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04)
307. 지키겠습니다. >
#307
“내가···하지.”
슐리펜이 말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아데샨이 석상처럼 굳었다. 창백한 성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던 폭풍은 어느새 사그라져 있었다.
그것은 치열했던 승부가 마침내 결판이 났음을 의미했다. 인격이 교체된 이후 줄곧 냉철함을 유지하던 아데샨이 처음으로 당혹성을 흘렸다.
“당신, 정말 대주교들을 상대로···!”
슐리펜은 대답하는 대신 무언가 던지는 손짓을 해 보였다. 툭.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구체 하나가 아데샨의 발치에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처치한 대주교 르탄시에의 머리통이었다.
절단면이 깔끔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분노와 경악이 뒤섞인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뒤에 있던 구원자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나도 아는 얼굴인데.”
수백 년 전부터 악명을 떨쳐온 마녀 르탄시에. 네뷸라 클라지에의 대주교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였다. 굵직한 침을 삼킨 아데샨이 말을 이었다.
“···정말로 다 죽였군. 다섯 명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현장에는 없었지만 탑의 정상에서 전해져 오던 기운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별빛의 힘을 받은 다섯 대주교는 분명 개개인이 슐리펜을 뛰어넘는 강자였다.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결과였다. 피투성이를 넘어 걸어 다니는 넝마가 되어 버린 슐리펜의 행색이 끔찍했던 전투를 방증하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가 아데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거나···어서 이리 주십시오.”
슐리펜의 시선은 구원자의 피가 담긴 병에 머물러 있었다. 가까스로 침착을 되찾은 아데샨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상처를 치료하는게 우선이다.”
“이릴 양은···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건 맞지.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스치기만 해도 죽을 거야.”
아데샨이 쏘아붙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 슐리펜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당장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억지로라도 쉬게 해야 했다. 아데샨이 정신 장악을 시도하려던 찰나였다. 쉬릭! 그녀의 뒤쪽에서 불어온 강한 바람이 손에 들려 있던 병을 날려 버렸다.
“앗!”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병은 정확히 슐리펜의 손아귀에 안착했다.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바람이었다. 병을 안주머니에 넣은 슐리펜이 입을 뗐다.
“나를···믿어 주시오.”
“고집은···! 어차피 일정 범위 내로 들어가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바보가 되어 버릴 거다. 평생 가질 수 없는, 거짓된 행복에 빠져서.”
“···아니, 그렇지 않소. 그건 장담하지.”
이해 못할 말에 아데샨이 눈살을 찌푸렸다. 슐리펜은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다시 이릴에게 시선을 맞췄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녀는 아직도 다가오는 추격대를 죽지 않을 정도로 썰어 대고 있었다. 나부끼는 은백색 머리가 아름다웠다. 이릴을 응시하던 슐리펜이 옅게 미소 지었다.
“나는 이미···충분히 행복하니까.”
“···뭣이?”
아데샨이 헛웃음을 쳤다. 터무니없는 억지였다. 하지만 슐리펜의 눈동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결의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잠시 벙쪄 있던 차였다. 쾅! 빈틈을 타 등을 돌린 슐리펜이 땅을 박차며 뛰쳐나갔다.
“자, 잠깐!”
아데샨이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저런 기력이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빠르게 멀어지는 슐리펜을 지켜보던 그녀가 혀를 찼다.
“젠장.”
이제는 말리고 싶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아데샨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릴과 그의 거리를 가늠했다. 천 걸음···칠백 걸음···.
“뭐?”
불현듯 간격을 재던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슐리펜은 이릴의 능력이 작용하는 범위 내에 들어갔음에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자이파나 로르혼, 오르세도 이겨내지 못한 환각을 그가 견뎌내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릴의 근처까지 도달한 그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겁에 질린 이릴이 그를 검 끝으로 겨누었다.
“또, 또 누가 온 거죠?! 왜 자꾸 저희를 괴롭히시는 거에요···?”
“···이릴 양.”
행색이 꼭 겁에 질린 고양이 같았다. 슐리펜이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순간이었다. 이릴의 팔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참격의 폭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슐리펜!!”
아데샨이 외쳤다. 동시에 슐리펜의 주변에 있던 추적자 오십 명가량이 일제히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촤아악! 드래곤들이 마법으로 설치한 바위 벽들이 손질된 당근처럼 무너져 내렸다.
검을 휘두르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다. 이릴에게 이런 무재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슐리펜으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잠시 굳어 있던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이릴의 검은 자신에게 닿지 않았다. 슐리펜은 더 다가가는 대신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조심스레 검을 뽑아든 그가 칼자루를 놓았다. 카앙···! 페일 로드가 바닥에 떨어졌다.
“무슨···!”
“···지금, 가겠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아데샨과 구원자가 헛숨을 들이켰다. 무방비 상태가 된 슐리펜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하아···하아아···.”
이릴이 거칠어진 호흡을 골랐다. 빗자루를 쥐고 있는 그녀의 발치에는 수백 명의 남녀가 널브러져 있었다.
“왜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거에요···?”
이릴이 중얼거렸다. 이 괴한들은 갑자기 님버튼에 들이닥쳐서 꼬마들과 자신을 떼어 놓으려고 했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몸이 약한지 빗자루질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게 다행이었다.
“누나. 괜찮아?”
어린 로난이 물었다. 소매로 땀을 닦아낸 이릴이 고개를 돌렸다. 동생과 그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인 채 떨고 있었다.
“언니···무, 무서워요.”
어린 마르야가 울먹거렸다. 애써 힘든 티를 떨쳐낸 이릴이 싱긋 미소지었다.
“이제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왜 저 사람들이 찾아온 거야?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로난이 투덜거렸다. 더는 침입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이릴이 등을 돌렸다. 그녀가 꼬마들을 한 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지켜줄 테니까.”
이릴이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났다. 잠깐이었지만 그녀에게도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아버지가 떠나고, 어머니마저 병으로 돌아가셨을 무렵이었다. 아무리 님버튼이 살기 좋은 동네라고는 해도 어린 소녀 혼자 갓난애를 기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야! 이 고아년아. 또 어디를 그렇게 빨빨거리면서 가냐?
– 저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다니 상심이 크겠구나. 혹시 재산 관리를 내가 좀 도와줘도 될까? 재산이 뭔지는 알고 있니?
– 너는 정말 예쁘구나. 장래가 기대돼. 으흐흐···아저씨랑 같이 가지 않을래?
게다가 당시에는 그녀의 주변에 악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 아직 소망을 구현 화하는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능력이 각성하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선인이 되기까지 걸린 그 몇 년 동안 이릴은 닥쳐오는 시련을 모두 자신의 힘으로 견뎌 내야 했다. 몇 번은 정말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동생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바르게 자라서 다행이야.’
불현듯 로난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앞이 부옇게 물들었다.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의젓하게 자라 줘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어린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나, 울어?”
“아니···괜찮아.”
이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쓰러진 괴한들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망가졌던 집도 원래대로 복구되고 있었다.
“아하하···.”
다시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여기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어떤 고난이든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쿵쿵쿵.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뭣···!”
이릴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문 밖에 서 있었다. 다시 빗자루를 집어든 그녀가 현관을 겨누었다.
생소한, 하지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릴 양. 깨어나셔야 합니다.”
****
“가까이···오지 마.”
“···이릴 양.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슐리펜이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의 간격은 어느새 완전히 좁혀져 있었다. 이릴은 그의 바로 앞에서 꿈에 빠진 채 휘청거리고 있었다.
“내 행복을···방해하지 마···.”
이릴이 칼자루를 움켜쥔 채 중얼거렸다. 설명하지 않아도 뭘 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세뇌에서 말미암은 행복한 환상이 그녀가 겪은 고난을 덧씌우고 있었다.
“지금 보고 계신 건···쿨럭, 전부 거짓입니다. 힘들어도···진실을 보셔야 합니다.”
“아니야···나는 아이들을···여기 님버튼에서···.”
이릴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고통스러웠지만 깨워야 했다. 슐리펜이 허리춤에 달아 놓은 병을 천천히 꺼내들었다.
“자, 입을···.”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는 구원자의 피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는 보석을 다루듯 세심한 동작으로 이릴의 입가에 병을 가져다 댔다.
“싫어···싫어···.”
이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자루를 움켜쥔 손이 당장에라도 쏘아져 나올 것 같았다. 슐리펜은 억지로 힘을 쓰지 않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입술을 벌렸다.
“···맙소사.”
지켜보던 아데샨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대번에 기절하거나 미쳐버릴 만큼 강렬한 살기를 온몸에서 발산하고 있었다.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너무 긴장되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지금 이릴이 조금만 심사가 뒤틀려도 슐리펜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릴 터였다.
그때 슐리펜이 손에 들린 병을 조심스레 기울였다. 병목을 타고 미끄러진 구원자의 피가 이릴의 입으로 들어갔다. 꿀꺽. 얼떨결에 한 모금을 삼킨 그녀가 맹렬한 기침을 시작했다.
“콜록! 카악! 카아아악!”
“이, 이릴 양···!”
슐리펜의 얼굴에 당혹이 깃들었다. 내장까지 게워낼 것처럼 깊숙한 기침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린 채 이릴을 부축했다. 그렇게 영원처럼 느껴지던 몇 초가 흐른 시점이었다.
“···아?”
기침하던 이릴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은 흐릿한 시야 속에 님버튼과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눈을 두어 번 비빈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슈, 슐리펜 님···?!”
낯익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기억이 드문드문 끊어져 있었다. 상처투성이인 슐리펜의 어깨 뒤편으로는 완전히 달라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호화롭던 방은 피비린내와 연기가 자욱한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상한 티아라를 머리에 쓴 이후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이를 악물고 있던 슐리펜의 뺨을 타고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괘, 괜찮으세요? 눈물이···.”
“···윽.”
슐리펜은 대답하는 대신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흘러내린 물방울이 눌어붙은 핏자국을 녹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이릴을 살펴본 그가 입을 뗐다.
“다행입니다….”
정신을 차린 이릴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납치당했던 순간부터 겪어온 고통이 가라앉고 있었다. 반드시 이릴을 지키겠다 로난과 맹세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한계에 다다른 정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을 마저 짜낸 슐리펜이 별안간 이릴의 두 손을 맞잡았다.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메인 목소리가 새나왔다.
“사랑···합니다···.”
“······네에?!”
이릴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슐리펜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정신이 혼미하게 될 지경까지 빠져나간 피가 그가 여태껏 참아온 말을 하게 돕고 있었다.
“보잘것 없는 생이지만···평생···목숨을 바쳐···당신을 지키겠습니다.”
“그,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저는 평민이고 슐리펜 님은···아니, 그보다 상처가···!”
이릴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적어도 이런 장소와 상황에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신이 몽롱한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눈앞의 슐리펜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손을 가까스로 떼어낸 이릴이 슐리펜의 상처를 돌보려던 차였다. 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디딘 그가 쓰러지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것도 제법 강하게.
“아···.”
이릴의 눈이 커졌다. 맞닿은 품 너머로 온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심장 박동을 제외한 모든 소리가 차단된 세상 속에서, 슐리펜이 쥐어짜내듯 읊조렸다.
“부디 저와···결혼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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