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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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거기 있었나. 한참 찾았잖아.”
“뭐?”
메마르다 못해 갈라진 목소리는 틀림없이 이전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장막 너머 한참 떨어진 곳에, 만신창이가 된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교, 교, 교, 교주?!”
아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거리는 멀었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인 아벨이었다.
다만 처음에 조우했을 때처럼 압도적인 위압감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를 본 사람들은 겁에 질리기보다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자이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완전히 산송장이군.”
“낯이 익은 고양이구나. 그래, 못 봐줄 꼴이 되어 버렸지.”
아벨이 클클거렸다. 그는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간신히 로난과의 전투에서 도망치기는 했지만 한쪽 팔과 한쪽 다리, 내장의 절반가량을 내어 줘야 했다.
“우웁···.”
아셀이 헛구역질했다. 잘려나간 왼쪽 다리 아래로 보라색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바르도제에게 당한 걸 제외한다면 대부분 로난의 작품이었다. 침묵하던 구원자가 입을 열었다.
“···아벨.”
“도대체 무슨 괴물을 만든 거요 형님. 하마터면 정말로 죽을 뻔했잖소.”
아벨은 잘린 오른팔을 장난스레 흔들어 보였다. 그새 재생되고 있는 뼈가 절단면 바깥으로 새하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구원자가 물었다.
“너는 이제 끝났다.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면 도망이나 칠 것이지 여기에는 왜 나타난 거냐.”
“글쎄···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라 해야 할까? 어차피 내가 도망쳐도 형님은 나를 찾아내서 죽일 거 아니오. 그리고 이대로라면 정말로 저 덩치마저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아벨이 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구름 너머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거인의 왕에게 머물러 있었다. 로난과 연합군의 저력은 자신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그의 말을 들은 마르야가 헛웃음을 쳤다.
“하, 뭐 저런 뻔뻔한 게···!”
얼굴 가죽이 두꺼운 것도 정도가 있었다. 갑자기 불안해진 그녀가 구원자를 돌아보았다. 듣자하니 형제라고 하던데, 설마 용서해 주는 건 아니겠지? 침묵하던 구원자가 입을 뗐다.
“너도 알 텐데. 이미 늦었다.”
“그렇기는 하지.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 거요. 형님은 예전부터 마음이 약했으니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구나. 모습을 드러낸 이상 너는 살아남지 못해. 그러니 마지막 참회를 하는 심정으로 대답하거라.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리고 나바르도제 님을 어떻게 한 거냐?”
목소리가 단호했다. 자신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한 마르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아벨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글쎄, 어떻게 된 걸까…살려주지도 않을 건데 대답할 의무는 내게 없는걸.”
“···그런가.”
구원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간 함께해온 나날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손을 맞잡고 사라진 고향의 터를 걷던 날부터, 자신의 등에 검을 찔러 넣던 순간까지.
구원자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쥐어짜 내듯 읊조렸다.
“···죽여라. 누구든 좋으니.”
그러자 별의 가호가 살짝 벌어졌다. 심드렁하게 손목을 돌리던 자이파가 기다렸다는 듯이 땅을 박차며 뛰쳐나갔다.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아든 아벨이 초승달 형상의 검기를 발사했다. 쉬이익! 자이파의 뺨을 스쳐 지나간 검기는 그대로 카인을 향해 날아갔다.
“고작 그런 걸로 뭘 하시려고!”
“흐읍!”
예상하던 바였다. 기존의 것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해질 만큼 비실비실한 검기였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마르야와 브라움이 번개처럼 대검과 방패를 쳐들었다. 허나 검기는 그들에게 도달하지도 못한 채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엥?”
어이를 상실한 마르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장의 일격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하찮았다. 작은 폭발은 그녀의 금발을 헝클어트리고, 이릴의 머리에 씌워진 티아라를 떨어뜨리고, 브라움의 가려운 엉덩이를 긁어 준 뒤 소멸했다.
“이런.”
아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엉망진창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지면과 수평을 그리며 날아온 웨어타이거가 아벨의 눈앞에 도달했다.
“빠르군.”
그것이 유언이었다. 자이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을 휘둘렀다. 아직 로난의 피로 절어 있는 손톱은 약해진 아벨의 방어막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퍼억-! 그의 손이 호를 그림과 동시에 아벨의 머리가 폭발했다.
두개골 으깨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죽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서 있던 몸뚱어리가 뒤로 넘어갔다.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구원자가 입을 뗐다.
“···평안이 있기를.”
오랜 악연이 매듭지어지는 순간이었다. 허무하다면 한없이 허무한 결말이었다.
구원자의 태도가 그러했기에, 일행은 적의 수괴를 죽였음에도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지 못했다. 문득 영문 모를 위화감을 느낀 자이파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틀림없이 죽였는데 죽인 것 같지가 않았다. 다시 바라본 아벨의 시체는 쓰러진 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뭐지?’
언제나 그를 이끌어온 직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콰직! 시체를 밟아 터트린 자이파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장막 안쪽에서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
“음?”
자이파가 고개를 돌렸다. 마르야의 품에서 웃어젖히고 있는 이릴이 눈에 들어왔다. 온갖 소란에도 반응 없이 단잠을 청하던 그녀가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아하하! 히히···하하하!”
“이, 이릴 언니? 갑자기 왜···.”
마르야가 당혹성을 흘렸다. 일반적인 잠꼬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멈추지 않고 울려 퍼지는 웃음 소리는 어쩐지 섬뜩하게마저 느껴졌다.
“뭐야, 무슨 일이···커윽!”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원자가 본격적으로 딸을 살피려던 차였다. 구름이 갈라지더니 다시 한 번 거인 왕의 일격이 인근에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지면에 내리꽂힌 빛의 기둥은 산도 통째로 묻을 수 있을 것 같은 구덩이를 만들었다. 구원자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본 아셀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 일단 의료진에게 데려가자. 이쪽이야!”
“으, 으응!”
아셀이 외쳤다. 마르야는 이릴을 꽉 끌어안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대륙에서 제일가는 치유술사들이면 그녀를 고칠 수 있을 터였다.
“아하하하! 하하!”
“어, 언니. 괜찮은 거 맞죠? 조금만 참아요!”
이릴은 그 와중에도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셀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가슴 한 켠이 옥죄어 오는 것이 별로 예감이 좋지 않았다.
“···흠.”
기웃거리던 자이파가 다시 별의 가호 안쪽으로 들어왔다. 총본산의 성벽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사내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부탁한다. 조카야···허억!”
아벨의 입에서 핏덩이가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나쁘던 몸 상태가 더욱 악화된 것이 느껴졌다.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서 만들어낸 분신이 죽어버린 탓이었다. 주교 라본다이테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교,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이렇게 될 것 같아서 말렸는데···!”
정교한 분신 마법이 특기인 그녀는 아벨의 부탁을 들어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마나는 물론이요 대상의 생명력도 소모하는 라본다이테의 마법은 죽어가는 아벨에게는 별로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이 정도로 공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분명 들켰을 거다. 이번에도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 고양이가 나를 눈치챘을 거야.”
“이, 일단 치료하러 가시지요. 이대로라면 정말 위험합니다.”
“치료라···.”
아벨이 말꼬리를 끌었다. 라본다이테가 그를 부축하려던 차였다. 아벨의 왼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하나 남은 왼손에는 어느새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어?”
라본다이테가 눈썹을 치켜떴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촤아아악! 거칠게 뿜어져 나온 피분수가 아벨의 얼굴을 적셨다. 주변에서 그를 호위하던 신도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히이익! 교, 교주님?!”
“그동안 수고했다. 다들 별이 되어 만나자.”
아벨이 무심하게 검을 휘둘렀다. 수십 명의 신도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참살 당했다. 이것으로 목격자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성의 최정상을 올려보았다. 고탑을 휘감은 슐리펜의 회오리는 커졌다 작아지는 것을 반복하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벨이 혀를 찼다.
“적당히 하고 올 것이지.”
이릴도 빼앗긴 주제에 뭘 잘했다고 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대주교들이 그녀를 강탈당하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분신까지 뽑아 가며 이 고생을 할 일이 없었을 터였다.
‘별빛을 받아서 강해졌을 터인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혀를 끌끌 찬 아벨이 고개를 내렸다. 지금껏 옆에서 고생해준 만큼 직접 목숨을 거둬 주려고 했는데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릴의 능력이 각성한 만큼 고통스럽게 죽지는 않을 테지만. 아벨이 중얼거렸다.
“평안한···죽음을···.”
그는 사람들이 공포와 절규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벨은 검을 지팡이 삼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성의 지하. 거인들의 세계와 이어진 비밀의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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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우웅.”
이릴이 눈을 떴다.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몽롱했다. 머리 위로 펼쳐진 파란 하늘이 아름다웠다.
“내가···뭘 하고 있었지?”
뭔가 힘든 일을 겪고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콧망울을 간질이는 바람에는 풀과 들꽃의 냄새가 가득 뒤섞여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그녀의 앞으로 뻗어 있었다. 길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웬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사무칠 정도로 정겨운 풍경에 이릴의 눈이 커졌다.
“여기는···.”
초여름을 맞이한 님버튼은 푸르른 녹음에 물들어 있었다. 작은 강줄기가 마을을 따라 굽이치고 있었다. 몽실거리는 양떼가 마을을 에워싼 언덕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님버튼.”
별안간 이릴의 시야가 부옇게 물들었다. 이게 향수라는 걸까. 웬지 모르겠지만 코끝이 찡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소맷단에 눈물을 닦아내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응?”
고향의 풍경만큼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린 이릴의 시선이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소년에게 닿았다. 자신을 빤히 올려보고 있는 소년의 눈은 노을처럼 아름다운 주홍색을 띠었다.
“로난···!”
“나 배고파. 밥 줘.”
어린 로난이 뻔뻔스레 말했다. 까칠한 눈매는 예전 그대로였다. 손을 뻗은 이릴이 동생의 뺨을 살짝 잡아당겼다. 말랑한 볼살이 쭉 늘어났다.
“머 해?”
“말랑말랑해···지, 진짜 로난이네?”
“누나 오늘 좀 이상해. 그럼 내가 진짜지. 가짜겠어?”
의미 모를 행동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한 번 이릴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훌쩍거리던 그녀가 동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 동생! 이게 얼마 만이야!”
“우왓···!”
로난이 당혹성을 흘렸다. 하도 세게 끌어안아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누나의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을 본 그가 입을 뗐다.
“···뭐 힘든 일이라도 있었어?”
“으응. 모르겠어. 그랬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그랬구나.”
로난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작았지만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가 말했다.
“이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우리 계속 같이 있자.”
“으응, 계속 같이?”
“응. 여기 내 친구들도 있어.”
포옹을 마친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뜬 이릴이 감탄성을 흘렸다. 세 명의 소년소녀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린 마르야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릴 언니, 안녕!”
“아, 안녕하세요 누나.”
“···그대는 오늘도 아름답군.”
이어서 어린 아셀과 슐리펜이 차례대로 인사를 건넸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이릴이 네 사람을 한 번에 끌어안았다.
“우왓!”
“이, 이게 무슨 짓이오···!”
꼬마들은 저마다의 반응을 보였다. 눈을 감은 이릴이 소리 내어 웃었다.
‘행복해.’
따사로운 햇살과 사랑스러운 동생. 그리고 동생의 친구들.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든 그녀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햇다.
“그래 얘들아. 우리 밥 먹으러 갈까? 누나가 감자 스튜를 진짜 잘 하거든.”
뭔가 잊어버린 것도 같았지만 이제 아무렴 상관 없었다. 그녀는 어느새 로난과 눈높이가 엇비슷하던 소녀 시절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같은 시각, 전장 한복판에 앉아 있던 아데샨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데샨.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