히 석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하수로 만든 터널 속을 걷는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쿵! 문간을 넘기 무섭게 석문이 닫혔다. 완연한 어둠이 드리웠지만 마나가 하도 반짝거리는 탓에 주변을 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십 분 정도를 걷자 탁 트인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중심에는 헤이란 앞바다에서 떠다니는 빙하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큼직한 얼음덩이가 솟아 있었다. 반사적으로 얼음을 쳐다본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건···!”
무언가 거대한 것이 얼음 속에 파묻혀 있었다. 거대한 인간의 형체를 한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것 같았다.
거장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근육질의 육체는 온통 새하얀 백색을 띠었다. 유일하게 얼음 위로 돌출된 머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엉망으로 부러진 채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날개는 무려 네 쌍이나 되었다.
“거인.”
로난이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거인이었다. 아하유테나 두아루와 같은, 저 하늘 위의 하늘에서 온 존재.
저딴 게 왜 여기 있는지 의문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줄곧 침묵하던 구원자가 입을 뗐다.
“그래. 사람들이 거인이라 부르는 존재다. 머나먼 우주에서 온 침략자…지금은 모든 영혼을 잃고 껍데기만 남았지만, 여전히 전율적인 힘을 품고 있지.”
“니미···도대체 옛날에 무슨 일이 있던 거죠?”
“지금부터 이야기해 주마. 네가 타고난 기이한 무재의 정체와, 어리석은 동생의 계획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이다.”
구원자가 천천히 끄덕거렸다. 거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었다.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뜬 구원자가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