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12)
315. 낙조, 일출 >
#315
“···사란테?”
로난이 당혹성을 흘렸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상반신만 남은 그를 업고 네뷸라 클라지에의 간부인 브리기아와 싸우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이에요.”
로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최소한 자신이 죽을 때까지는 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아, 내가 지금 죽었으니 결국은 비슷하게 된 건가? 성큼성큼 걸어나간 그가 사란테의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잘 지냈어요? 확실히 다리가 있는게 보기 좋네. 오필리아의 베개 노릇은 이제 그만 둔 거에요? 아니 잠깐만, 당신이랑 대장군님이 여기 있다는 건···나는 죽은 거 아니었나?”
너무 반가워서 말이 평소보다 많이 나왔다. 이래 봬도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던 동료였으니. 사란테는 아무 말 없이, 인자한 미소만 머금은 채 로난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뒤늦게 위화감을 느낀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보다 초연해졌다고 해야 할까? 엘프나 드래곤 같은 장생종이 그런 행태를 보이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그걸 넘어서는, 설명 못할 신비한 인상이 느껴지고 있었다. 가만히 뒷짐을 지고 있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그 분은 귀관이 아는 사람이 아니다. 상병.”
“네? 그게 무슨···.”
“귀관에게 익숙한 이의 모습을 빌린 것뿐이지.예를 갖춰라.”
영문 모를 소리였다. 그 순간 사란테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무정형의 빛무리로 변모했다.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색채는 이름 모를 행성에서 본 모성과 비슷한 색을 띠었다.
“뭔, 시발…!”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가 뭘 하기도 전이었다. 확 몰려온 빛무리가 로난을 휘감았다.
“······!”
그 순간 경험한 적 없는 기억이 로난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우주와 별의 경계에서, 정체 모를 빛무리는 어떤 거인과 싸우고 있었다. 이제는 아벨과 함께 소멸한 종족. 다른 거인보다 확연하게 큰 덩치를 자랑하는 그의 등에는 무려 여덟 장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이건.”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빛무리와 싸우고 있는 덩치는 틀림없는 거인들의 선왕이었다. 구원자의 마을에 떨어짐으로써 모든 이야기를 시작시킨 존재. 시체에 남아 있던 다양한 상흔은 바로 저 때 새겨진 것이었다.
기억은 거인의 왕이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다시금 모여든 빛무리가 사란테의 형상으로 변했다. 눈앞의 존재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로난이 나지막이 탄성했다.
“···세니엘.”
사란테는 대답하는 대신 빙그레 웃어 보였다.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이후 몇 번이고 들은 적이 있었다. 시간을 초월하여 의지에 깃드는 위대한 넋.
사란테는 바위가 되기 전에 로난의 심장을 가리키며 여기에 세니엘이 깃들었다 말했었다. 그게 왜 지금에서야 나타난 걸까.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속속들이 고개를 치켜드는 의문에 로난이 혼란스러워하던 와중이었다. 아데샨이 입을 뗐다.
“진정해라 상병. 전부 말해줄 테니까.”
“젠장,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설명하지. 우선, 내게 시간을 되돌리는 구슬을 주신 것이 바로 이 분이다.”
“네?”
충격적인 사실에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영원토록 알아내지 못할 비밀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세니엘께서는 거인들로 인해 벌어질 재앙을 예측하고 계셨다. 하지만 거인의 선왕과 싸우면서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해 버렸지. 그래서 남아 있는 힘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구슬을 만드셨고, 별의 멸망을 막을 가능성이 있는 적법자에게, 그러니까 내게 전달해 주셨다.”
“지금 저보고 그걸 믿으라는 거에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첫 번째 삶의 말미에서 우연히 이 구슬을 줍게 됐지. 거인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전쟁터에서….”
아데샨이 끄덕거렸다.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의 이야기였다. 팔다리가 잘린 채 전장을 기어가던 그녀는 주검과 진흙이 뒤섞인 구렁텅이 속에서 구슬을 발견했다.
그녀는 구슬을 삼켰고, 그때부터 거인을 타도하기 위한 삶이 되풀이되기 시작했다. 어폐를 발견한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하지만 대장군님은…아무것도 모르고 계셨잖아요. 거인의 왕은커녕 놈들이 세 마리 외에도 존재한다는 사실도···.”
“나도 사건의 전말은 조금 전에야 전달받았다. 세니엘께서는 내게 구슬을 준 것 외에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셨어. 감히 유추하건대 그럴 힘이 없으셨던 거겠지.”
그 말을 들은 사란테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정곡을 찌른 듯했다. 몹시도 면목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상당히 얄미웠다.
“그럼···저 세니엘이라는 작자의 정체가 정확히 뭐에요? 신?”
“나도 모른다. 도통 말씀해주시지를 않으니. 아마도 비슷한 존재가 아닐까 싶긴 하다만···.”
“거 되게 비싸게 구시네. 알려주면 어디가 좀 덧나나.”
로난이 궁시렁거렸다. 의지나 넋 이딴 두루뭉실한 것 말고 정확한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때, 머리를 긁적거리던 사란테의 몸이 또다시 빛무리의 형상으로 폭발했다.
“뭐, 뭐야?!”
“무슨···!”
로난과 아데샨이 경악했다. 지금까지는 본 적 없는 격한 움직임이었다. 어디선가 성별을 분간할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습니다. 여러분은 자격이 있지요.】
지금까지 들어온 어떤 목소리보다 감미로운 음성이었다. 넓게 흩어진 빛이 주변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곧이어 조금 전에 로난이 겪었던 것처럼, 생소한 기억이 두 사람의 안쪽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다만 이번에는 그 규모가 달랐다. 로난과 아데샨은 불과 몇 초만에 별의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머릿속에 주입당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억 전송의 여파로 어지럼증을 겪던 아데샨이 이마를 짚은 채 중얼거렸다.
“세계의···혼?”
“죽이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정체에 로난 또한 참지 못하고 감탄을 흘렸다. 왜 그토록 거인들을 막고자 분투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워낙에 난해한 존재라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세니엘은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별의 영혼이었다.
“그렇군요. 그래서 저희를···.”
아데샨이 말꼬리를 끌었다. 설마 별이 영혼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마지막 궁금증까지 해소한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와중이었다. 빛무리 어딘가에서 다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아데샨.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아데샨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파아아···소용돌이치던 빛의 입자들이 녹아 내리듯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퇴장에 놀란 로난이 눈을 꿈뻑이던 와중이었다. 입술을 이리저리 비틀던 아데샨이 그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시간이 다 된 모양이군. ”
“무슨 시간이요?”
로난이 질문했다.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로난을 빤히 바라보던 아데샨이 무겁게 입을 뗐다.
“우리가 영영 이별해야 할 시간 말이다. 상병, 나는 이제 사라진다.”
“···예?”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머릿속에 벼락 한 줄기가 내리친 것 같았다.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그가 아데샨에게 물었다.
“그게···무슨 소리에요?”
“말 그대로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귀관은 아직 죽지 않았어. 귀관의 공을 높게 산 세니엘게서 차원을 표류하는 육신을 치료하고 원래의 세상으로 되돌려 주셨거든.”
아데샨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현재 로난의 몸이 의식을 잃은 채로 전장에 누워 있다 말했다. 로난과 눈을 맞춘 그녀가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서 도통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지. 그래서 나는 남아 있는 생명력을 귀관에게 양도하고 소멸할 생각이다.”
“그런···.”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귀관의 여자친구에게는 아무런 지장도 없을 테니까. 미진한 생명력이지만, 귀관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데는 충분할 거야.”
“도대체···도대체 무슨 소리에요? 그렇게 씩씩하게 지휘를 하셔 놓고. 몸을 공유하면서 같이 지내는 거 아니었어요?”
로난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식의 이별은 예상하지 못했다. 쓴웃음을 머금은 아데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나는 온전하지 않았다. 부스러기 같은 사념만이 남아 귀관의 심장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 뿐. 운이 좋아 이번 생의 내 몸을 빌렸지만, 언젠가는 소멸할 운명이었다.”
“그럴 수가.”
충격에 빠진 로난이 탄식했다. 점차 희미해지는 그녀의 몸이 혹시나 하는 희망을 부수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는 것은 분명 바라던 일이었지만, 이런 방식은 원하지 않았다.
별안간 눈앞이 부옇게 물들기 시작했다. 새어나온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런 로난을 바라보던 아데샨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로난 상병. 귀관은 밤을 맞이하기에는 너무 젊어.”
“네…?”
아데샨은 양손으로 로난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굳은살 가득한 손이 까슬거렸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로난과 이마를 맞댔다 .
“나는 세 번씩이나 석양을 보고서도 밤을 맞이하지 못했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원통함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지. 원래대로라면 마지막에도 편히 안식을 취하지 못했겠지만, 귀관이 내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무슨 소원을 이루어 줘요···재단사나 하라고···말도 못 해 줬는데···.”
“상병. 귀관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를 위해 얼마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귀관은, 재단사의 딸로 돌아가는 것보다 멋진 삶이 있다는 것을 내게 알려 주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엄지를 움직여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로난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목이 메여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데샨이 말을 이었다.
“나를 위해 노력해 줘서 고맙다. 세 번째 삶에서 귀관을 만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 나는 이제, 정말로 여한이 없다.”
“···그냥 남아 계시면 안 되는 거에요?”
로난이 겨우겨우 입을 뗐다. 아데샨은 대답하는 대신 로난을 끌어안았다. 품에서 품으로 전해져 오는 온도가 다시금 눈시울을 붉어지게 했다.
“이번 생의 나는 착하고 밝은 아이로 자랐더구나. 원래도 얼굴과 몸매는 쓸만했으니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존재로 거듭난 게지. 그러니 절대로 놓치지 말고 잘해 줘라.”
“젠장, 이럴 때 농담이 나와요?”
“아, 하나 단점도 있군. 나는 이래뵈도 제법 질투가 심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행여나 바람 같은 걸 필 생각은 하지 마라. 그때는 내가···저승에서 귀관을 죽이러 갈 테니까.”
아데샨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형체는 조금 전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투명해져 있었다.
끝내 대답하지 못한 로난이 팔을 들어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 안았다. 마침내 포옹을 마친 아데샨의 입에서 물기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내 말···명심했겠지···로난.”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다시 드러단 아데샨의 얼굴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잿빛 눈동자 아래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 명심할게요.”
“좋아. 바로 그거다. 그럼 마지막으로···.”
갑자기 아데샨이 로난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입술이 맞닿았다. 제법 길고 진했지만, 이번에는 구슬이 넘어오지 않았다.
“읍···!”
로난의 눈이 커졌다. 머지않아 입을 떼어낸 아데샨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그때와 비교해서 전혀 늘지 않았군.”
“···대장군님.”
“여자를 그리 안 울려 봤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아 다행이야. 임자 있는 몸을 괴롭히는 건 여기까지만 하지.”
그녀가 로난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온통 새하얗던 배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의 투명해진 아데샨이 눈썹을 으쓱였다.
“운이 좋군. 마지막까지 귀관을 배웅할 수 있다니.”
“대장···”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말문이 틀어막히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균열이 많아질수록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로난은 직감했다. 지금이 바로 이별의 순간이었다. 전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한 마디뿐이겠지. 남아 있는 기력을 끌어낸 그가 쥐어짜내듯 말했다.
“또 만나요.”
아데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멀어지던 의식이 결국 끊어졌다. 로난의 존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아데샨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잘 가라. 내 첫사랑.”
떠나간 이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머니와 두 오빠,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이 마중을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완전히 투명해진 아데샨이 등을 돌렸다. 이내 눈물을 닦아낸 그녀가, 퇴장한 이들이 가야 할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로난!”
“허어억!”?
누군가의 외침에 놀란 로난이 눈을 떴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지자 밝아오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하늘에 남아 있는 별무리의 배열이 익숙했다. 아무래도 정말 돌아온 모양이었다.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던 로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장군님.’
이별의 순간이 눈앞을 아른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에 깃들어 있던 세니엘도 사라져 버린 지금, 첫 번째 삶과 그를 연결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난생 처음 느끼는 고독이 머리를 치켜들려는 차였다. 갑자기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 살아났다! 로난이 살아났어!”
“아셀…?”
로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셀은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낯익은 면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급 모험 동아리의 친구들을 비롯한 모두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멍청아. 걱정했잖아…!”
로난이 깨어난 것을 확인한 마르야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나왔다. 시타와 브라움은 이미 야생 동물 같은 소리로 통곡하고 있었다.
“뺘욱! 뺘우우우!”
“으허어엉! 허윽, 허어엉!”
“···흥.”
어느새 정신을 차린 슐리펜도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반대로 돌리는 행동으로 자신의 눈물을 감췄다. 그때, 막 몸을 일으키려던 로난 위로 이릴이 달려들었다.
“내 동생! 으아아아앙!”
“누나.”
“이, 이제 괜찮아? 아픈 곳 없어? 네, 네가 잘못될까 봐 누나는···!”
이릴은 로난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운 나머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얼굴을 한 번 쓸어 내린 나비로제가 툭 내뱉었다.
“···살았나.”
“명줄이 질기군. 애송이.”
바로 옆에 있던 자이파가 클클거렸다. 나바르도제와 오르세, 용왕을 비롯한 드래곤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득 로난의 바로 옆에서, 사무치게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머리맡을 지키고 앉아 있는 아데샨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뺨 위로 눈물이 흐른 자국이 선명했다 .
“아데샨···.”
“돌아와서 다행이야.”
아데샨은 말없이 로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전과 다름없는 사근사근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머금어져 있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로난이 입을 뗐다.
“…떠났죠?”
아데샨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더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대장군은 완전히 떠났다. 순응하듯 주억거린 로난이 아데샨을 포옹하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나도. 그, 로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아데샨이 다시 웃었다. 말뜻을 이해한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높아지자, 무참하게 파괴된 황무지와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연합군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저기. 깨어나신 거 아냐?”
“맙소사, 정말로···!”
로난을 본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로난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점 커지는 술렁거림 속에서 그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그···제기랄···.”
병사들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뭐라 한마디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젠장, 연설에는 영 소질이 없는데.
머리를 긁적거리던 그가, 툭 내뱉었다.
“···다들 고생 많았수다.”
“와아아아아아!!!”
사방에서 우레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하늘 높이 집어 던졌다. 쩌렁쩌렁하게 흔들리는 새벽 저편으로, 불그스름한 해가 솟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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