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79)
282. 구원자(8)
#282
“이번에도 실패했어. 형.”
아벨이 말했다. 카인과 마찬가지로 장성한 그는 이십 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잘 단련된 그의 손에는 피와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장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형?”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아벨이 되물었다. 강렬한 빛에 노출된 카인과 아벨의 얼굴은 막 거푸집에서 꺼낸 창날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던 카인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런 것 같구나.”
먼지 쌓인 도마처럼 허무한 목소리였다. 지평선 위로 버섯구름 수십 개가 속속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불과 먼지, 방사능 물질로 이루어진 기둥은 하늘과 지상을 잇는 거대한 탑처럼 보였다.
화산재 같은 낙진이 나풀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하나의 버섯이 형체를 잃고 흩어지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버섯들이 자라나며 일대의 모든 것을 쓸어 버리고 있었다.
들이쉬는 숨에서는 쇠 맛이 났다. 카인은 말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화염 속에서 분해되는 도시와 마을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깨어났으니 말해도 되겠네. 형이 잠든 사이 수많은 나라에서 군대를 보냈어. 나는 음식이라도 챙겨 주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형의 능력을 탈취하기 위해서였지. 가장 적극적으로 병력을 파견한 곳이 어딘지 알아?”
“다인하르 제국인가.”
“그래! 형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나라지. 자연재해로 말미암은 멸망을 막기 위해 소망까지 사용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야?”
그리 말한 아벨이 검을 발치에 박아 넣었다. 콰직! 날카로운 검신이 기계장치를 관통함과 동시에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두 사람의 발아래에는 온갖 중병기로 무장한 군인과 전투 기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부 잠이 들어 무력해진 카인을 지키기 위해 아벨이 베어낸 적이었다. 카인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아벨의 말마따나 수백 년의 잠에서 막 깨어난 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상의 생명체 대부분을 절멸시켰을 초화산을 막아낸 대가였다.
콰아아앙-! 다시금 버섯구름 하나가 제국의 수도가 있는 위치에서 치솟았다. 결국 이번에도 인류는 스스로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아벨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 이제 그만 하자.”
카인을 따라 의미 없는 무료 봉사를 하는 것도 이제 한계였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도와 봐도. 문명을 부흥시켜 봐도, 결국 그들은 자기 파멸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침묵하던 카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폭발이 가라앉는 대로 출발하자. 아직 벙커에는 생존자들이 있을 테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래.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느냐. 불이 꺼진 자리에서는 다시금 싹이 피어나게 되어 있다.”
카인이 말했다. 그는 고향을 떠난 이후 인류의 발전을 위해 삶을 바쳐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소중한 이들을 덧없이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행동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쟁과 질병, 의도치 않은 사고가 필수적으로 사라져야 했다. 카인은 그 해답을 국가라는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벨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형. 다인하르는 세상의 7할을 점령하고, 우주로 쇳덩이를 쏘아 올렸어. 다시 그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거라 생각하는 거야?”
“지금보다는 빠르겠지. 우리도 경험치가 쌓였으니.”
카인이 주억거렸다. 다인하르 제국은 그의 이상향에 가장 근접했던 국가였다. 그들은 질병을 대부분 정복하고, 환경을 해치지 않는 에너지원을 개발하고, 우주선을 쏘아 올렸다.
최초로 전세계의 사람들을 모아 회합의 장을 연 것도 그들이었다. 카인은 몇 백년만 더 평화가 존속되었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질 수 있다 확신하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던 아벨이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들어봐 형. 더 좋은 생각이 있으니까. 내가 40년쯤 전에 놀라운 발견을 했어.”
“놀라운 발견?”
“응. 다인하르의 탐험대가 마지막으로 관측한 거야. 한 번 볼래?”
그리 말한 아벨이 주머니에서 작은 기계장치를 꺼냈다. 평평한 화면 안쪽에서는 파괴당하는 도시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날개 달린 거인들이 하늘을 종횡무진하며 지상으로 빛의 창을 던져 대고 있었다.
이제 막 근대 수준에 다다른 듯한 문명은 거인들에게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영상은 촬영 중이던 탐험대를 향해 거인이 창을 날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건···!”
그 참상을 본 카인이 헛숨을 들이켰다. 틀림없는 거인이었다. 아득한 과거에 고향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끝내주지? 그런데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아벨이 팔꿈치로 그를 툭툭 건드렸다. 그때 시야에 닿는 생명체를 멸절시킨 거인들이 갑자기 날개를 활짝 펼쳤다.
동시에 희생자들의 시체에서 희멀건 기체 같은 것이 뽑혀 나와 거인들의 몸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영혼이라는 것을 눈치채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카인이 말했다.
“···영혼을 흡수하고 있는 건가?”
“그래. 내가 개인적으로 연구한 결과 저놈들의 몸은 영혼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아. 지성체가 살아가는 행성을 침략하고, 그 영혼을 흡수함으로써 세를 불리는 거야.”
아벨이 웃었다. 그는 이미 거인에 관한 연구를 어느 정도 마쳐 놓은 상태였다. 눈을 반짝거리며 히죽거리는 아벨의 모습은 꼭 신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
“이게 답이야 형. 우리는 더 격 높은 존재가 되어야 해. 번뇌 따위는 육체와 함께 벗어던지고, 압도적인 포식자가 되어 저 별의 바다를 누벼야 한다고.”
“고작 수백 년 사이에 농담이 늘었구나. 아벨. 네 말은 이 별에 존재하는 모두를 죽이자는 뜻이잖느냐.”
“그게 뭐 어때서 그래? 낙원에 도달하기 위한 절차일 뿐인데. 형이 그토록 바라던, 덧없는 죽음이 없는 세계잖아.”
아벨이 항의하듯 양 팔을 벌렸다. 다시 한 번 발생한 핵 폭발이 그의 등 뒤에서 역광을 쏟아냈다. 카인이 뭐라 대답하려던 차였다.
“아, 그리고 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음?”
“나와 형은 말이지, 왜 거인들의 힘을 쓸 수 있는 거야?”
찰나 카인의 얼굴이 굳었다. 검지를 치켜든 아벨이 손가락 끝에 힘을 집중했다. 반짝거리는 마나가 이슬처럼 맺히며 별의 가호로 이루어진 구체가 생성되었다.
“너···그걸 어떻게···.”
카인의 눈이 커졌다. 아벨이 다루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거인의 힘이었다. 설마 놈을 찾아서 피를 마신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어느 날부터 쓸 수 있게 됐어. 저들이 사용하는 힘은 형이랑 내가 다루는 능력과 결이 같아. 그 말인즉슨 우리는 거인과 연관이 있다는 거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진실을 알고 있다면 부디 말해달라는 뜻이야. 형과 달리 나는 열 살 이전의 기억이 없잖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성큼 다가온 아벨이 그의 양어깨를 쥐었다. 카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쁜 숨만 들이 내쉬고 있었다. 아벨이 말을 이었다.
“우린 할 수 있어 형. 사람들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더는 이 고생을 안 해도 돼.”
“···이상해졌구나. 아벨.”
“아니. 이상한 건 형이야. 눈치를 보니 뭔가 아는 것 같은데, 제발 말해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설령 안다고 해도 말하지 않을 거고.”
“빌어먹을, 도대체 왜 주저하는 거야? 얼른 말하라고!”
갑자기 아벨이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는 수천 년 치의 광기와 울분이 뒤섞인 채 요동치고 있었다. 양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카인이 주먹을 날렸다. 당황한 아벨이 검을 뽑아들었지만, 카인의 주먹은 정확히 그의 안면 중앙에 쑤셔박혔다.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이긴 거에요?”
로난이 물었다. 뭔가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이 오갔지만 지금은 아벨이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구원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놈은 일 년 정도를 누워서 보낸 뒤에야 원래의 생활을 영위할 수준까지 회복했다.”
“캬, 그거죠. 할 때는 하는 남자셨네.”
“우리가 서먹해진 것도 그 무렵부터지. 놈은 나를 다시는 형이라 부르지 않았다.”
목소리가 침울했다. 그제야 로난은 왜 심상세계에서 만난 아벨이 구원자를 상관처럼 깍듯이 모셨는지 알 수 있었다. 설마하니 저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어쩄든···이걸 마시면 된단다. 완전히 마르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입술을 질겅이던 구원자가 손짓했다. 그의 손가락은 거인의 발 아래에 고인 웅덩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온천으로 써도 될 정도로 많던 거인의 피는 이제 사발 하나 분량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말라붙어 있었다. 그마저도 로난이 거인의 심장을 검으로 베어서 쥐어짜 낸 것이었다.
“이걸 마시면 제 저주는 모두 풀리는 건가요?”
“의식까지 거치면 말이지. 다섯 개가 단번에 해주 되지는 않겠지만, 빠른 시간 내에 점진적으로 사라질 거란다.”
“···그렇구만.”
로난은 웅덩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번들거리는 피 위로는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이고 있었다. 정말 몇 번을 봐도 구원자와 닮아 있었다. 별안간 웅덩이를 내려보던 로난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이 말은 해야겠군. 그쪽의 생각은 틀렸어요.”
“뭐라고?”
“사람은 평생 아기로 사는 동물이 아니에요. 그들이 자생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주장만큼은 아벨 그 개자식의 생각에 동의해요. 분명 아버지가 도와줘서 더 빠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됐을 거에요.”
로난의 목소리가 구덩이 안에 울려 퍼졌다. 구원자가 눈썹을 치켜떴다.
“갑자기 그게···무슨 소리냐.”
“이걸 마시고 힘을 되찾아도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겠다는 말이에요. 제 소명은 그 대머리들을 싸그리 죽이고, 누나를 구하는 걸로 끝이에요.”
“너···.”
구원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저주를 푼 네가 어떻게 사는지는 분명 너의 자유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어. 한순간에 네 삶을 지탱하던 모든 것을 잃어본 적이 있느냐? 그 절망감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설마 아들에게 사상을 부정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로난이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있어요.”
“뭐?”
“있다고요. 다 잃어본 적이.”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구원자가 움찔거렸다. 착 가라앉은, 자신과 똑 닮은 노을빛 눈동자는 거짓을 고하고 있지 않았다.
로난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세 명의 거인이 강림하던 날을. 사랑하던 누나가, 고향이, 몸을 담고 있던 군대가 전멸하던 순간을.
첫 번째 삶의 종막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구원자가 로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왜 저항하는 거냐. 그냥 방치하면 될 것을. 아벨의 뜻대로 이 별의 모든 생명이 거인에게 흡수당하도록 두면 되는 것을.”
“이 아저씨가 참. 그거랑 이거를 비교하면 안 되죠. 밀림에 사는 동물들이 자기네끼리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거랑, 갑자기 나타난 밀렵꾼이 동물들을 싸그리 쓸어가 버리는 건 엄연히 다르잖아요.”
말을 맺은 로난이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적절한 비유였다. 할 말을 잃은 구원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나는 방치를 종용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을 애새끼 취급하지 말라는 거지.”
“애새끼 취급···.”
“저는 사람은 생각보다 강한 존재라 믿어요. 그런 과잉보호로는 영원히 아버지가 꿈꾸는 이상향에 도달할 수 없어요. 의도는 좋았지만, 방향성이 잘못됐어요.”
로난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침음을 흘리던 구원자가 간신히 입을 뗐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냐?”
“별 게 있나요.”
로난이 말꼬리를 끌었다. 두 번의 삶을 거치며 보내온 나날이 그의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그가 피식 웃었다.
“그냥 믿어야죠. 사람들의 가능성을.”
로난이 다시금 앞을 돌아보았다. 양손을 모아 피를 퍼올린 그가 입을 가져다 댔다. 모든 것을 시작한 푸른 액체가 로난의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