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90)
293. 아하유테 >
#293
【사라져라!】
나바르도제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불의 해일이 하늘을 휩쓸었다. 진홍색으로 뒤덮인 화염 속에서 아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게 통하지 않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촤아아악! 화염의 장벽이 갈라지며 아벨이 튀어나왔다. 그는 태초의 불을 뒤집어쓰고도 머리카락을 조금 그을리는 것 외에는 손상을 입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며 쏘아진 아벨의 검기가 나바르도제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큭···!】
두 사람의 싸움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하얀 대지의 끝자락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실력이 비등해서 승부가 도통 나지 않고 있었다. 막 반격하려던 그가 눈썹을 치켜떴다.
“음?”
나바르도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그녀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나도 안다.】
“이런.”
실수를 깨달은 아벨이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손아귀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바르도제의 손이 그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추락한 몸뚱어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거 안 되겠는데.”
아벨이 누운 채 중얼거렸다. 타격이 상당했다. 얼마나 깊숙이 쳐박혔는지 그가 뚫고 들어온 구멍이 손톱만큼 작게 보였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나바르도제는 너무 강했다. 별의 가호를 두르고 있었음에도 등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나.”
내키지는 않았지만 비장의 수를 써야할 것 같았다. 그리 마음먹은 아벨이 몸을 일으켰다.
****
“빌어먹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넘어라!”
“피를, 피를 더 가져와라!”
최종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사방에서 욕지거리 섞인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두려움을 소거 당한 연합군은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총본산을 공략하고 있었다.
거대한 공성추가 성문을 두들기고, 사다리와 공성탑이 천천히 진격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로난의 피로 만들어진 희석액을 마시거나 무기에 바르며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넘어라! 일단 넘어가기만 해!”
“메이지 아셀이 무너지기 전에 성을 점령해야 한다!”
누군가 외쳤다. 별의 가호는 여전히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아셀이 결사의 각오로 펼치는 방어막은 거인들의 일제 포격을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왜소한 몸은 모든 마법사들의 마나를 흡수하고 있었다.
“끄···으으으···!”
조막만 한 아셀의 입술 아래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지원을 받고 있다 해도 한계는 명확했다. 칼날 위를 걷는 심정으로 정신을 집중하던 그가 쥐어짜 내듯 말했다.
“서···둘러요!”
[멈추지 마라! 대주교들을 찾아서 의식을 막아! 거인들이 더는 내려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동시에 아데샨의 전음이 울려 퍼졌다. 가장 급한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강림 의식이 진행 중이라는 티에리아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 높은 확률로 성 안쪽에서 진행되고 있을 터였다.
‘성을 먼저 점령해서 거인들과 싸워야 해. 나바르도제 님이나 로난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적의 발판을 빼앗으면서 시간을 끌어야 했다. 다행히도 공성전 자체는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갈 줄 예상하지 못한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이놈들이 끝내 포기하지 않고···!”
“떨쳐내! 성벽에 오르지 못하게 해라!”
사실 거인만 빼놓고 보면 전력이 부족한 것은 오히려 교단 측이었다. 교주는 나바르도제와 함께 어딘가로 가 버렸고, 그 다음 가는 전력인 대주교들은 대부분 강림 의식에 매진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수성하는 측이 유리한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북측을 방어하던 신도들이 공성탑을 파괴하기 위해 마법을 준비하던 차였다. 쿠궁! 쿵! 아래쪽에서 솟구친 그림자 수십 개가 성벽 위에 착지했다. 가장 먼저 올라선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반갑다.”
“자, 자이파!”
신도들이 경악했다. 시커먼 웨어타이거의 손에는 오러를 머금은 언월도가 쥐어져 있었다. 스각! 뭐라 할 새도 없이 그어진 참격이 신도들의 몸을 토막내 버렸다. 뒤편에 서 있던 마르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올라왔네. 난 이제 몰라.”
“흐하하, 차라리 이 편이 영광 아닌가!”
브라움이 껄껄 웃었다. 그림자의 마나가 두려움을 소거해준 덕에 그는 다시 호탕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슐리펜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릴 양을 구하고 돌아오겠다.”
“슈, 슐리펜!”
마르야가 불렀지만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백한 성 깊숙한 곳으로 달려갔다. 촤아악!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신도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일대의 적을 모조리 쓸어 버린 자이파가 툭 내뱉었다.
“모조리 죽여라.”
“와아아아!”
그 말과 함께 성벽 위로 올라간 인원들이 달려들었다. 의식을 막고 이릴을 구하기 위해 조직된 임시 특전대였다. 하지만 그들이 상황을 역전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촤아악! 연합군 진영 한복판에서 피보라가 튀어 올랐다.
“어억···!”
피격당한 마법사가 비틀거렸다. 갑자기 성벽 위에서 무언가 튀어 오르나 싶더니 가슴팍에 구멍이 뚫렸다. 만월 마탑에서 파견된 그는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아셀에게 힘을 보태 주고 있었다.
털썩. 결국 무릎을 꿇은 그가 눈앞의 여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 돌려···줘.”
“누가 그런 건방진 꼴을 보고만 있겠어?”
대주교 티에리아가 웃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까 그 마법사의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결국 숨이 다한 마법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심장이 사과라도 되는 것처럼 한 입 베어문 티에리아가 입을 열었다.
“희망을 버려. 여기가 너희들의 종점이니까.”
“웃기지 마라!”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티에리아는 판타시온과 더불어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대주교였다. 그녀가 손톱을 휘두를 때마다 잘려나간 팔다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흐아아악!”
“사, 살려줘어!”
“아하하하! 이거지!”
티에리아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성을 점령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 연합군은 그녀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마법사 한 명이 죽을 때마다 아셀의 몸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우욱.”
이제 정말로 한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별의 가호를 유지하는 데는 굉장히 많은 마나가 소모되었다. 거인들은 여전히 폭격을 퍼붓고 있었고, 바깥쪽에서는 깃털에서 소환된 사역마들이 발광하며 방어막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공급원까지 사라지고 있으니 정말 버틸 수가 없었다. 티에리아가 막 열세 번째 마법사의 심장을 수집하려던 순간이었다. 카아앙!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그녀의 손톱을 강하게 튕겨냈다.
“오, 너는 좀 하는데.”
티에리아의 눈이 커졌다. 뒤로 제비를 돌며 착지한 그녀가 자신을 가로막은 상대를 쳐다보았다. 검 끝으로 티에리아를 겨눈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내 제자를 방해하지 마라.”
“싫다면?”
티에리아가 웃었다. 나비로제는 대답하는 대신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카아아앙-! 두 여인이 격돌한 자리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작렬했다. 어떻게든 기운을 차린 아셀이 다시 정신을 집중하려던 차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하늘 위에서 울려 퍼졌다.
“잘들 놀고 있었나?”
“···뭐?”
아데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그녀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는 거인들이 소환된 마법진만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래, 잘못 들은 거야. 그리 읊조린 아데샨이 숨을 고르던 와중이었다. 콰장창!! 하늘 한복판의 공간이 부서지며 사내 한 명이 튀어나왔다. 필사적으로 수성전을 펼치던 신도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교, 교주님!!”
“교주님이 돌아오셨다!”
분위기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충격에 빠진 연합군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바람을 가르며 내려오고 있는 사내는 분명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인 아벨이었다.
“뭐야, 아직도 못 끝냈나?”
쿵! 성벽 위에 착지한 그가 혀를 찼다. 연합군 병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 교주라고?”
“나, 나바르도제 님은···?”
차원문을 빠져나온 것은 아벨뿐이었다. 나바르도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충격에 빠진 그들이 얼어붙어 있던 와중이었다. 딱! 주변을 둘러보던 아벨이 손가락을 튕겼다.
“서두르지. 지금 여기서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촤아아악! 그 순간 기괴한 색채의 장막이 총본산의 외곽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울걱거리며 솟아나는 방어막은 성벽을 기어오르던 병사들과 공성탑을 모조리 튕겨내 버렸다. 아데샨이 절망 섞인 비명을 내뱉었다.
“아, 안 돼!”
하지만 새로운 별의 가호는 이미 성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이행한 작전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미 성내로 돌입한 인원들이 고립되어 버렸다.
다시 빠르게 작전을 세워야 했지만 아벨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말없이 검을 뽑아든 그가 연합군을 보호하고 있는 방어막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콰아아아앙! 검기가 직격함과 동시에 방어막이 산산이 조각났다. 안 그래도 위태롭던 아셀의 방어막은 교주의 일격을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다.
“카학···!”
아셀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그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상공에서 그 모습을 본 오르세가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마법사!】
마음만 같아서는 곧바로 구해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미 다섯 명의 거인이 그를 뒤쫓고 있었다. 오르세는 곡예비행은 물론 블링크까지 연달아 사용하며 빛의 창을 피하고 있었다.
콰아앙! 로르혼이 미처 흘려내지 못한 창들이 다시 연합군 진영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빛의 기둥이 솟구칠 때마다 수백 명의 단말마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 모두 도망가!”
“명령을···커억!”
방어막 바깥에서 도사리던 사역마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아벨이 아데샨에게 시선을 옮겼다.
“네가 지휘관이군. 아직 어려 보이는데, 용케도 여기까지 해냈구나.”
“아···아아아···.”
아데샨은 대답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터였다. 이제 거인들을 방어할 수단은 사라져 버렸다. 성을 점령할 수도 없고, 로난의 피를 담고 있던 운반차는 모조리 박살이 나 버렸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희망이 소실된 자리에 절망이 빠르게 들어차고 있었다. 혀를 차던 아벨이 툭 내뱉었다.
“내가 말했잖나. 전부 부질없을 거라고.”
“···닥쳐.”
벙쪄 있던 아데샨이 등에 걸린 석궁으로 손을 뻗었다. 평소와는 달리 생각하고 행해지는 행동이 아니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지만이 남아 그녀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만둬라. 담담하게 최후를 맞이해.”
아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아데샨은 끝내 방아쇠를 당겼다. 캉! 아벨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든 쇠뇌가 허공에서 토막 났다. 그까짓 쇠뇌 하나 베어내는 것은 아벨에게 있어서 일도 아니었다. 아데샨은 떨리는 손으로 다시 쇠뇌를 장전했다.
“너희는 충분히 했다. 겁내지 말고 받아들여라. 이걸로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거다.”
“닥치라고 했잖아···!”
캉! 아데샨이 재격발했으나 아벨은 이번에도 칼질 한 번에 쇠뇌를 잘라 버렸다. 그녀가 다시 장전하려는 찰나 빛의 창 하나가 근처에 떨어졌다. 콰아아앙! 폭발의 여파에 튕겨 나간 아데샨이 바닥을 뒹굴었다.
“커억!”
“안쓰럽군.”
아벨이 등을 돌렸다. 아데샨이 바들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아벨은 그걸 끝까지 봐 줄 생각이 없었다. 시간은 조금 오래 걸렸지만 결국은 마무리되었다. 나바르도제야 차차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자···그럼 뭐부터 해 볼까.”
아벨이 중얼거렸다. 아직 이릴의 능력이 완성되지 않았으니 거인들을 바깥세상에 내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 바퀴벌레들을 잡아야겠군.”
머지않아 결론을 내린 그가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어차피 바깥의 적은 거인들이 처리해 줄 테니 성내에 진입한 멍청이들이나 잡아 죽이면 될 것 같았다. 겸사겸사 ‘그분’ 이 강림하기를 기다리면서. 아벨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차였다.
촤아아악-! 백만 장의 종이를 동시에 잡아찢는 것 같은 소리가 하늘 위에서 울려 퍼졌다.
“뭐야?”
이런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몸을 돌린 아벨의 눈이 커졌다. 거인 무리 한복판의 공간이 찢어지며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나고 있었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하늘에 집중되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든 아데샨이 미간을 좁혔다.
“저건···?”
전장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공간을 찢으며 나오는 덩어리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바위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꽃. 혹은 그런 꽃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고래를 보는 것 같았다.
생김새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산을 그대로 뽑아온다면 저런 모습일까.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던 와중이었다. 콰아아아아! 갑자기 덩어리가 번쩍이더니 붉은 광선 수십 발이 상하 좌우에 위치한 거인들을 향해 쏘아졌다.
“뭣···!”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광선은 별의 가호를 뚫지 못했지만, 거인들을 저 멀리 튕겨내 버렸다. 아래쪽에 있던 거인 몇몇은 지면까지 밀려나 처박혀 버렸다.
“저건 또 뭐야.”
아벨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저런 걸 본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목표를 바꾼 거인들이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향해 창을 던졌다.
콰과과광! 빛의 창은 한 발도 빠짐없이 적중했으나 덩어리에는 손상이 없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어막이 덩어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때 작은 그림자 하나가 덩어리로부터 쏘아져 나왔다. 아벨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설마···!”
“염병도 아니군. 좆같은 새끼들.”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실시간으로 지옥이 되어가고 있는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파인 거대한 구덩이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도 아직 병력이 많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아주 늦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다인하르가 공간을 도약함과 동시에 뛰쳐 나왔다. 날개 달린 대머리들은 갑작스레 튀어 나온 로난을 벙찐 채 쳐다보고 있었다.
“엥?”
그러던 와중 로난의 시선이 어느 거인에게 닿았다. 거인들과 싸우고 있을 거라 예상은 했는데 설마 이 자식까지 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로난의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오랜만이다, 이 새끼야.”
『그대는···?』
아하유테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눈앞의 인간은 분명히 예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이 자가 두아루를 죽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아루를 살해한 자?』
“오, 기억하고 있네?”
『뭣이···.』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감각을 공유하는 거인들이 동시에 반응을 보였다. 주변의 광자가 그들의 손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공격해온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하유테였다. 그의 주위로 저절로 움직이는 빛의 창이 여섯 개 형성되었다.
『그분의 뜻에 반하는 자여. 사라져라.』
“좆까.”
아하유테가 창을 휘둘렀다. 중지를 쳐든 로난이 몸을 뒤틀었다. 빛의 창 여섯 개가 동시에 다른 각도로 찔러 들어왔지만 어느 하나 로난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는 한 번 싸워본 상대의 버릇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과거의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주가 소멸한 그의 몸은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아하유테의 미간이 옅게 일그러졌다.
『이런 건, 불가능하다···!』
창이 두 배로 늘어났다. 이번에는 열두 개의 창이 로난을 노리고 날아들었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간단하게 검로를 파훼한 로난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하유테의 몸통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길게 늘어진 시간 속에서 전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놈팡이처럼 살던 유년기, 귀족을 죽이고 잡혀 들어간 징벌 부대. 피와 술로 절여진 채 보내던 하루하루와 정이 들만 하면 뒈져 버리던 징벌병 동기들.
갑작스레 내려온 세 거인과 죽어가는 사람들, 고향 님버튼과 함께 소멸한 누이. 동귀어진을 택한 로르혼, 나바르도제, 끝내 뜻을 이루지 한 제국제일검 슐리펜의 장렬한 최후. 수 년이 지났음에도 선명한, 대장군 아데샨의 입술 감촉.
지금 와서 보면 참 많은 게 변했다. 당시에는 지켜내지 못한 것들이 여기에 있었다. 슬쩍 내려본 아데샨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로난.”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걸 보니 상당히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슬쩍 웃어 보인 그가 다시 아하유테를 돌아보았다. 느려터진 대머리는 아직도 검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도 나름의 동기부여를 해 주었었다. 그래, 뭐라고 했더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우리에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대는 진창 속에서 재능을 썩혔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갈고닦았다면 우리의 숙원을 가로막는 거대한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하.”
로난이 실소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 맞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썩어빠진 마음가짐을 고쳐 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저 대머리였을지도 모른다.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칼자루를 움켜쥔 로난이 검을 횡으로 그었다. 성검의 정령이 깃든 라만차가 경쾌한 호를 그리며 나아갔다. 그제야 로난의 접근을 눈치챈 아하유테가 당혹성을 흘렸다.
『뭣···.』
황급히 뭐라도 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결판은 지어져 있었다. 과거를 청산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드럽게 미끄러진 칼날이 아하유테의 목울대를 가로질렀다. 촤아아악! 푸른 피와 함께 솟구친 머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