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19)
5. 꿈을 마시는 새(4) feat. 이릴&슐리펜 >
#A5
“주문하신 감자 스튜 2인분 나왔어요!”
이릴이 외쳤다. 그녀의 은백색 머리카락이 제도의 하늘 아래 찰랑거리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온 그녀가 야외 테이블 위에 감자 스튜 두 그릇을 내려놓았다.
“에헤헤, 맛있게 드세요!”
막 끓인 감자 스튜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요리였지만, 손님으로 온 두 사내는 수저 뜰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이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살아 있기 잘했어.”
“제, 제, 제가 정말 이걸 먹어도 될까요?”
갑자기 사내들의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 맺혔다. 그들은 이릴이 운영하는 식당인 ‘님버튼의 밥상’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두 달을 꼬박 대기했다.
소문만 듣고 기다릴 때는 이럴 가치가 있나 싶었지만, 이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따위 의심은 봄을 맞이한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릴이 미소지 었다.
“그럼요. 맛있게 드셔 주시라고 만든 요리인걸요.”
“아아, 이 어찌나 은혜로운지···!”
“꼭 다시 오겠···”
훌쩍거리던 그들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식당 한구석에서 오싹한 살기가 퍼져 나왔다. 뼈마디가 시려오는 감각에 사내들이 굳어 버렸다.
“이, 이건···.”
그들은 동시에 살기의 발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식당 안에서 조각처럼 생긴 청년 한 명이 앞치마를 두른 채 감자를 깎고 있었다. 슐리펜은 감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전음을 보냈다.
[입은 음식을 넣으라고 있는 기관이오.]낮게 깔린 목소리가 위압적이었다. 제복 대신 앞치마를 두른 그의 손에는 작은 식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 옆에는 어제 그랑시아 영지에서 공수해온 햇감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슐리펜이 칼자루를 쥐자 검신이 바람의 형태로 화하며 사라졌다. 촥! 감자 수백 개의 껍질이 단번에 벗겨졌다. 고개를 든 그가 사내들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식당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허극.”사내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손에서 떨어진 숟가락이 스튜 안으로 퐁당 빠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들은 사흘은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스튜를 퍼먹기 시작했다.
“자, 잘 먹겠습니다!”
“우아, 배가 많이 고셨나 봐요. 천천히 드세요.”
슐리펜은 그제야 살기를 거두었다. 몇 차례 서빙을 더 한 이릴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암청색 머리카락의 중년인이 막 식사를 마치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최고급 실크로 만들어진 손수건에는 드래곤을 밟고 있는 기사의 모습이 금실로 자수되어 있었다. 그랑시아 가를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텅 빈 그릇을 본 이릴이 두 손을 맞대며 감탄했다.
“와아, 깨끗하게 비우셨네요. 입맛에 맞으세요 공작님?”
“어허허, 루스탕 물소의 안심보다 맛이 좋구나. 그리고 아버님이라 부르라니까.”
중년인이 껄껄 웃었다. 현 그랑시아의 가주이자 슐리펜의 아버지인 요제프 시니반 데 그랑시아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슐리펜이 미간을 좁혔다.
“가주님. 품위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감자 깎는데 오러를 쓰는 네게 듣고 싶지는 않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페일 로드를 너무 일찍 넘겼어.”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니 이릴 양이 힘들어하잖습니까. 벌써 다섯 그릇째인 거,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 그리고 이걸로 여섯 그릇째가 되겠지. 아가야, 혹시 한 그릇만 더 가능하겠느냐? 열 배, 아니 백 배로 값을 지불하마.”
그리 말한 요제프가 다시 주책 맞은 웃음을 흘렸다. 한 마리의 수사자를 연상케 하던 카리스마는 감자 스튜에 빠져 익사한 지 오래였다. 한때 가문의 일원들과 함께 슐리펜의 결혼을 반대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요제프가 망가진 것은 일 년쯤 전에 그랑시아 저택에 방문한 이릴을 만난 뒤부터였다.
사흘에 걸친 가문과 영지 소개가 끝날 무렵, 요제프를 비롯한 그랑시아 가의 일원들은 모두 이릴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버렸다. 기강을 잡을 목적으로 방문한 로난이 당황할 정도였으니 말을 다 한 셈이었다. 추가 주문을 받은 이릴이 흔쾌히 끄덕였다.
“그럼요!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이릴 양.”
묵묵히 감자를 깎던 슐리펜이 입술을 비틀었다. 솔직히 그는 이릴이 땀을 흘려 가며 일을 하는 것이 영 탐탁치 않았다. 물론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생각이었지만.
주방 깊숙이 들어간 이릴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손수건을 내려놓은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참 좋은 아이야. 너처럼 무뚝뚝한 놈이 어떻게 저런 여자를 데려왔는지가 볼 때마다 의문스럽구나.”
“그렇습니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내가 너를 잘 가르친 것 같구나. 그래, 청혼한 지도 이제 2년이 다 되어가는데 결혼식은 언제 할 생각이냐. ”
“자이파 님을 꺾고, 제국제일검의 자리에 오른 뒤입니다.”
슐리펜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잠시 침묵하던 요제프가 눈썹을 으쓱였다.
“그게 정확히 언제지?”
“올해 여름입니다.”
“검성 결정전이 벌어지는 시기군.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느냐?”
“예.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검사가 되지 않고서는 이릴 양을 지킬 자격이 없습니다.”
정상을 입에 담았음에도 암청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고고했다. 요제프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부디 정진하거라. 저 아이는 은근히 똑 부러지는 면이 있어서 너와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까지는 나를 아버님이라 부르지 않을 듯 하니까.”
“한심한 이유군요.”
“부정하지는 않으마. 하지만 이 또한 네게 들을 말은 아니지. 교제를 시작한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 팔짱 끼는 것도 두려워하는 네게 말이다.”
“윽···!”
슐리펜의 얼굴이 붉어졌다. 식칼을 내려놓은 그가 띄엄띄엄 말했다.
“그게···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너는 천재다 아들아. 하지만 검에 재능이 치중된 나머지 사랑을 주고받는 분야에서만큼은 장애를 앓고 있는 게 아니라 걱정된다. 너는 나를 많이 닮았지만, 그 부분에서만큼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더구나.”
요제프가 혀를 끌끌 찼다. 보수적인 가풍 속에서 자란 그가 보기에도 슐리펜과 이릴의 연애는 지나치게 유아스러운 면이 있었다.
비밀 요원들의 보고서를 받아들었을 때는 그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육 개월 동안 이루어진 애정 행각 중, 가장 과감했던 것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거라니. 한숨을 푹 내쉰 그가 말을 이었다.
“먼저 손을 대라는 소리가 아니다. 네가 그런 짓을 할 잡배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 다만, 만인 앞에서 이릴 양과 입을 맞출 용기 정도는 지금부터 길러 두는 게 좋을 게다.”
말뜻을 이해한 슐리펜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요제프는 언젠가 있을 결혼식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천 명의 하객 앞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맹세의 키스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꼴사나운 일은 또 없을 터였다.
“으음···.”
슐리펜이 침음을 흘렸다. 돌이켜 보면 자신은 청혼 외에 그 무엇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마저도 피를 잔뜩 흘려 혼이 반쯤 빠진 상태에서 한 말이었다.
사실 그도 내심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릴과의 교제를 시작하고 연애 관련 서적만 세 자릿수를 독파한 슐리펜은 많은 여자가 주도적인 남자에게 호감을 품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릴의 얼굴만 봐도 마비 증세를 겪는 그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럴 때만큼은 로난 놈이 부럽군. 애써 잡념을 털어낸 슐리펜이 다시 식칼을 집어 드는 찰나였다.
“이이익···슐리펜 님! 저 좀 도와주실래요?”
“지금 가겠소.”
주방 안쪽에서 이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몸을 일으킨 슐리펜이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자, 선반 앞에서 까치발을 든 채 낑낑대는 이릴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높은 곳에 올려놔서···이익, 팔이 안 닿아요.”
“음. 내가 하지.”
슐리펜이 끄덕였다. 이릴을 비켜서게 한 그가 가장 높은 칸에 있는 접시들을 내려 주었다. 자신과 달리 너무나도 쉽게 내리는 모습을 본 이릴이 뺨을 긁적거렸다.
“에헤헤, 고마워요.”
“별 거 아니오.”
“슐리펜 님은 참 친절해요. 공작님을 닮아서 그런가?”
이릴이 웃었다. 태양을 연상케 하는 미소에 다시금 슐리펜의 심장이 경련했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섬광 한 줄기가 스치며 지나갔다.
‘잠깐.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진도를 나가기에 굉장히 좋은 상황이었다. 때마침 일을 도와 호감을 산 데다 보는 눈도 없었다.
용기를 길러야 한다는 요제프의 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연애 고수들의 글귀가 머릿속을 빙빙 맴돌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이성을 되찾은 슐리펜이 이릴을 내려보았다. 노을빛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아롱이고 있었다. 숨이 서로에게 닿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거리가 더 가까웠다.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리 판단한 슐리펜이 뼛속에서부터 용기를 끌어내던 와중이었다.
“저기, 슐리펜 님.”
“음?”
슐리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히 그를 올려보던 이릴이 갑자기 까치발을 들었다. 쪽. 슐리펜의 뺨에 그녀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
슐리펜의 시간이 정지했다. 덜덜 떨며 팔을 들어 올린 그가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릴이 뒷짐을 진 채 말을 이었다.
“늘 신경 써주시는 거, 알고 있어요.”
“어, 어어. 으음? 어···?”
“고마워요. 슐리펜 님.”
슐리펜은 대답하지 못했다. 빠르게 소실되어 가는 정신력을 발휘하여 다리가 풀리는 것을 견뎌내는 것이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눈웃음치던 이릴이 작게 중얼거렸다.
“헤헤···역시 조금 부끄럽네요. 동생 말고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건 처음이라.”
새하얗던 이릴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져 있었다. 슐리펜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이릴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쪽. 다시 한 번 까치발을 든 그녀가 이번에는 반대쪽 뺨에 키스했다.
“아.”
“손님들이 기다리시니까 먼저 가 있을게요. 천천히 와요.”
이릴은 그 말을 남긴 채 등을 돌렸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슐리펜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허어억!”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슐리펜이 잠수하다 올라온 사람처럼 숨을 내뱉었다. 그는 지금에야 자신이 호흡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돌아오자 주변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역사적인 사건의 잔향을 미처 누리기도 전이었다. 홀 쪽에서 누군가의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릴 누나!”
“꺅!?”
이릴의 비명이 뒤따라 들려왔다. 개나 고양이 수준으로 격하되었던 슐리펜의 지능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가 홀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이릴 양! 이게 무슨···!”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웬 성별을 알 수 없는 꼬마 하나가 이릴을 껴안은 채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이릴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아하하, 간지러워요! 그래서 꼬마 손님은 누구실까요?”
“이히, 한번 맞춰 봐.”
모든 손님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지만, 정체불명의 꼬맹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릴에게 뺨을 비벼 대고 있었다. 그가 인간으로 변한 시타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슐리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간신히 공황 상태에서 벗어난 그가 과도를 집어들며 외쳤다.
“이놈!”
쉬이이익! 순식간에 모여든 바람이 과도의 검신을 타고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기세에 놀란 요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 슐리펜. 잠깐···!”
“끼어들지 마십시오!”
그가 다급하게 중재하려 들었지만 허사였다. 격노한 슐리펜이 저 싹수 노란 불한당을 응징하려던 차였다. 콰아아앙! 갑자기 식당 현관이 부서질 기세로 열어젖혀졌다.
“뭐, 뭐야?!”
“우컥!”
화들짝 놀란 손님들이 사래에 들려 콜록거렸다. 슐리펜의 동작이 잠시 멈췄다. 천천히 삐걱이는 문 너머로 웬 건장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니미랄···허억, 드디어 찾았다.”
눈매 사나운 청년의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꼭 온 제도를 전력 질주로 돌아다닌 사람 같았다. 그를 알아본 슐리펜이 눈썹을 치켜떴다.
“···로난?”
“비켜.”
식칼을 휘감던 바람이 사그라졌다. 슐리펜을 밀친 로난이 성큼성큼 가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고개를 돌린 시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 들켰다!”
< 외전