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81)
284. 진군(2)
#284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어요.”
로난이 말했다. 그는 섵불리 일어섰다가는 엉덩이 가죽이 벗겨질 만큼 차가운 얼음 바닥에 앉아 해주의 의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힘을 모으던 구원자가 눈썹을 으쓱였다.
“음? 뭐가 말이냐?”
“이 새끼 말이죠. 누가 죽인 걸까요?”
로난의 시선은 아까부터 얼음 속에 갇힌 거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몇 번을 봐도 굉장한 박력이었다. 여덟 개의 날개와 어지간한 드래곤 만한 덩치는 이 거인이 아하유테나 두아루 따위와는 격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러니까···으, 잠깐만. 더럽게 메스껍네.”
말을 이으려던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인의 피를 마신 이후 속이 영 좋지 않았다. 위장이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전체적인 감각이 점진적으로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상하잖아요. 이 정도면 대머리들의 왕이라 해도 믿어질 것 같은데, 그까짓 땅에 처박혔다고 다치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구나.”
구원자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확실히 로난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거인의 몸 대부분이 얼음 속에 파묻혀 있었고, 아득한 옛적에 봉인하고 등져 버렸는지라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검지를 쳐든 로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추락사했다기에는 상처가 부자연스러워요. 무언가와 싸우지 않고서야 저렇게는 안 다치죠. 그것도 존나 격렬하게.”
그의 손가락은 거인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전신에 골고루 남은 흔적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베이거나 찔린 상처는 물론, 불에 데인 화상까지 남아 있었다. 치명상으로 추측되는 것은 복부에 난 거대한 구멍이었는데, 단면이 깔끔한 것이 꼭 용왕이 쏘아 대던 광선에 맞은 것 같았다.
“우주에서 다쳐서 온 걸까요? 아니면 이 별을 지키는 무언가 존재하는 걸까요?”
“글쎄다···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구나.”
“거 이상하네.”
로난이 입맛을 다셨다. 이제 와서 알아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으나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문득 지금까지 보아 왔던 불가해한 경험이나 현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가 설치한 것도 아닌데 이 별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방어막이나, 과거 바위가 된 엘프 사란테가 언급했던 ‘세니엘’ 같은 것들. 로난 본인도 모르는 새 심장에 자리를 잡았다는 그 괴이한 존재는 아직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물론 가장 불가사의한 것은 따로 정해져 있었지만. 턱을 매만지던 로난이 질문을 건넸다.
“저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음?”
“시간을 되돌리는 보물 같은 게 있을까요?”
구원자가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턱을 긁적거리던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없는 것 같구나. 그런 게 존재한다면 나는 이토록 후회스러운 삶을 살지 않았겠지.”
“그건 그렇죠.”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구원자 정도 되면 알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두 번째 삶을 살고 어느덧 삼 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아데샨이 입으로 넘겨준 구슬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어차피 다 끝났지만.’
물론 상황이 여기까지 진행된 현재는 알 바가 아니었다. 다 필요 없으니 별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게 있다면 저 좆같은 대머리들을 모조리 쫓아내 줬으면 하는 바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구원자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참. 해주를 마치는 대로 나와 어디를 좀 가자꾸나.”
“가다니, 어디를요?”
“붉은 사막. 가본 적 있느냐?”
“엥?”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아는 이름이기는 했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경 다인하르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삼 년 전쯤에 슐리펜과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원주민들을 학살한 네뷸라 클라지에를 썰어 버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러고 보니 거기도 여기처럼 이상한 기계장치로 뒤덮여 있었지.
“알긴 아는데, 거긴 갑자기 왜요?”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다인하르 제국의 유적이 그곳에 있거든. 아벨의 계획을 저지하는 데 도움이 될 거란다.”
“허.”
그제야 로난은 인류를 별까지 보냈다는 제국의 이름이 마경과 같다는 것을 눈치챘다. 마침내 준비를 마친 구원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겨우 됐군. 슬슬 시작해도 되겠느냐?”
“얼마든지요. 그런데 꼭 제가 무서워서 시간을 끈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니었나? 나는 그래서 이상한 질문을 하는 줄 알았지.”
구원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 보는 익살스러운 미소에 로난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구원자의 양손에는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의 반짝거리는 마나가 구체의 형태로 요동치고 있었다.
“아플까요?”
“몹시.”
“내 시발 그럴 줄 알았지.”
한숨을 푹 내쉰 로난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구원자가 로난의 등에 손을 올렸다.
“정 못 견디겠으면···으음, 아냐. 그냥 참아라.”
“젠장. 말이라도 못 하면···”
어이를 상실한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구원자가 지금껏 모은 마나의 구체를 그의 등에 확 밀어 넣었다.
“······!”
로난의 눈앞이 새하얘졌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짐승 같은 포효가 별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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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게 확실하느냐?】
“네. 확실해요.”
나바르도제의 질문을 들은 아데샨이 주억거렸다. 두 여인의 시선은 얼굴이 반으로 쪼개진 거인 바사기아를 향해 있었다.
전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누워 있는 거인의 주검은 해변에 떠밀려 온 고래처럼 보였다. 마무리 일격을 가한 자이파는 아직도 그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데샨이 그를 불렀다.
“자이파 님.”
그녀와 눈이 마주친 자이파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별안간 언월도를 역수로 고쳐 잡은 그가 거인의 목에 창날을 박아넣었다.
푹! 살 가르는 소리와 함께 푸른 피가 튀어 올랐지만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나바르도제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고생 많았다. 정말로 잘 해줬어.】
“모두가 열심히 싸운 덕이에요.”
아데샨이 묵례했다. 기울어 가는 해가 하늘 서편에서 여름볕을 뿌리고 있었다. 전투를 마친 연합군은 전사한 동료들의 시체를 부지런히 수습하고 있었다.
나바르도제가 돌아온 것은 거인 바사기아가 죽은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로르혼과 그림자 대공, 오르세라는 연합군의 최고 전력과 함께 복귀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설마 한번에 셋이나 내려올 줄이야.】
“그런 말씀 마세요.”
긴급 상황치고는 지나치게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들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네 사람은 다른 곳에서 강림한 거인 둘을 막 해치우고 오는 길이었으니까.
“두 번째는 정말로 아슬아슬했습니다. 로난 그 친구의 피가 거의 떨어진 채로 싸웠거든요. 어찌어찌 이기기는 했습니다만.”
로르혼이 말했다.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요란했던 싸움이었다. 그는 거인들과의 전투가 벌어진 장소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백 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 장담했다.
치열했던 전투를 방증하듯 네 사람의 몰골은 이전보다 확실히 꾀죄죄하고 지쳐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오르세가 놀란 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제법이군. 거의 안 죽었잖아.”
순수한 감탄이었다. 수백 명이 죽고 천 명에 가까운 부상자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아드렌에서 벌어진 참극에 비하면 피해가 없는 수준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맡아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단 한 명의 최고 공로자를 꼽자면, 역시 도중에 전사한 사령관을 대신하여 지휘를 담당한 아데샨일 터였다.
그녀는 그림자의 마나를 활용하여 효율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적재적소에 인원을 배치함으로서 인명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제국군 장교도 아니고, 이제야 필레온 아카데미의 졸업을 앞둔 학생이 이룬 전과 치고는 경이로울 지경이었으나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무고한 생명이 스러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아랫입술을 질겅이던 아데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살릴 수 있었어요.”
“욕심도 많군. 그 애송이의 친구들은 왜 다 이 모양인지.”
그 반응을 본 오르세가 헛웃음을 쳤다. 여기서 애송이란 당연히 로난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아셀이라는 마법사도 그렇고, 왜 이렇게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겸손한 놈들만 모여 있는지. 불현듯 전사자의 시체를 옮기고 온 슐리펜이 나바르도제에게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드리무어는 어떻게 됐습니까? 거인들이 내려왔다는 건 하늘의 전선이 돌파당했다는 의미 아닌지.”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아지다하카 그 아이에게는 만약 거인이 들이닥치면 막으려 들지 말고 그냥 통과시키라고 미리 전달해 놨으니까. 아마 준비가 되는 대로 내려올 거란다.】
나바르도제가 말했다. 어차피 보통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는 존재였으니,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말고 통과시켜 전력을 보존하는 전략이었다.
“내려온다는 말씀은···.”
【그래. 전력에 합세한다는 뜻이란다. 잠시 회의를 소집할 테니 사람들을 모아 주겠니?】
나바르도제가 옅게 미소지었다. 아데샨은 그렇게 했다. 전음을 보낸 지 머지않아 연합군의 주요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천막 같은 것은 죄다 날아가 버렸음으로 회의는 그냥 폐허 한복판에서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의 면면을 둘러보던 나바르도제가 입을 열었다.
【좋아. 회의를 시작하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방어를 포기하고 총공세에 나서야 한다.】
“···예?”
【놈들의 본거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헌데 이번 세 번의 전투로 확신이 생겼어. 이대로라면 우리에게 승산은 없다.】
나바르도제가 아데샨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거인의 강림으로 정신이 없던 와중에도 발자크가 네뷸라 클라지에의 총본산을 찾아내고 죽었다는 소식을 주요 인물들에게 전달해 주었었다.
하나뿐인 동생을 잃은 그림자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실로 파격적인 제안을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 판국에 총공세라니. 그게 무슨···.”
“불의 어머니여. 진심이십니까?”
【그래. 진심이다.】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가 놈들과 맞설 수 있는 것은 지난 석 달간 로난 그 아이가 부지런히 헌혈을 해 준 덕이다. 아직은 여유분이 조금 있지만, 남아 있는 거인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로난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판국에 장기전은 너무 위험해.】
“나, 나바르도제 님의 말이 맞아요. 이대로 가다가는 더 올 거에요.”
“아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늘 조용하던 아셀이 먼저 나선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그의 힘을 알았기에 어리거나 왜소한 체구를 보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쁜 호흡을 들이 내쉬던 아셀이 입을 열었다.
“저 거인들은 이쪽 세계에서 부르기 때문에 오는 거에요. 어디선가는 꾸준히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소리인데, 아마도 교단의 총본산일 확률이 높아요.”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아셀은 용의 도시에서 엿본 거인들의 고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늘은 비정기적으로 하늘에 생성되는 차원문을 통해 다른 세계를 침략하고 있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자이파가 질문했다.
“본거지에 쳐들어가서 죄다 죽이고 부순다면 더는 저 버러지들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건가.”
“아, 아마도요. 어쨌든 매개체는 거기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군. 나는 찬성이다.”
별안간 자이파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총공세에 찬성한다는 의미였다. 직접 거인들과 교신한 아셀을 믿지 못한다면, 여기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치를 보며 고민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저도 찬성합니다. 역시 서둘러 결판을 내야겠지요.”
“마찬가지로 찬성합니다. 인질을 위해서라도 가야 할 일이기는 했습니다.”
“찬성합니다. 로난 그 녀석이 제 시간에 맞춰올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나비로제도 손을 들었다.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목소리에는 제자에 대한 걱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거수 투표는 전원 찬성으로 마무리되었다. 기다려 봐도 이견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바르도제가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그렇다면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열도록 하지.】
“연다고요?”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이럴 때는 출발이나 시작한다는 표현이 사용되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하지만 나바르도제는 말실수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언제까지고 우리가 끌려다니기만 할 수는 없지 않으냐. 로르혼!】
“네. 불의 어머니시여.”
부름을 받은 로르혼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손뼉을 짝짝 치는 것으로 자신의 제자인 크라티르를 불렀다.
“그럼 해보자꾸나 제자야. 좌표는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스승님.”
평소에는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장으로서의 위엄이 넘치는 크라티르였지만, 로르혼의 앞에서는 그저 어리숙한 제자로 보일 뿐이었다.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린 두 사람이 황무지가 된 전장으로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