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07)
310. 아버지 >
#310
“아들. 일어나라.”
“으···으으윽···.”
로난이 누운 채로 신음을 흘렸다. 물속에서 나온 것처럼 온몸이 찌뿌둥했다. 겨우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구원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씨, 깜짝이야···뭐에요?”
“뭐긴 뭐야. 소풍 가기로 한 걸 잊어버린 게냐?”
로난이 질색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투박한 나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흙과 풀, 들꽃의 향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여기는···?”
창밖을 바라본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향 님버튼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양 떼가 노니는 언덕들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뭘 하고 있었더라?’
굽이치는 강물 위에서는 마을 꼬마들이 뗏목을 띄우며 놀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아들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구원자가 갑자기 등을 돌렸다.
“깼으면 어서 출발하자꾸나. 이릴과 네 엄마가 얼마나 나를 보채던지···남아 있는 시간도 얼마 없어서 곤란해.”
“네?”
그는 대꾸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시간이 없다니,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산책을 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왜 저런담.”
혼잣말한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키가 반 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대충 걸쳐 입은 뒤 거실로 나가자 엄마와 이릴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두 모녀는 이미 외출할 준비를 마친 채였다. 이제 열 살배기가 되었을까 싶은 이릴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로난! 좋은 아침!”
“어머, 우리 왕자님이 일어났구나. 아빠는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 슬슬 갈까?”
“뭐, 좋아요.”
로난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쪼르르 달려온 이릴이 그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로난! 누나만 따라와! 이번에는 절대로 길 안 잃어버릴 거니까!”
“그래. 그래···.”
집을 나서자 청량한 햇살이 쏟아졌다. 구원자는 가만히 서서 푸른 하늘을 감상하고 있었다. 문 닫히는 소리를 들은 그가 가족을 돌아보았다.
“다들 나왔구나. 그럼 오늘의 목적지를 말해주지. 바로···.”
“오늘은 멀리 가요! 더 멀리!”
“얘, 이릴. 아빠가 말씀하시는 중이잖니.”
이릴은 폴짝폴짝 뛰면서 구원자를 재촉했다. 어머니가 눈웃음치며 말렸지만 한창 놀 때의 소녀를 제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스한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던 구원자가 손을 뻗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저 언덕 위까지 갈까? 가까워 보여도 한참은 가야 한단다.”
그의 검지는 좀 떨어진 곳에 자리한 언덕을 가리키고 있었다. 꼭대기에 커다란 참나무가 자라 있어서 멀리서도 잘 보였다. 이릴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와아! 좋아요!”
“로난도 괜찮니?”
“저는 뭐, 어디든 좋아요.”
로난이 긍정했다. 사실 그는 가족과 함께라면 어디를 가던 즐거웠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구원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렇단다.”
그렇게 짧은 여행이 시작되었다. 로난은 가족과 함께 고향의 전경을 즐기며 길을 거닐었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주민들과 인사를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배낭을 멘 아셀과 마주친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어라, 아셀. 어디 가냐?”
“으, 으응···어머니가 마법을 제대로 배워 볼 생각이 없냐 하셔서···제도에 한번 가 보려고.”
“오오. 마법이라. 그래, 어디 한번 잘 해봐.”
로난이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셀은 로난의 가족에게 공손한 인사를 남긴 뒤 마차 타는 곳으로 향했다. 평생 겁쟁이처럼 살 줄 알았는데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다행이었다. 문득, 갑작스러운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데 내가 쟤를 만난 적이 있던가?’
분명히 인사 한 번 안 나누던 사이 같은데 뭐가 어떻게 된지 알 수 없었다. 어깨를 한번 으쓱인 로난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솔길 양옆으로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엇차. 이놈들도 같이 구워 먹자꾸나.”
낚시에 성공한 구원자가 송어 네 마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직도 퍼덕거리는 것이 아주 싱싱해 보였다. 그들은 님버튼을 싸고도는 강변에서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와아! 아빠 최고!”
이릴이 방긋방긋 웃으며 구원자의 목에 매달렸다. 그 광경을 본 엄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로난의 가족은 막 잡은 송어구이와 함께 도시락을 까먹었다. 하늘과 같은 쪽빛으로 물든 강이 아름다웠다. 식사를 마치고 출발한 지 머지않아 이릴이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우웅···밥 먹으니까 졸려···.”
“나한테 업힐래?”
“아니야아···! 나도 갈 수 있거든!”
이릴이 로난의 손을 뿌리쳤다. 꾸벅꾸벅 조는 걸 보니 얼마 못 버틸 것 같은데, 그래도 누나라고 동생에게 신세를 지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갈 수 있···쿠우우···.”
“에휴.”
고집을 부리던 이릴은 머지않아 자면서 걷는 지경에 이르렀다. 침을 뚝뚝 흘리면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는 것이 신통하다면 신통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한숨을 푹 내쉰 로난이 그녀를 업으려던 차였다. 앞장서던 구원자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내가 옮기마. 엇차.”
“진짜 내가 업어도 되는데.”
로난이 말했지만 그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릴을 한쪽 팔로 안아 든 구원자가 다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엄마가 장난스레 물었다.
“어머, 저도 들어주시면 안 되나요?”
“그럴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원자가 엄마를 안아 들었다. 양팔에 모녀를 들쳐메고 올라가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엄마는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그의 어깨를 탁탁 때렸다.
“꺄아아악! 다, 당신도 참. 사람들이 다 보는데···!”
“뭐 어때.”
구원자가 툭 내뱉었다. 엄마는 부끄러워하기는 했지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구원자는 그 상태를 유지한 채 한참을 더 걸었다.
곳곳을 구경하고 쉬어 가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점점 서늘해지는 바람에서는 양털 냄새가 났다. 석양을 등진 마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쿠우···쿠우우···.”
“당신 정말···여기서는 안 돼요···.”
이릴과 엄마는 참나무에 기댄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로난과 구원자만 나란히 서서 타오르는 하늘을 감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돌아본 구원자가 픽 웃었다.
“잘도 자는구나. 확실히 이릴은 네 엄마를 닮았어.”
“그러게요. 머리카락 색만 빼고.”
“그래, 오늘 하루는 어땠느냐 로난. 즐거웠니?”
“뭐···나름대로요.”
로난이 주억거렸다. 티는 별로 내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던 구원자가 다시 석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이구나.”
그리고 한참이나 침묵이 맴돌았다. 언제나 느끼는 건데 아버지와 단 둘이 있을 때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게 내 소원이었단다.”
“네?”
“가족과 다함께 나들이를 오는 것 말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이런 것이 그 무시무시한 네뷸라 클라지에를 창시한 작자의 꿈이라니.”
갑작스러운 구원자의 말에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우수에 젖어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 그게 뭐지?
“로난. 네게는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고 싶구나.”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나는 정말로 글러먹은 사람이었다. 이릴도 그렇지만 네게는 특히나 더 막중한 짐을 지워줬어.더 많은 걸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싶었단다. 다른 아버지들처럼.”
“그러니까 그게 뭔….”
“게다가 지금,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에서마저도 이기심을 버리지 못했지.”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구원자가 멋대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인 만큼 원래는 더 멋진 곳에 데려가 주고 싶었단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 동안 보아온 풍경 중에는 말문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것이 수두룩했으니까···그럼에도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 나들이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별안간 구원자가 말꼬리를 끌었다. 시선을 돌린 그가 로난과 눈을 맞췄다. 로난은 어느새 그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커져 있었다.
“뭐랄까···가족이 잠시나마 다 함께 있었던 곳보다 좋은 장소가 떠오르지 않더구나.”
구원자가 말을 맺었다. 불현듯 로난의 머릿속에 벼락 한 줄기가 내리쳤다. 잊고 있던 기억이 단번에 돌아왔다.
입자로 화하며 소멸하는 거인들. 무너져 내리는 하늘과 방어막을 일으키는 구원자의 뒷모습. 잠시 이마를 짚고 비틀거리던 로난이 구원자를 돌아보았다.
“잠깐···.”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어느새 이릴과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고향의 풍경이 먼 곳부터 바스라지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에 로난이 당혹성을 흘렸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괜찮단다. 이번 위기는 어떻게든 넘겼으니까.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건 또 무슨 개똥 같은 소리에요 아버지. 마지막이라니?”
로난이 흥분하며 물었다. 아버지라는 말을 들은 구원자가 갑자기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거친 숨을 들이내쉬던 그의 입에서 물기 섞인 목소리가 새나왔다.
“아버지라. 하하하···.”
구원자가 웃었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곱씹어 중얼거리던 그가 얼굴을 가리던 손을 뗐다.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 아래로 물 흐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로난의 뺨에 손을 얹은 구원자가 입을 열었다.
“언제 들어도, 참 좋은 말이구나.”
그는 처음 유리관에서 만났을 때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로난이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희미해지던 고향의 풍경이 완전히 백지로 변했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로난이 읊조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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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로난이 눈을 떴다. 잠시 암전되었던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새하얗게 물이 든 하늘을 마주한 그가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미간을 구겼다. 황량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누워서 신음하는 연합군 병사들과 산산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구원자의 방어막이었다.
“으아···누, 눈이···!”
“끄윽···.”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감싼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망자는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결코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방어막 너머의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울창한 숲도, 산맥도 모조리 사라진 자리에는 흙먼지 섞인 바람만이 불어오고 있었다.
【크으윽···크르르르···!】
나바르도제를 비롯한 드래곤들이 땅에 추락한 채 신음하고 있었다. 강렬한 화상이 그들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사람들과는 달리 대부분이 하늘을 날고 있던 탓이었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로난이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서 진상을 파악해야 했다. 불현듯 로난의 시야 한구석에 익숙한 뒷모습이 포착되었다. 구원자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하늘을 향해 양팔을 쳐들고 있는 모습이 썩 당당했다.
“아버지.”
로난이 그를 불렀으나 구원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다가간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구원자는 그 자세로 굳어버린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아버지?”
눈도 떠져 있어서 아직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손을 가져다댄 자리에서는 더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죽음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로난의 가슴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불현듯,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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