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11)
314. 파도와 해방, 고해. >
#314
푸른 피가 모래톱을 적셨다. 머리 없는 아벨의 몸뚱어리가 천천히 기울었다. 그가 쓰러짐과 동시에 로난의 손에서 칼자루가 떨어졌다.
푹. 첨단부터 떨어진 라만차가 백사장 깊숙이 박혔다. 아벨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을 반복하던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후우···염병···.”
그간 누적된 피로가 단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저주는 사라졌다지만 이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별안간 머릿속에서 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난. 정신 차려.] “늦었어.”로난이 낄낄거렸다. 이미 그의 상태는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빠져 있었다. 안개 낀 듯 부얘진 시야 속에서는 붉은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지치네.”
털썩. 지평선을 응시하던 로난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잔잔한 물결이 다리를 적시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너···죽는 거야?] “아마도.”[안 돼···그건 안 돼.]
로난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담담하던 린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잔뜩 섞여 있었다. 계집애, 성검 주제에 질질 짤 게 뭐야.
“고마웠다 린. 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그런 말 하지 마. 분명 뭔가 방법이···!]
“없어. 너도 알잖아.”
로난이 픽 웃었다. 가능하다면야 당연히 살고 싶었다. 그는 누구보다 ‘희생’이나 ‘순직’ 같은 말을 싫어했으니까. 영웅이 되어 위령비에 이름을 새기는 것보다는 살아서 돌아가는 겁쟁이가 나았다.
하지만 막상 본인에게 이런 일이 닥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완전히 세상을 구하고 산화하는, 전설에나 나오는 영웅이 아닌가.
“하여튼 재수가 없으려니까···.”
로난이 투덜거렸다. 물론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입은 웃고 있었다.
자신은 여기서 죽겠지만 그가 지켜낸 것들은 한참 동안 건재할 터였다. 피로감을 견디지 못한 로난이 막 드러누우려던 차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졌군.』
“무슨···!”
한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쥔 로난이 몸을 돌렸다. 덩그러니 놓인 아벨의 머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아직 안 죽었냐?”
이건 위험했다. 로난이 검 끝으로 아벨을 겨누었다.
한계에 도달한 팔이 덜덜 떨려오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벽히 처치해야 했다. 다시 아벨의 입이 벌어졌다.
『그만둬라. 네게 목이 잘린 순간 이미 근원과의 연결이 끊어졌어. 나는 곧 소멸한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뭐, 사실은 이미 소멸하는 중이지. 나를 잘 봐라.』
그 말을 들은 로난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흐릿하지만 아벨의 머리통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근원을 빼앗긴 거인들처럼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아벨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은 로난이 검을 내렸다.
“후우우···빌어먹을. 기절하는 줄 알았네.”
간이 떨어지다 못해 산산이 조각나는 줄 알았다. 멋지게 폼은 잡았지만 지금의 로난에게는 부활한 아벨을 상대할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봐. 뭐 하나만 물어보자.』
“엉?”
『내가 아니라 형님의 방법대로 했더라면, 사람들은 언젠가 서로를 죽이지 않게 되었을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어차피 저쪽도 다 죽어가는 신세에, 이상한 꿍꿍이를 꾸미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모를 일이지. 그런데 아마 달라지는 건 별로 없었을 거야.”
『그렇다면 왜 우리를 둘 다 말린 거지? 형님의 눈을 감겨줄 때 기억을 봤다. 너는 내가 아니라 형님의 계획에도 반대했더군.』
아벨이 의문 가득한 투로 물었다. 비뚤어졌으나 공리를 추구하는 그로써는 구원자나 자신 둘 중 누구의 사상에도 동조하지 않는 로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딱! 갑자기 팔을 뻗은 로난이 칼등으로 아벨의 이마를 내리쳤다.
『윽! 무슨 짓을···.』
“얌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하여튼 아버지도 그렇고 니네 형제는 오지랖이 너무 심해.”
『뭣이?』
“사람들은 등신이 아니야. 물론 등신도 많지만 멀쩡한 사람이 훨씬 더 많지. 댁들이 일일이 똥을 닦아주지 않았어도 알아서 잘해냈을 거라고.”
로난이 말했다. 방금 머리를 잘라낸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하유테 이후로 처음이었다. 얼굴을 와락 구긴 아벨이 항변하듯 외쳤다.
『어떻게 과거의 기억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핵전쟁을, 낙진을 피하고자 마련된 방공호를, 다른 별마저 망가뜨리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 다인하르를 보았다! 그런 걸 만들어내는 존재들에게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에이 씨발, 깜짝이야. 조용히 안 해?”
딱! 로난이 다시 칼등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머리만 남은 아벨은 분통을 터트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크윽···!』
“닥치고 그냥 믿어 봐. 아버지와 너는 방관자의 태도를 보였어야 했어. 훈수를 두고 싶어도 조언만 했어야지 말을 직접 움직이려 하니까 문제였던 거라고.”
『터무니없는 방종이다. 도대체 너는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거지?』
아벨은 이제 진심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구원자의 피를 받았으니 불멸자의 관점에서도 사고가 가능할 터인데. 피를 한 번 게워낸 로난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내가 변했으니까.”
『뭣이?』
“나는 원래 등신 중의 등신이었어. 하지만 어떤 계기로 삶을 한 번 더 살게 되고, 마음을 고쳐먹었지.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정말로 난 많이 달라졌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로난이 큭큭 웃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버러지의 극치와도 같은 삶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때 알았어. 사람은 계기만 있으면 달라질 수 있다고. 나는 조금 특이한 경우였지만, 대부분은 나보다 심성이 바르니까 그런 거창한 사건 없이도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야.”
『···고작 그런 이유였나?』
“고작이라 하지 마 인마. 당장 네가 나한테 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예리한 질문에 아벨이 입을 다물었다. 누가 뭐라건 결과는 이미 나와 있었다.
내가 변했기 때문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그 말을 곱씹던 아벨이 헛웃음을 쳤다. 어색한 적막이 한참이나 감돌던 와중이었다.
『···살아날 방법을 알려 주겠다.』
“뭐?”
꾸벅꾸벅 졸던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어느새 머리의 3할 정도가 사라진 아벨이 말을 이었다.
『내 인격은 곧 사라지겠지만 근원의 힘은 아직 건재하다. 내 가슴을 찢고 심장을 취해라. 그렇다면 너는 나와 같은 존재가 되어 힘과 영원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벨은 눈동자를 굴려 널브러진 자신의 몸뚱어리를 가리켰다.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늦은 노망이라도 났냐? 갑자기 그런 걸 왜 말해주는 거야?’
『글쎄, 어째서일까···.』
아벨이 말꼬리를 끌었다.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린 그가 픽 웃었다.
『네 말대로, 노망이 들었나 보지.』
“기가 막히는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로난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주변에서 자꾸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었다.
‘근원에 갇혀 있는 영혼들이겠지.’
아벨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심장 속에는 지금까지 거인들이 수집해 온 영혼들이 모조리 들어 있을 터였다. 목숨을 건지는 것으로 모자라 그 힘을 전부 갖게 된다니, 다시는 없을 기연이었다.
“···심장이라 이거지.”
어느새 시체 앞에 도달한 로난이 자리에 멈춰 섰다. 더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 그가 검을 내질렀다.
푹! 칼끝이 아벨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다만 그것은 가르기 위해서가 아닌, 찔러서 터트리기 위한 동작이었다. 칼날이 근원을 관통한 것을 감지한 아벨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네, 네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이대로라면 근원은 파괴되고 만다.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검을 비틀었다. 근원이 완전히 파괴됨과 동시에 아벨의 몸뚱어리가 빛으로 산화했다.
콰아아아아! 동시에 도깨비불처럼 보이는 빛 덩어리들이 그의 심장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족히 수십억 개는 되어 보이는 것이 감히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로난이 감탄하듯 휘파람을 불었다.
“장관이군.”
『어째서···!』
아벨이 당혹성을 흘렸다. 해방된 영혼들이 별 가득한 밤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될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자기네들의 천국으로 가는 거겠지. 머나먼 우주 어딘가에 있는.
어쩐지 환호성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영혼의 수는 눈에 보이는 별만큼이나 많아서 전부 사라지는 걸 보기에는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이제는 코 아랫부분만 남은 아벨이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것···너는 이제 살아날 수 없다. 유일한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리다니.』
“상관없어. 저런 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니까···.”
풀썩. 불현듯 하늘을 올려 보던 로난이 고꾸라졌다. 익숙한 감각이 몸을 장악하고 있었다. 내려앉는 어둠, 하나둘씩 차단되는 오감. 죽음이 그에게 입을 맞추려 하고 있었다.
“···젠장, 호구 짓만 하다 가는구만.”
기왕 죽을 거면 하늘을 보며 죽고 싶었다. 로난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몸을 뒤집었다. 전생과는 달리 아득한 별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가 지켜낸 세상이었다. 더는 바람과 파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모성에 초점을 맞춘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래도···즐거웠다.”
로난이 읊조렸다. 첫 번째 삶과 마찬가지로 아직 못 이룬 것이 잔뜩 있었지만, 이상하게 후회가 남지 않았다.
머지않아 침묵이 내려앉았다. 의아함을 느낀 아벨이 그를 불렀다.
『이봐, 로난.』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상황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입만 덩그러니 남은 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네놈은 정말 형을 많이 닮았어.』
실로 영웅적인 최후였다. 이제는 그가 떠날 차례였다. 마지막이라 그런가, 주마등 비슷한 것이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것은 역시나 카인의 얼굴이었다.
『형님···.』
아벨이 입을 뗐다.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차디찬 고향의 대지를 카인과 함께 걷고 있었다.
『알고 있었소. 나는···형님의 동생도···무엇도 아니었지···.』
뒤늦은 고해가 파도소리에 뒤섞였다. 아벨은 자신이 카인의 친형제가 아니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형에 대한 반발심을 품기 시작했던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그런데도 당신은···언제나 내 손을 잡아 주었소···.』
하지만 카인은 늘 아벨의 편을 들어 주었다. 잔인한 행보에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달라질 수 있다며 하나뿐인 동생을 격려해 주었다.
아벨은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둘은 언제까지고 우애 좋은 형제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본인이 무엇을 지켰어야 했는지 알 것 같았지만, 이미 끝은 다가와 있었다.
『형···.』
아벨이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흘릴 눈이 사라졌다는 게 슬플 따름이었다. 빛으로 분해되어 가는 입술이 마지막 말을 읊조렸다.
『내가 미안해.』
그것이 끝이었다. 마지막 남은 빛의 입자가 밤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어느덧 밀물을 맞이한 바다가 두 사람이 있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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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로난이 눈을 떴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별 가득한 밤하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통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군···드디어 내가 죽은 건가.”
상황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절대로 나을 리가 없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던 몸이 완벽하게 나아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검도 그대로 있었다. 누워 있던 그가 이마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엥?”
문득 바지 주머니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손을 집어넣었다 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고 동그란, 재질을 알 수 없는 구체 하나가 검지와 엄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이게 뭐야, 알?”
기억에 없는 물건이었다. 언제 주머니에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로난이 구체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나 말고도 사람이 있었···”
로난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대장군의 제복을 입은 아데샨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고생 많았다. 상병.”
“대장군님? 잠깐, 옆의 당신은···.”
하지만 그를 진정 당혹케 하는 것은 아데샨의 옆에 있는 사내였다. 오래전에 딱 한 번 봤던, 하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바이디안 산맥에서 만난 신도. 귀가 길쭉한 엘프 사내는 분명 싸움의 여파로 돌이 되어 버렸었다. 사내와 눈이 마주친 로난이 간신히 입을 뗐다.
“···사란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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